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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조원의 무게

한국 AI 전략의 갈림길에서


서울 서대문구의 한 회의실. 60세의 조성배 연세대 교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대한민국이 인공지능 전 분야에서 모두 잘 할 수는 없습니다."


이재명 정부가 '글로벌 AI 3대 강국'을 외치며 100조원 투자를 약속한 시점에서 나온 이 말은 다소 의외였다. 하지만 그의 다음 말을 듣고 나서야 그 진의를 알 수 있었다.


"'AI 풀스택'보다는 제조나 응용 등 우리가 경쟁력이 있는 특화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전략이 바람직합니다."


순위보다 중요한 것


조 교수에 따르면 한국의 AI 경쟁력은 현재 세계 6-7위 수준이다. 영국 토터스 미디어나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평가를 보면 글로벌 10위권 안에는 들어있다. 하지만 그는 순위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강조했다.


"G3라든가 그런 순위가 국민과 국가에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 뭐가 더 좋아지는 건지를 더 명확하게 해야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우리는 왜 AI 강국이 되려고 하는가? 단순히 순위를 올리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국민의 삶이 실질적으로 나아지기 때문일까?


경쟁력의 삼각형


조 교수는 AI 시대 경쟁력을 결정하는 요소를 세 가지로 압축했다. 컴퓨팅 인프라, 데이터, 그리고 인재. 이 삼각형이 견고해야 AI 강국의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경쟁력 척도는 대략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우선 굉장히 좋은 컴퓨터가 필요합니다. 다음 데이터를 얼마나 확보하고 잘 활용할 수 있는지 여부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그걸 다룰 수 있는 사람, 인재가 있는지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우리는 컴퓨팅 인프라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고, 인력은 부족한데다 심지어 유출되고 있는 상황이다. 마치 구멍 뚫린 양동이에 물을 붓는 격이다.


소버린 AI의 진짜 의미


정부가 강조하는 '소버린 AI'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처음에는 한국적 문화나 언어를 이해하는 AI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기술 주권 확보에 무게중심이 있다고 분석했다.


"우리 자체적으로 기술이 없으면 외국 기술에 종속되는 문제가 있으니 우리만의 어떤 AI를 만들어 보자는 뜻이겠죠."


민감한 정보 유출을 막고, 외산 기술 의존도를 낮추며, 데이터 주권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다면 국가적으로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100조원의 함정


정부가 약속한 100조원 투자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우리나라 연간 국가 R&D 자금이 30조원 정도라고 하니 100조원은 분명 큰 금액이다. 하지만 조 교수는 경고했다.


"100조가 크긴 하지만 백화점식으로 잘게 쪼개 투입하는 전략은 승산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는 미국이 AI 풀스택을 우방국에 전수한다며 협력을 얘기하지만, 실상은 종속 관계를 만들려는 것 아니냐는 날카로운 분석도 내놓았다. 모든 것을 다 해보겠다는 욕심보다는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조강국의 길


그렇다면 우리가 집중해야 할 분야는 무엇일까? 조 교수는 응용 AI, 특히 제조업 분야를 꼽았다.


"반도체라든가 조선이라든가 2차 전지 같은 제조업 분야는 중국이 빠르게 쫓아오고 있지만 우위에 있는 분야로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의료, 국방, 원자력 등도 포함된다. 의료는 세계적으로 발전한 분야이고 좋은 인력이 있으며, 국방과 원자력은 외산 기술에 종속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리고 고령화 사회를 맞아 노인 요양이나 간병 분야에도 AI 적용이 필요하다.


데이터의 족쇄


하지만 앞길에는 장애물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데이터 확보 문제다. 조 교수는 우리나라가 개인정보에 지나치게 민감하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여타 국가보다도 개인 정보에 굉장히 민감합니다. 그래서 미국 빅테크보다도 개인 데이터를 사용해 AI를 개발한다든가 서비스를 개발하는 게 발목이 잡혀있는 형국입니다."


데이터 익명화나 가명화 같은 기술이 발전되어 있는데도 국민들에게는 홍보가 잘 안되어 있다는 것이다. 개인정보법이나 데이터 관련 규제들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떠나는 인재들


더 심각한 문제는 인재 유출이다. 조 교수는 이를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더 좋은 환경에 더 좋은 보수가 있는 곳으로 가지 않을 이유가 없죠."


AI 분야의 임금 격차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야구의 메이저리그나 축구의 프리미어리그 우수 선수를 스카웃하듯 금액을 들이기도 한다. 게다가 단순히 금전적인 문제만도 아니다. 더 우수한 사람들과 함께 네트워킹하고 싶은 욕구, 젊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을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우리나라는 별로 매력이 없습니다."


그의 말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해법 중 하나는 스타트업 생태계 조성이다. 우리나라는 미국 실리콘밸리처럼 스타트업이 융성하는 나라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실패를 용인하고 창업을 권장하는 분위기와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특별 지구 같은 것들을 만들어 그 안에서는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해 스타트업들이 이런저런 시도를 해볼 수 있도록 생태계를 만들면 어떨까 합니다."


이스라엘처럼 소국이지만 AI 분야에서 잘하고 있는 국가들을 벤치마킹해 글로벌로 진출할 수 있도록 국가적으로 지원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공부문의 아이러니


흥미로운 발견도 있었다. 전자정부나 디지털정부에서는 세계적으로 앞서 있는 우리나라가 공공부문 AI 도입에서는 많이 뒤처져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정부나 전자정부에서 세계적으로 굉장히 앞서 있다고 생각하는데 공공 부문은 의외로 그렇지 않습니다. 유럽의 핀란드라든가 이런 데가 우리보다 더 잘해 벤치마킹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정권에 따라 부침이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지속 가능한 계획과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증강의 시대


조 교수는 AI 혁명의 본질을 '인간증강(Human Augmentation)'으로 정의했다.


"AI는 인간의 인지적인 기능을 확장할 수 있는 이른 바 '휴먼 어그멘테이션'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불, 자동차 등 도구로 인해 인간의 기능이 확장돼 왔는데 이제 지능의 기능을 확장시켜 더 깊이 생각하고 많은 걸 기억하고 할 수 있는 그런 방향으로 발전할 것 같습니다."


결국 AI는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도구라는 것이다. 생산성 향상을 통해 인간이 더 잘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AI의 궁극적 목표다.


일자리의 미래


AI로 인한 일자리 위협에 대해서는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고 했다. 실리콘밸리에서만 8만9천명이 실직했다고 한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이 출현하면 새로운 직업이 만들어지는 것이 기술 발전사의 흐름이었다.


"문제는 AI로 인한 변화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겁니다."


국가적으로 재교육이나 AI와의 협업 모델 정립 등을 통해 돌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택의 시간


인터뷰를 마치며 조 교수는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전 국민적으로 힘을 합치는 분위기를 만들지 않으면 AI 선도 국가가 되기는 어렵다고. 예전 IMF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처럼 말이다.


"모험이 될 수 있겠지만 국가적으로 올인원 태스크포스 같은 것을 만들어 권한을 주고 재원을 집중 투입해 돌파형, 선도형 분야에서 선도 국가로 올라서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100조원의 무게가 어깨에 무겁게 느껴진다. 이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한국의 미래가 결정될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하려다가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는 우를 범할 것인가, 아니면 선택과 집중을 통해 진정한 AI 강국으로 도약할 것인가.


그 갈림길에서 우리는 지금 서 있다.


출처: 디지털타임스, "'소버린 AI' 개발 옳은 방향… 100조 백화점식 투자 지양해야" (2025년 8월 21일)
인터뷰: 조성배 연세대 컴퓨터과학과 교수
취재: 강현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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