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AI의 새로운 선언
서울 hj비즈니스센터, 그곳에서 배경훈 과기정통부 장관이 던진 한 마디가 회의실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3위는 의미없다고 생각합니다." 취임 50일을 맞은 기자간담회에서 나온 이 발언은, 그동안 우리가 AI 강국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미국과 중국이 AI 시장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10%를 두고 3등을 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배 장관의 질문은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순위가 아니라 실질적 경쟁력을 갖추겠다는 것, 미국과 중국에 근접한 수준의 기술 역량과 서비스 역량을 확보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의 전환 뒤에는 10조 1천억원이라는 구체적인 숫자가 뒷받침되고 있었다. 올해 대비 3배 확대된 AI 예산,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GPU 확보 일정의 대폭 단축이었다. 2030년까지 5만장으로 계획됐던 것을 2028년으로 2년 앞당기고, 나아가 20만장까지 구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발표는 정부의 의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신호였다.
"5만장도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과기정통부 내부에서 2030년까지 GPU 20만장 자원을 구축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배 장관의 이런 솔직한 발언들이 오히려 신뢰감을 주었다. 특히 K-엔비디아 육성 전략을 설명하면서도 현실을 정확히 인정했다.
"국산 NPU가 NVIDIA GPU를 대응할 수 있는 정도의 기술 역량을 가질 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주신다면 아직은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추론용으로는 쓸 수 있는 NPU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계적 접근, 현실적 목표 설정.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전략이 아닐까.
5개 컨소시엄이 참여하는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에서도 그의 솔직함이 드러났다. "처음에 참여했던 5개 컨소시엄이 국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정도 수준의 파운데이션 모델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던 부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목표를 다시 설정했다. "무조건 세계 최고 수준의 LLM 모델을 우선 만들자."
언어모델에서 멀티모달, 액션모델을 거쳐 피지컬 AI까지. 올해 말에는 글로벌 톱10 수준의 LLM이 나올 것이라는 전망도 함께 제시했다. 미국과 중국의 모델 대신 한국의 K-AI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비전이 구체적인 로드맵과 함께 제시되는 순간이었다.
"수도권에 집중된 연구개발 자원을 지역으로 확산하겠습니다." 이 한 마디 뒤에는 구체적인 숫자들이 따라왔다. 대구 5천억원, 창원·경남·전북 1조원, 광주 6천억원. 단순한 지역 배분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혁신 역량을 키우겠다는 전략이었다.
대덕특구처럼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지역에도 만들어가겠다는 의지, 5극 3특 국가균형성장의 핵심 엔진으로서 연구개발특구를 활용하겠다는 계획. 혁신이 수도권을 넘어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AI를 활용한 과학기술 혁신을 통해 노벨상급 성과를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 장관의 이 발언은 단순한 호언장담이 아니었다. AI 바이오 분야에서 이미 단백질 구조 예측 등에서 의미있는 진전을 보이고 있다는 현실 인식이 바탕에 있었다.
"AI를 통해서 우리가 풀지 못했던 난제들을 풀 수 있는 기반이 분명히 만들어진다." 과학자들이 AI를 단순한 도구가 아닌 '에이전트 AI'로 활용해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 그를 통해 기존에 풀 수 없었던 난제들이 해결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장밋빛만은 아니었다. 이공계 인재 문제에 대한 질문이 나왔을 때, 배 장관은 머뭇거리지 않고 답했다. "지금 당장 답을 낼 수 있을까? 저는 지금 답 못 낸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 2-3년 동안은 한국도 가능성이 있다는 인식 전환을, 5년 안에는 한국이 R&D를 하기 위한 매력적인 곳이라는 인식 전환을 목표로 한다는 장기적 관점. 이런 현실적 진단이 오히려 더 신뢰감을 주었다.
17년만에 부총리급으로 격상되는 과기정통부. 과학기술인공지능장관회의 신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와 국가AI전략위원회 통합. 이런 거버넌스 변화 뒤에는 구체적인 문제 인식이 있었다.
"전문가들이 R&D 예산을 검토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예산 편성 과정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고, 기재부와 과기부 간의 역할 정립 필요성을 강조하는 모습에서 실무진의 고민이 느껴졌다.
간담회를 마무리하며 배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과기정통부가 단순히 기술을 지원하는 것을 넘어서 대한민국의 잠재성장률 3% 회복에 기여하겠습니다."
그의 앞에는 수많은 과제가 놓여 있다. 이공계 인재 문제, 기술적 격차, 국제 경쟁의 치열함. 하지만 그날 간담회에서 느낀 것은 현실을 정확히 보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의지였다. 순위보다는 본질을, 구호보다는 실행을, 단기적 성과보다는 장기적 변화를 추구하는 자세였다.
한국의 AI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변화의 방향은 분명해 보인다. "3위는 의미없다"는 선언으로 시작된 이 여정이 어디로 이어질지, 지켜보는 것 자체가 흥미진진한 일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