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일간의 질주 끝에 나온 이야기
어느 날 아침, 커피를 마시며 뉴스를 보다가 문득 멈춰 서게 되었다. "월화수목금토일 60일 내내 작업"이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기계공학 박사이자 프로젝트 관리 전문가로서 수많은 국가연구개발사업을 기획하고 평가해온 나에게, 이 한 문장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위헌적 비상계엄이라는 초유의 상황 속에서 출범한 이재명정부가 국정기획위원회를 통해 60일간 쉬지 않고 달려온 결과물. 그것이 바로 123개 민생 과제와 564개 구체적 실천과제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우리나라 R&D의 미래를 그려낸 야심찬 청사진이 있었다.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해 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저성장, 고물가, 높은 사회갈등, 저출생, 양극화, 기후위기, 기술격변... 이 모든 복합적 난제들이 한꺼번에 우리를 덮치고 있다. '피크 코리아'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경제적 우려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이재명정부는 여기서 답을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R&D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단순히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국가적 해법'으로서 말이다.
잠재성장률 하락 추세를 반전시키기 위한 '3+1 진짜 성장 전략'의 핵심에 R&D가 자리했다. 추격형 경제에서 기술 선도형 경제로의 대전환. 이것이 바로 이재명정부가 그리는 대한민국의 미래였다.
'AI 고속도로'라는 표현을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을 아직도 기억한다. 단순히 빠른 인터넷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데이터센터 등 핵심 컴퓨팅 인프라를 확충하고, 공공데이터를 전면 개방하여 AI 기술 개발의 토대를 마련하는 포괄적 개념이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AI 고속도로가 에너지고속도로와 연결된다는 점이다. 유연하고 분산된 AI 에너지 시스템으로 전환하여 탄소중립과 성장을 동시에 달성한다는 것. 기술 혁신과 환경 보호, 이 둘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잡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AI 강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결국 사람이 답이다. 이재명정부는 이를 위해 투트랙 전략을 선택했다. 내부 육성과 외부 유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것이다.
'청년 과기인 3종 패키지'를 통한 내부 인재 육성. 장학금, 연구생활장려금, 기본연구를 패키지로 묶어 연구자들의 불안정한 환경을 개선하려는 시도다. 박사후연구원의 대학 내 법적 지위를 명문화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수많은 젊은 연구자들의 고민을 들어온 나로서는 이런 변화가 얼마나 절실했는지 안다.
동시에 'Brain to Korea 2000' 프로젝트를 통해 해외 석학과 신진 연구자 2천 명을 유치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글로벌 인재를 통해 우리의 기술 경쟁력을 단기간에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세계 1위 AI 정부' 실현 계획이었다. 정부가 AI 기술의 최대 수요자이자 최초 시장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국가AI위원회를 범국가 AI 정책의 실질적 컨트롤 타워로 강화하고, 각 부처와 지방자치단체가 AI를 단계적으로 도입하도록 지원한다.
특히 AI 혁신제품의 공공조달을 통해 초기 시장을 창출하겠다는 계획이 눈에 띄었다. 이는 제3벤처 붐과 연계되어 글로벌 유니콘 기업 50개 육성이라는 목표로 이어진다. 정부가 단순히 정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시장에 참여해서 생태계를 만들어가겠다는 의지였다.
AI에만 올인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과학기술 5대 강국' 실현을 위해 정부 총지출의 5%를 R&D에 투자하고, R&D 예비타당성조사를 폐지해서 투자의 적시성과 유연성을 확보하겠다고 했다.
무엇보다 연구과제 중심제도(PBS)를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개편해서 출연금 중심의 재정구조로 바꾸겠다는 계획이 인상적이었다. 연구자들이 단기적 과제 수주 경쟁에서 벗어나 장기적이고 도전적인 연구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수많은 정부출연연구기관 연구자들과 일하면서 느꼈던 그들의 고충을 떠올리면, 이런 변화가 얼마나 절실했는지 안다. 매년 과제 따기 경쟁에 시달리며 정작 중요한 연구에는 집중하지 못하는 현실을 바꿔보겠다는 약속이다.
'New, Emerging, eXponential Tech'의 줄임말인 NEXT 전략기술 육성 계획도 흥미롭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등 우리가 이미 강점을 가진 분야의 초격차 원천기술을 확보하는 동시에, 첨단바이오, 양자, AI 휴머노이드, 소재 등 미래시장을 선점할 기술에 투자하겠다는 것이다.
선택과 집중의 전략을 통해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특정 분야에서는 글로벌 리더십을 확보하겠다는 의도가 명확하다. 모든 것을 다 하려다가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겠다는 결심이 보인다.
R&D 정책이 단순히 기술 개발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지역균형성장과 기후위기 대응이 모두 R&D 전략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5극3특(5대 초광역권과 3대 특별자치도) 중심의 균형성장을 위해 메가특구를 조성하고, 지역 주도 R&D 체계로 전환한다. '서울대 10개 만들기'와 공공기관 2차 이전을 통해 지역에 고등교육 인프라와 연구기관을 배치하겠다는 계획이다.
기후위기 대응도 단순한 환경 정책이 아니라 경제성장의 대동맥으로 접근한다. AI 전력 시스템 혁신, 탄소감축 공정, 사용후 배터리, 청정수소 등 기후테크 분야를 신성장 동력으로 집중 육성한다. 2030년대 서해안에서 시작해서 2040년대 한반도 전체로 이어지는 장기 로드맵도 제시했다.
가장 궁금했던 것은 재정 계획이었다. 2026년부터 2030년까지 5년간 총 210조원을 추가로 투자한다는 계획. 그 중 '세계를 이끄는 혁신경제' 분야에만 54조원이 배정되어 있다.
여기에 10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까지 조성해서 부동산 등 비생산적 부문으로 편중된 자금을 혁신투자로 유도하겠다고 한다. 코리아 프리미엄을 실현하고 코스피 5천시대로 도약한다는 목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 정도 규모의 재원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전 정부 감세 정상화와 지출 구조조정을 통해 마련하겠다고 하지만, 그 실현가능성에 대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해 보인다.
AI R&D 전략플래너로서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AI 기본사회' 구축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공공 AI 윤리 가이드라인 수립과 AI 오남용 대응 기술 개발은 생성형 AI 시대에 꼭 필요한 준비 작업들이다.
딥페이크 등 AI의 역기능에 대응하면서도 기술 발전의 긍정적 측면을 극대화하려는 균형 잡힌 접근이 인상적이다. 탈진실 시대의 혼란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전략적 판단으로 보인다.
물론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다. 무엇보다 국가AI위원회가 실질적인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다부처에 걸쳐 있는 복잡한 R&D 정책들을 효과적으로 조정하고 협력시킬 수 있을까?
또한 단기적 성과 압박 속에서도 중장기적인 기초 R&D의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다. 그리고 무엇보다 210조원이라는 대규모 재정 투자의 현실성에 대한 의문도 여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R&D 전략에서 희망을 보는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R&D를 단순한 기술 정책이 아니라 사회 문제 해결의 통합적 수단으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기술과 사회, 경제와 환경, 중앙과 지방을 모두 아우르는 포괄적 비전이 담겨 있다.
'AI 3대 강국'과 '과학기술 5대 강국'의 투트랙 전략도 현실적이면서 야심차다. 단기 성과와 장기 기반을 모두 고려한 균형 잡힌 접근이다.
결국 이 모든 계획들의 성공은 실행에 달려 있다. R&D 전문가로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 프로젝트 관리 방법론의 공공부문 적용이 더욱 확대될 것이다. 복잡하고 대규모인 국가 R&D 프로젝트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전문성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둘째, 생성형 AI를 활용한 R&D 기획의 효율성 제고가 핵심이 될 것이다. AI 도구들을 활용해서 더 정확하고 빠른 기획 업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기술과 사회, 경제의 융합적 접근 능력을 키워야 한다. 더 이상 기술만 잘하면 되는 시대가 아니다. 그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60일간의 질주 끝에 나온 이재명정부의 R&D 전략. 그 안에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물론 완벽하지 않다. 여전히 많은 숙제들이 남아 있고, 실현가능성에 대한 의문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방향은 옳다고 생각한다. R&D를 통해 우리 사회의 복합적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 기술 혁신과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려는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를 준비하려는 진정성이 느껴진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 계획들이 어떻게 구체화되고 실행되는지 지켜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더 나은 R&D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월화수목금토일, 60일간의 질주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