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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몬 Aug 30. 2021

거제 동백섬의 여름 캠핑 추억

7명 젊음의 순수한 캠핑

    살아오는 동안 젊은 날의 기억으로 돌아가 보는 순간이 가끔 있다. 그때  가난하고 순수했던 시절의 낭만과 추억을 회상하면 지금도 미소와 아련한 그리움이 솟는다. 그건 젊음에 대한 그리움과 그때 그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묘하게 섞인 감정이다. 가끔씩 그때 푸르렀던 날의 청춘을 회상하면서 그 여학생들은 60대인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막상 다시 만나면 서로가 실망하지 않을까 싶다. 그 해 청춘은 빛나는 햇살처럼 눈부셨으니까.


나는 2학년을 마치고 군입대를 결심하고 있었다. 1학년 땐 대학가 전체가 삼선개헌 반데 데모하느라 수업은 대부분 결강이었지만 비싼 등록금은 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데모 스크럼을 짜고 구호와 함성을 지르며 정문으로 몰려갔다. 갑자기 데모 대열이 정지하더니 총장이 데모 대열 앞에 섰다. 5분만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며 총장은 목멘 목소리로 "학생들의 충정을 잘 안다. 그러나 지금 시가행진을 하면 많은 학생들이 경찰에 잡혀가거나 희생되므로 절대 정문을 열어 줄 수 없다. 기어이 나가겠다면 나를 밟고 가라"며 늙고 힘없는 두 손으로 철문을 꼭 잡고 버틴다. 총장의 진심 어린 말들은 후 나는 졸업할 때까지 학생 데모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화 운동한 친구들에게 미안하거나 빚진 감정은 없다. 그들만큼 치열하게 30년 이상 산업 전사의 역할을 했다.  


여름 방학이 다가오면서 고교 때의 절친 K1과 그의 형 K2(둘은 한 살 차이) 셋이 남해안으로 일주일 정도 무작정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우리는 군대 가기 전에 멋있는 청춘여행을 가고 싶었다. 셋이 K 형제의 집에 모여 여행 계획을 짰다. 계획이라야 코스와 등신 장비, 돈 준비하는 게 전부다. 셋은 산에 다니던 경험으로 어지간한 숙식은 텐트와 버너, 코펠로 해결이 가능하므로 차비만 있으면 되니 돈은 그다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모자라는 돈과 여학생과의 데이트는 현지에서 충당하자고 의기투합했다. 당시는 사람들이 대학생들에게 관대했고 무전여행하는 학생들도 가끔 있었다.




    여행코스는 대구에서 기차로 부산 가서, 부산에서 1박 하고 다음날 버스로 거제도 구조라해수욕장에서 며칠 묵고 그다음은 그때그때 움직이다가 마지막 6일째에 부산에서 대구로 오는 기차를 타기로 했다. 우리는 여행하면서 여학생들과 미팅도 하고 바다도 실컷 구경하며 이번 여름방학을 끝내주게 만들어보자며 들떴다. 셋은 신이 나서 이틀 만에 모든 정하고 부모님들께는 친구들과 해수욕 겸 등산 간다고 거짓

해서 셋 다 허락을 받았다. 장비는 뻔하다.  등산용 A형 군용 텐트 1개, 코펠, 석유 버너, 쌀과 라면( 당시 청년들은 4가지만 있으면 어디던 갔다)을 챙겨 배낭을 꾸리고 아침 차를 타러 대구역으로 향했다. 대구역에서 부산행 완행열차표를 끊으니 벌써 내 돈은 바닥이 보였지만 내색 않고 열차에 올라 오후 3시쯤 부산에 도착했다. 셋이 해운대에 도착해서 밥부터 해결하고 돌아다니다가 해질 무렵에 해변가에 텐트를 쳤다(그 당시는 텐트 허용). 지금도 해운대는 멋있지만 백사장에 별빛이 내려오고 달빛이 파도를 비추며 하늘과 바다가 닿으며 너무 아름다웠다. 바다를 자주 못 보던 셋은 '야 정말 좋다'라고 감탄하며 밤늦도록 셋이 소주를 마시며 밤새도록,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 얘기를 나눴다. 새벽에 잠들었다

너무 더워 눈을 뜨니 한낮이었다.

    그날부터 여학생들과 미팅하기 위해 해운대 백사장을 돌아다녔지만 예상과 달리 여학생들이 없었고 있다 해도 남학생들과 짝을 맞춰 왔기 때문에 셋은 투덜대며 소주만 들이켰다. 다음날 우리는 거제도로 가기로 하고 차비 아끼려고 걸어서 선박 터미널로 가서 거제도행 작은 통통배를 탔다(그때는 연육교가 없었다). 거제도에 구조라 해수욕

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구조라해수욕장은 모래가 검고 바닷물이 맑으며 관광객이 적어서 조용했다. 우리는

모래사장의 중간 정도에 텐트를 치고 우선 배고픔을 해결한 후 주변을 살폈다. 마침 민박집에서 또래 여자 둘이 해변으로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플레이보이인 K2에게 목표 발견 신고를 했다. K2는 즉흥 작전을 설명했다. 코펠을 들고 민박집으로 가서 먹을 물을 얻으러 온 체하다가 여학생들에게 말을 걸고, 몇 명이 왔는지 알아본다. 그래서 서로 짝이 맞으면 우리 텐트로 오게 해서 인사시켜 주겠다고 얘기했다.


K1과 나는 "제발 부탁한다, 니만 믿고 왔는데 해운대에서 허탕 치고 거제도에서도 허탕 치면 남자들끼리 무슨 재미로 일주일 지내냐 잘해보라"며 신신부탁했다. K2가 민박집 

으로 간지 한 시간이 지났다.




희한하게 한 시간 후 K2가 여자애들 넷을 우리 텐트 앞으로 데려오더니 인사를 시킨다. 여학생들은 서울 S여대 3학년이라며 우리들에게 상냥하게 말을 건다. 여학생 4명은 편의상 Y, A, B, C라고 부르자. 연애는커녕 여학생과 얘기도 못해보고 대학생활 1년을 허송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내가 폭탄이었지만 미남인 둘의 활약에 힘입어 구조라해수욕장에 있는 동안에 두 팀이 함께 놀고 음식도 같이 해 먹기로 합의를 했다. 저녁밥을 우리가 해놓고 여학생들을 텐트로 초대했다. 코펠 가득 된장찌개와 꽁치통조림 찌개를 만들어 금방 한 더운밥을 주니 여학생들도 맛있다며 한 그릇씩 비운다. 맛없고 초라하지만 맛있게 먹어준 것 같았고 설거지는 자기들이 한다

며 민박집으로 가서 코펠을 씻어서 텐트로 가져왔다. 밤이 되어 백사장에 7명이 둘러앉아서 들뜬상태로 말하고 웃으니

해변이 시끄러웠다. 게임을 해서 지면 벌칙으로 노래하기를 했다. 여학생팀의 리더는 Y였는데 눈치 빠르게 K2와 수군 거리더니 나와 K1의 파트너를 정해주곤 자기는 파트너가 없어도 좋다고 말했다.

C와 나는 한편이 되었다. C는 생머리 단발에 동그란 큰 눈, 작은 키에 귀여운 모습이었다. 한편이 되어 수건 돌리기도 하고 벌칙으로 둘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둘 사이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벌칙에 걸려도 좋은지 C는 그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며 웃는다. K1, K2와 Y는 그 방면에 대가라서 파트너가 있던 말던 모두와 어울려 재미나게 잘 논다. A, B는 분위기는 맞추려 노력한다. 7명이 '조개껍질 묶어 그 녀의 목에 걸고'를 밤늦게까지 부르고 얘기하다 여학생들이 말했다. 내일 자기들은 거제도 동백섬으로 가는데 우리도 같이 가자고 권한다. 그래야지 이제 와서 닭 쫓던 개가 될 수는 없었다. 두 팀이 같이 거제도 동백섬으로 가기로 합의했다. 동백섬에는 여학생들이 잘 숙소가 없다고 해서 동백섬 가면 여학생들을 우리 텐트에 재우고 우리는 텐트 밖에서 자거나 밤새우기로 했다. 이렇게 숙소 문제를 해결하고 여학생 셋을 민박집으로 데려줬다.


여학생들을 보낸 후 우리 셋은 거제 동백섬으로 여학생들과 같이 놀러 가는 것을 자축하며 데이트에 대한 기대감에 들떠 각자의 파트너에 대해 어떤 감정이 생기고 있는지 밤늦도록 얘기했다.  소주를 한창 마시다  K2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 내가 하루 겪어보니 서울 여학생들이 너무 순수하고 멋있다"라고 말했다. 나와 K1도 동감하며 진짜 순수하다 서울 여학생들은 깍쟁이인 줄 알았는데 너무 순수하며

멋있고 좋다. 거기다 서울 명문 여대인데 대구에선 만나보기 어려운 애들이다.

이번에 우리가 잘 대접하자, 그리고 다음에 대구로 초청하자고 잔뜩 고무되었다.


우리 셋은, 여학생들이 네 명이라서 짝을 정할 수도 없으니 서로 좋은 친구가 되도록 노력하자, 끝까지 잘 보호해 주자, 예의를 지키자고 결의했다. 내심으론 마음이 가는 여학생이 생기길 바랬다.

 



    구조라해수욕장에서 동백섬은 가까워 통통배를 타고 십 분이면 도착했다. 모두 동백섬을 한 바퀴 돌아보고 폐교된 분교의 뒷동산 잔디밭에 텐트를 치고 쉬었다. 여학생들은 뱃멀미로 힘들어해서 쉬게 하고 남학생들은 저녁밥을 했다. 밥이라야 꽁치통조림 찌개와 김치, 깻잎 장아찌다. 서울 여학생들은 입이 까다롭다던데 맛있다며 잘 먹어준다. 그날은 밤새워 얘기하기로 하고 여학생들만 텐트에 재우기로 했다. 잔디 위에 7명이 나란히

누워 한참 별을 보고 있었다. 누워서 별빛을 보는 게 너무너무 황홀했다.

Y가 " 지금부터 각자의 첫사랑을 얘기하자"며 돌아가면서 얘기 좀 해보란다. 난 첫사랑이라 할 만한 것이 없어 초등학교 6학년 때 찢어지게 가난했던 옆집 여학생을 도와주며 서로 좋아했던 얘기를 했다. 7명이 돌아가며 첫사랑 얘기를 하며 아! 감탄, 그래서 결국 헤어진 거야? 하며 모두 자신의 옛사랑과 친구의 옛사랑을 안타까워하며 별을 보며 밤을 새웠다. 헤어진 사랑의 사연도 너무 길어서 어떤 친구 얘기는 두 시간이 넘게 계속되어도 지루한 줄 몰랐다. 동백섬의 별을 보며 지샌 하룻밤은 7명 모두에게 평생 다시없을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주었으며 7명이 마음으로 진정한 친구가 된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서로의 부스스한 얼굴을 보며 깔깔거렸다. 여학생들은 텐트 안에 들어가서 얼굴을 매만질 사이에 남자들은 아침밥을 준비했다. 집 떠나오면 모든 식사는 남자가 책임진다. 여학생들은 아침식사를 하면서 점심때쯤 부산으로 가서 서울로 간다며 우리도 같이 부산으로 같이 가자고 조른다. 자기들이 서울로 갈 동안 에스 코트 해달라며 대답을 할 때까지 계속 조른다. 속으로 아니 벌써 서울로 간다고, 우린 여학생들과 짝도 못 맞추었는데.....


거기다 이래저래 돈이 나간 바람에 뱃삯도 없고 우린 난감하였다. 차마 여학생들에게 돈 없다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셋이 의논 끝에 K2가 "같이 가고 싶지만 우리는 여기 며칠 더 있을 거다. 너희들끼리 조심해서 잘 가라"라고 말했다. Y가 " 너희들 왜 여기 남으려고 그러니? 우리와 부산으로 같이 가자"라고 말했지만 우리가 끝끝내 먼저 배 타고 서울까지 잘 가라고 하자 여학생 넷 다 눈물을 보인다. 우리도 침울해졌지만 돈 없다고 말했을 때 받을 여학생들의 실망스러운 반응보다는 차라리 헤어지는 게 낫지 싶었다. 나중에 다시 연락을 하기로 하고 걔들의 전화번호를 모두 받아 적었다. 셋이 선착장까지 배웅 나갔는데 거제도로 갈 통통배가 아직 오질 않아 기다렸다.


     그때 낚싯배 한 척이 들어오더니 어른들이 내린다. Y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어른들 에게 가더니 말을 건다. 곧 활짝 웃으며 Y가 우리에게로 오더니 "아저씨들 부산에서 왔는데 곧바로 부산으로 돌아간데. 가는 길

이라서 여학생들 태워 줄게 하더라, 그래서 남자 학생들도 있다고 하니까 전부 태워 주겠다고 허락받았다"라고 한다. 아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넌 멋진 내 친구다! 7명이 같이 낚싯배를 함께 타고 부산으로 간다니 다들 너무 기뻐하며 활짝 웃는다.


낚싯배의 어른들은 우리 7명을 태워주시고 "학생들 좋을 때다. 열심히 놀고 열심히 공부해라"며 갓 잡은 생선을 회를 떠주시고 막소주를 내주신다. 다들 고맙습니다를 연발한다. 여학생들이 어른들에게로 가서 각각 앞에 계신 어른들께 감사의 소주를 공손히 따라드리자 오른들이 "아들 있으면 며느리 삼았으면 좋을 텐데"라며 웃으신다. 생선회와 소주를 마음껏 먹어라며 아예 회 떠는 방법을 알려 주신다. 생선회와 소주를 실컷 먹었다. 여학생들도 입이 볼록하게 먹느라 바쁘다. 바다에서 마시는 술은 취하지도 않는데 어느새 부산에 도착했다. 어른들께 감사하다며 연락처를 여쭈었지만 괜찮다며 거절하신다. 이제 배에서 내리면 여자 친구들과 헤어져야 한다. 구조라 동백섬아 안녕, 잘 가라 4명의 여자 친구들. 헤어지면서 우리는 4명에게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에 대구로 놀러 오라고 초대했고 여학생 넷 다 대구로 놀러 오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어떻게 대접할지는 전혀 대책이 없었다. 여학생들을 놓치지 않고 계속 연결하는 게 중요했다.


여학생들을 부산역에서 서울로 태워 보낸 후 우리는 심정이 착잡했다. 대구로 갈 기차표 살 돈이 없었다. 그 당시는 신용카드는 아예 생기지도 않았고 돈을 빌리거나, 구걸해서 차비를 마련하는 수밖에 없었다. K2가 부산역 광장에서 빌려보겠다고 나섰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세명이 빌려보자고 다시 나서서 두 시간쯤 지났는데 어머니 연배 정도 되는 분이 우리 하소연을 들으시고 곁으로 오셨다. 군에 간 아들 생각이 나서 돕겠다고 하신다.


우와 이런 일이 생기네! 세명의 차비를 주시곤 " 엄마 걱정 끼치지 말고 얼른 집에 가서 쉬라" 하신다. 연락처를 여쭈니 사양하셨지만 졸라서 주소와 연락처를 받아 적었다(꼭 갚아드린다는 약속도 했다). 대구로 가는 기차에서 서울 여자 친구들 오면 숙박과 놀러 다닐 곳을 의논했다. 숙박은 K 형제 집에서 해결하기로 하고 K1, K2가 부모님 승낙을 받기로 했다.

K 형제 어머님은 제법 큰 사업을 하셨고 집은 정원이 아름다운 큰 기와집이었다.

 



    대구에 도착한 다음날 K형제는 부산과 구조라해수욕장에서 있었던 일을 어머니에게 설명드렸다. 형제는 여학생들이 명문 S대생들이고 아주 순수하고 착한 학생들이라서 어머님이 보시면 좋아하실 거라며 집에서 재우게 해달라고 간청해서 승낙을 받았다. K 형제의 어머님은 집에서 재우라는 승낙과 함께 부산에서 돈을 빌려 준 분에게 갚을 돈을 주셨다. 우리 셋은 모든 일이 잘 되었다고 자축하며 동성로 돼지국밥 골목에 가서 대낮부터 자축 술을 실컷 퍼마셨다.


   서울애들이 사흘 일정으로 대구에 오기로 했다. 동대구역에서 넷을 만나서 K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어머님께 인사드리니 아주 반겨하신다. 네 명 여학생들과 우리 셋은 자주 가던 동성로 티파니 다방으로 갔다. 귀청을 때리는 소리에도 7명이 둘러앉아 구조라해수욕장 얘기를 다시 꺼내며 깔깔거렸다. Y, A, B, C 네 명의 여학생들은 내년에 자기들은 4학년이 되니까 졸업 전 마지막으로 한번 더 동백섬으로 같이 가잔다. 그리고 이번 겨울방학 때 우리 셋을 서울로 초대하기로 했다. 여학생들은 K 형제의 집에서 어머님의 환대를 받으며 우리와 놀러 다니느라 사흘이 금방 지나갔다. 우리 7명은 여학생들과 어떻게 짝 맞출지 탐색했다. 남학생은 세 명, 여학생은 4명이라서 여학생 한 명이 짝 없이 다녀야 하므로 짝을 맺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은근히 K1, K2는 똑같이 Y에게 관심을 둔 것 같았고, 난 구조라에서 한편이었던 C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C는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부드러웠고 내가 무슨 말을 해주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맘에 없는 말을 하지도 못했다.

7명 모두 마음이 잘 맞아 대구 시내를 신나게 돌아다니다가 이틀 후 서울 여학생들은 서울로 갔고 우린 개학을 맞았다.




    대구에 남은 우리 셋은 서울 여자 친구 들과의 관계에 관해 제법 심각히 의논했다.


여자 친구들은 내년에 졸업하면 시집가려 할 텐데 우린 아직 2학년이다. 쟤들과 계속 만나야 하나? 우리는 군대도 갔다 와야 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까? K2는 Y를 좋아하지만 Y가 자신을 좋아하는지는 몰라서 사귈까 말까 고민이라고 했다.

K1은 짐짓 맘에 드는 얘가 없다고 했고

나는 C와 사귈 생각 없다고 했다. K형제 둘 다  C는 널 좋아하는 것 같다고 다.


겨울 방학이 되어 초대받은 서울로 갔다. 여자 친구들과 만날 약속 장소는 신세계 백화점 옆 뽀뽀 다방이었다. 셋이 말하길 " 다방 이름이 이상하네 거기선 뽀뽀를 해야 하는 모양인데 누구랑 뽀뽀하지" 농담하며

그 다방을 찾아갔다(지금도 뽀뽀 다방은 그 자리에 있다). 오랜만에 본 여자 친구들과 반갑게 얘기한 후 명동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명동으로 데려갔다. 그때도 명동은 휘황찬란한 젊음의 거리였다.


저녁엔 여자 친구들이 구해 준 이대 근처 하숙집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은 이대 앞 레스토랑 ‘모래틈’이란 곳에서 만났다.  ‘모래틈’에 들어서니 해변 이미지의 인테리어와 촛불 조명이 은은해서 시끄럽기만 한 대구 다방과는 분위기가 정말 다르다. ' 역시 서울애들은 세련됐어 분위기 좋은데', 우리 셋은 데이트하는 기분이 됐다.

 

   시간이 얼마 지난 후 내년 1월에 입대한다고 내가 말했다. 모두 조용해졌다.

잠시 후 C가 "왜 그렇게 군대를 갑자기 가니, 연기하면 안 돼?",  난 "입영연기 신청을 안 했고 2학년 마치고 입대하려 입영 신청을 했다"라고 밝혔다. 어머님이 몇 년 전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 가세가 기울자 아버지

는 힘드셔서 " 대학 그만 다녀라 등록금 대주기 어렵다" 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더 이상 학교를 다니기 어려워 입대했다가 제대하면 내 손으로 등록금을 벌어 복학하고, 최대한 빨리 취직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여름방학 때 서울 여자 친구들을 만난 것이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연애보다 취직이 우선이었다. 서울 환영파티가 갑자기 나의 입대 송별식이 되었다. 7명은 통금 시간이 될 때까지 구조라해수욕장과 동백섬 얘기를 하며 서로를 처음 봤을 때 첫 느낌이 어땠다는 둥, 대구 시골 학생들과 어울려야 할지 자기들끼리 고민했다는 등 까르르 웃어댔다. 우리도 서울깍쟁이들이 나이도 우리보다 한 살 많아 만날지 고민했다고 털어놓으며 좋은 친구가 되자고 쨍~ 맥주잔을 부딪혔다. 통금 시간이 다가왔다.


서울 와서 며칠 만나보니 7명이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지만 짝이 만들어진 건 K2와 Y 밖에 없었다. 헤어지기 전에 여자 친구들은 내 손을 잡고 건강히 근무하고 휴가 오면 만나자고 위로해주었고 C는 슬픈 눈으로 가만히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C에게 잘 지내라고 말했다. 그 녀는 아무 대답을 안 했고 우리 둘은 그게 끝이었다. 우리는 연인이 되진 못했다. 그날 헤어지며 가슴이 시렸지만 그게 C에 대한 연민의 감정인지 스스로 입대하는 것에 대한 우울함인지는

알 수 없다. C와 헤어지면서 그 녀가 나로 인해 마음 아픈 일은 없기를 바랐다. 며칠 후 1월, 난 대구의 훈련소로 입소했고, K1, K2가 배웅 나와주었다. 둘에게 난 서울 여자 친구들과 끝났으니 너희들끼리 잘해보라고 했다. 나는 C와 연인도 아니었지만 입대하는 서글픔과 C에 대한 나의 어정쩡한 태도도

싫었다. 울적한 기분으로 입소했다. C와는 연인은 아니지만 내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는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이다. 입대하며 모든 것을 잊기로 했다.

    

(K1에겐 5살 많은 큰 형, 한 살 많은 K2가 있다)


   만 1년 후 첫 휴가를 나왔다. 사흘을 잠만 잔 후 K1을 만났다. K2는 몇 달 전 자원해서 공군으로 입대했고 K1은 졸업 후 입대할 거라며 군대생활에 대해 묻었다.

서울 여자 친구들 소식이 무척 궁금했다. K1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작년에 C와 Y는 결혼했고 나머지 A, B는 소식 듣지 못했단다. K1은 이제 그 애들과 다 끝났다면서 Y와 자기 큰 형 사이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는데 충격이었다. 복잡 난해한 시추에이션이 있었다.


재작년 여름 서울 여자 친구들이 처음으로 K형제 집에 와서 머물 때 K형제의 어머님이 " 서울 여자 친구 중에서 Y가 제일 맘에 드니 네가 큰 형(K1보다 5살 많은 맏형)과 사귀어보게 하라"라고 부탁해서 K1은 아무도 모르게 Y에게 얘기했단다. Y도 거절 안 하고 큰 형과 몇 번 만났는데 결국 둘의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다고 털어놓는다. K1의 어머니는 명문 S여대생 넷이 집으로 오니 며느리감을 구할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고 한다. K1도 한때는 Y를 좋아했는데 그럼  K1, K2, 큰 형 셋이 Y를 두고 내심 경쟁?  

Y의 현란한 트리플 플레이에 할 말을 잊었다.  


“진짜야? 그럼 K2 형에겐 뭐라 했는데?"

" 미안하다. 엄마가 하도 성화를 하기에 K2에겐 말 못 하고 어쩔 수 없었어."

"그러면 그동안 K2와 Y는 만났니?"

" 응, K2 형이 서울 두 번 가서 Y와 만났지만 Y가 결혼한다면서 두 번 만나고 더 만나주지 않더래"

"그래 차라리 K2는 Y가 니 큰 형과 사귀는 걸 모른 채 입대하는 게 나아. 니 큰 형과 사귀지 않았으면 K2 형과 Y는 어떻게 되었을까?"

"글쎄, K2가 군대에 갔다 와야 하고 나이 차이도 있으니까 Y는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았을까?”




몇 년 전 명동에 가던 길에 뽀뽀 다방이 생각나서 찾아갔다. 안에 들어가 보니

남대문 시장 상인들의 큰 목소리로 시끌벅적하다.  뽀뽀 다방을 보니 그 옛날 순수했던 C와 여자 친구들이 생각난다.


세월이 갔어도 C는 아직 그 순수하고 맑은 눈, 긴 생머리와 명랑한 목소리 그리고 예쁜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 것 같다. 그 해 거제 동백섬 여름 캠핑의 추억, 60대가 된 7명 젊음들의 기억 속에 오래오래 남아 있을 것 같다.


#거제 동백섬 #구조라해수욕장과 동백섬 #여름 캠핑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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