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R&D의 뼈아픈 진실
며칠 전 한 세미나에서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이민형 선임연구위원이 던진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2년 전만 해도 AI는 여러 신기술 중 하나로 조금 더 주목받는 수준이었지만, 2년이 지난 지금은 완전히 AI 중심의 세상이 됐다." 이 한 마디가 우리가 살고 있는 급변하는 시대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변화 앞에서 우리나라의 R&D 시스템은 과연 제대로 대응하고 있을까. 최근 국제학술지 네이처가 발표한 분석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한국은 GDP 대비 R&D 투자 비중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인구 대비 성과는 유난히 낮은 국가로 분류됐다. 이스라엘과 함께 말이다.
매년 30조원 규모의 막대한 예산을 R&D에 투입하고 있다. 작은 나라치고는 정말 엄청난 투자다. 그런데 왜 기대했던 만큼의 혁신 성과가 나오지 않는 걸까. 이민형 박사는 이 문제의 핵심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과제 발주하고 평가하고 끝나는 시스템으로는 40조원, 50조원을 투자해도 희망이 없다."
현재 우리나라 R&D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는 분명하다. 기재부에서 시작된 예산이 각 부처로 흘러가고, 다시 전문관리기관을 거쳐 대학과 기업에 과제 단위로 배분되는 수직적 전달 체계가 그것이다. 이런 시스템에서 연구는 개별 '과제'로만 인식되고, 연구자들은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고 정해진 평가를 받는 것으로 임무를 다한다고 여긴다. 그 연구가 시장에서 실제로 필요한 것인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지는 부차적인 고려사항이 되어버린다.
부처간 경쟁 체제도 심각한 문제다. 각 부처가 자신의 영역에서 열심히 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서로 따로 놀면서 중복 투자하고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이 반복된다. 개발 시대에는 이런 방식이 나름 효과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처럼 급변하는 환경에서는 오히려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 사이 미국과 중국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게임을 하고 있다. 미국은 이제 R&D에서 상용화까지 한 번에 연결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국립과학재단(NSF)조차 상용화에 직접 관여하기 시작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바이든 정부가 내세웠던 AI 규제를 대폭 완화하여 빠른 시장 선점을 노리고 있다.
중국의 변화는 더욱 놀랍다. 바이두, 디디 같은 기업들이 이미 20개 도시에서 로봇택시를 상용화하고 있다. 정부가 필요에 따라 규제를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어서, AI 시대에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도로교통법 때문에 무인 자율주행이 여전히 불가능하고, 2026년이나 2027년쯤 되어야 화성시에서 겨우 80대 정도 운행할 예정이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Plan-driven 방식에서 Value-driven 접근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그동안 '계획을 얼마나 잘 지켰는가', 'KPI를 달성했는가'에만 집중해왔다. 하지만 AI 시대는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한다. 2년 전에 세운 계획이 지금도 유효할 리 없다.
대신 시장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실패를 빨리 인정하고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개별 과제가 아니라 전체 생태계 관점에서 투자하고, 논문이나 특허 개수가 아닌 실제 사업화 성과로 평가하는 체계로 바뀌어야 한다.
여기서 생성형 AI가 흥미로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전 세계 시장 동향, 특허 출원 패턴, 투자 흐름, 심지어 소셜미디어 반응까지 실시간으로 분석해서 현재 진행 중인 연구가 시장에서 받아들여질 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다면 어떨까. 연구자들이 상아탑에 갇혀 있지 않고, 시장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면서 연구 방향을 조정할 수 있다면 우리의 R&D 시스템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의 역할도 재정립되어야 한다. 이민형 박사의 지적처럼 "지금은 전략의 시대이고, 정부가 시장에 직접 개입해야 할 일이 많아지는데, 그 수단이 출연연"이다. 출연연은 단순히 논문을 쓰고 특허를 내는 곳이 아니라, 혁신 생태계의 허브가 되어야 한다. 기술 개발부터 사업화까지, 대학과 기업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점이 더욱 절박함을 느끼게 한다. 미국과 중국이 양강 체제를 굳혀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2등 그룹에 머물지 않고 1등 그룹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의 창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 유니콘 기업 수를 보면 격차가 확연하다. 미국이 압도적이고, 중국이 그 4분의 1 정도 수준이다. 한국은 독일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미중과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
일본과 유럽은 이미 그 흐름을 놓쳤다. 독일의 SAP 정도가 유일한 글로벌 기업인데, 이마저도 빅테크라 부르기에는 애매한 수준이다. 우리도 지금 변화하지 않으면 같은 길을 걸을 가능성이 높다.
이민형 박사의 지적이 특히 뼈아팠다. "우리는 큰 그림을 보는 사람이 사실 없다. 작은 것들을 많이 보고 그것들을 묶어서 큰 것이라고 얘기하는데, 그렇게 보는 것과 진짜 큰 차원으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그림이다." 부처간 칸막이를 허물고, 장기적 관점에서 전략을 세울 수 있는 인재가 절실하다. 그리고 그런 전략을 실행할 수 있는 통합적 거버넌스 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결국 핵심은 기술 개발에서 그치지 않고, 혁신과 상용화까지 이어지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태계가 빠르게 변하는 시장 신호에 실시간으로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30조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쓰고 있으니, 이제는 제대로 써야 할 때다. 계획에 매달리지 말고, 진짜 가치를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말이다.
AI 시대는 이미 시작됐다. 우리가 변화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지금이 바로 골든타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