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영업자처럼 과제를 따러 다녔던 30년이 끝나고 있다"
대전 한국화학연구원 상생협력센터. 9월 25일 오후, 'POST-PBS,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라는 다소 딱딱한 제목의 토론회가 열렸다. 좌석을 가득 메운 연구자들의 표정은 복잡했다.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그런 얼굴들이었다.
30년간 우리나라 정부출연연구기관을 지배해온 PBS(Project Based System, 연구과제중심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된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두 달여. 이제 정말 달라질까?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똑같은 시스템이 될까?
발표자석에 선 온정성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연구기관지원혁신팀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정부의 개선안을 설명했다. 출연금을 2030년까지 전체 예산의 80%로 확대하고, 인건비는 100% 출연금으로 지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듣고 있던 연구자들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졌다.
하지만 패널 토론이 시작되자 분위기는 급격히 바뀌었다.
하태환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이 마이크를 잡고 털어놓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기획과제를 하나 떨어지면 월급도 못 받는 게 지금 구조예요. 그래서 탈락을 대비해 다른 과제를 보험처럼 또 기획해야 합니다. 전략사업이 도입돼도 인건비 문제에 대한 이행안이 없다면 결국 기존 PBS와 달라질 게 없다는 게 연구 현장의 판단이에요."
20년을 연구해도 남는 게 없는 기분이라고 했다. 과제 경쟁이 지나치게 심해지면 연구자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고 아이디어를 숨기게 된다고도 했다.
토론회장이 조용해졌다.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대놓고 말하기 어려웠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상근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선임연구원의 발언은 더욱 직설적이었다.
"사람들이 'R&D 예산이 늘고 PBS도 폐지된다고 하니 좋겠다', '돈 많이 벌겠네'라고 말해요. 하지만 연구자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죠."
그는 PBS의 핵심 키워드가 효율성, 경제성, 경쟁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효율성은 연구 효율이 아니라 '관리 효율'이라고 꼬집었다. 과학기술이 경제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되면서 연구자가 아니라 관리자, 관료 중심의 체계가 고착됐다는 것이었다.
고영주 한국화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이 들려준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2019년 일본의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통제가 있었죠. 그때 출연연과 대학, 기업이 함께 축적된 기술과 인프라를 총동원해 문제의 80% 이상을 해결해냈어요."
그는 이것이 출연연이 긴급상황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전략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국가가 필요할 때만 쓰는 조직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전략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출연연은 그간 국가가 필요로 할 때마다 전략적 기지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정작 평시에는 '수많은 연구기관 중 하나'로 취급받는 현실이 문제였다.
패널들의 발언을 듣고 있던 방청석의 연구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근 선임연구원이 던진 메시지는 명확했다.
"PBS는 효율과 경쟁을 말하지만, 그 효율은 관리자 중심의 행정 효율일 뿐이에요. 진짜 출연연은 과제를 따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 아니라, 국가전략을 설계하고 사회적 기여를 평가받는 기관이어야 합니다."
김태진 정보통신기획평가원 수석연구원도 같은 맥락에서 지적했다.
"PBS는 출연연을 과제 수주 경쟁자로 몰아넣었고, 결과적으로 국책연구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흐리게 했어요. 출연연이 다시 국가 임무 수행자로 자리매김하려면, 정부는 출연연에 대해 안정적인 출연금을 법적으로 보장하고 PBS 대체 정책을 단순한 사업 하나로만 들어선 안 됩니다."
정부가 제시한 개선안에 대해 현장의 평가는 엇갈렸다. 출연금 확대나 보상체계 개선 같은 부분은 환영받았지만, 근본적인 한계도 지적됐다.
이상근 선임연구원은 새로 도입되는 전략연구사업에 대해 "수탁사업이 대형화된 것일 뿐"이라며 "5년 내 상용화 가능한 기술을 요구하는 사업구조는 오히려 더 단기 성과 중심"이라고 비판했다.
김태진 수석연구원은 더 구체적인 제도 개선안을 제시했다.
"현재는 PBS를 폐지하더라도 수백 개 R&D 사업 중 하나로 전략연구사업을 새로 만든 것에 불과해요. 출연연의 고유 임무를 기관고유임무사업으로 명확히 정의하고 관련 법률을 개정해 정부가 출연금을 책임지는 구조로 바꿔야 합니다."
이찬구 충남대학교 교수의 발언이 토론의 핵심을 관통했다.
"PBS 폐지를 단순히 연구자 처우 개선이나 수단 변경으로 볼 게 아니라 출연연이 국책연구기관으로서 어떤 전략적 가치를 가질 수 있을지 구조적으로 재설계해야 합니다."
안오성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박사는 정부의 의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과기부가 여전히 뭘 바꾸려는지 명확한 비전이 보이지 않아요. 기술전략은 없고 전략기술만 나열되는 구조에서 과기부와 출연연 모두 역할과 방향을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영배 전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박사가 마지막으로 던진 메시지는 묵직했다.
"출연연 연구자들이 자영업자처럼 과제 수주에 내몰렸던 지난 30년을 되돌아보며 공공연구자로서의 책임감과 역할을 스스로 재정립할 시간을 줘야 합니다."
그는 PBS 폐지가 단순한 제도 변화가 아니라 출연연의 정체성과 임무를 새롭게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 시간 반에 걸친 토론이 끝나고 연구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이는 희망적이었고, 어떤 이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한 중견 연구원은 이렇게 말했다.
"변화에 대한 기대는 있어요. 하지만 진짜 바뀔까요? 지난 30년 동안 수없이 많은 개편이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거든요."
또 다른 연구원은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이번엔 좀 다를 것 같아요. 현장 목소리를 들으려는 정부의 의지도 보이고, 무엇보다 연구자들 스스로도 변화를 원하고 있으니까요."
온정성 팀장이 마지막에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현장에서 수용하지 못할 경우에는 강제로 진행하지 않겠습니다. 출연연 구성원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 정책을 수립하겠습니다."
토론회장을 나서며 생각했다. PBS 폐지는 분명 의미 있는 변화의 시작이다.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제도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30년간 과제 수주 경쟁에 내몰렸던 연구자들이 다시 공공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찾고, 출연연이 국가 전략을 설계하고 수행하는 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명확한 비전과 일관된 의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현장에서 뛰고 있는 연구자들이 있어야 한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진정한 혁신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PBS의 종료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이제 정말 달라질 수 있을까? 그 답은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이야기 속에 있다.
"연구를 잘하는 것보다 과제를 잘 따오는 능력이 더 중요시되는 구조"
이 말이 더 이상 현실이 되지 않기를, 그래서 우리 연구자들이 진정한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글은 2025년 9월 25일 대전 한국화학연구원에서 열린 'POST-PBS,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토론회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