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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몬 Sep 29. 2021

글쓰기와 작가가된다는 것

북리뷰5 <마거릿 애트우드.글쓰기에 대하여.2021>

책과 저자에 관해


한글판 제목 : <글쓰기에 대하여 :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여섯 번의 강의. 282쪽>

작가 : 마거릿 애트우드

번역 : 박설영

출판 : 프시케의 숲

펴냄 : 1판 1쇄 2021.3.1.

가격 : 16,000원

       

책 <글쓰기에 대하여>는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원본 책(2002년)을 박설영이 번역, 출판사 '프시케의 숲'이 2021년 발행했다. 저자 마거릿 애트우드는  캠브리지 대학으로부터 '2000 Empson Lectures'의 글쓰기에 대한 강의 청탁을 받아 6번 강의한 구어체 내용을 문어체로 바꾸고 보완하여, 제목 <Negotiating with The Dead: A Writer on Writing>을 2002년 출간했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1939.11월 캐나다 오타와에서 태어나 토론토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하버드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6세 때 첫 시집 <서클 게임, 1964>으로 캐나다 연방 총독상을 받았다. 1985년 SF소설이자 여성을 출산 목적물로 설정한  <시녀 이야기>로 SF 문학상을 받았고, 이어 드라마로도 방영됐다.

1988년 <고양이 눈>, 2000년엔 <눈먼 암살자>로 부커상을 받았다. 2019년, <시녀 이야기>의 속편인 <증언들>을 발표하여 두 번째 부커상을 받았다. 그 외 '프란츠 카프카상', 미국 PEN기자협회 평생공로상' 등 10여 개 문학상을 받았다.


저자는 소설가, 시인, 에세이스트로써 장르를 넘나드는 왕성한 작품 활동과 교수, 국제 사면위원회, 민권연대협회에서 활동하며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거론된다. 그의 여러 장르의 작품들은,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엄청난 독서와 치밀한 내적 성찰을 바탕으로, 여성 혐오, 기후변화, 팬데믹에 관한 사회문제를 일찍부터 예견하고 있었다.



 

책은, 

글 잘 쓰는 법이나 글쓰기 기술에 관한 책이 아니다. 저자가 40작가로서 활동하면서 받았을 법한 글쓰기란 뭔지, 작가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한 질문에 대해 넓고 깊게 천착한 작품이다. 저자는 단테에서 스티븐 킹에 이르기까지  123가지 작품에서 약 230 구절을 인용하여 해석하면서 독특한 작가론을 들려준다.

저자는 글쓰기란, 캄캄한 어둠 속을 걸어 들어가서, 때로는 죽음과도 맞서며 운이 좋으면 어둠을 밝히고 빛 속으로 무엇인가를 들고 나오리란 욕망 또는 충동을 말하는 것이이 책은 그런 어둠, 그런 욕망에 관한 글이라고 말한다. 책에는, 저자 자신이 작가가 된 자전적 얘기, 작가가 가지는 이중성, 예술에 대한 헌신에 따르는 희생의 개념, 예술과 돈과 권력의 관계, 작가의 사회적 책임 , 작가와 독자와 책의 삼각관계, 단 한 명의 독자

<갈색 올빼미>에 대해, 지하세계로 갔다 오는 작가에 관해 지적이고 유머러스하게 얘기한다. 글쓰기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매혹으로부터 비롯되며, 어쩌면 이 책은, 40년 간 글을 써온 저자가, 독자들을 글쓰기와 작가가 되는 미로로 유혹하는 성찬식이면서 한편으론 경고일지도 모른다.




 : '미로 속으로'

저자는 글쓰기에 대해 독자와 작가 자신이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 3가지를 찾아서 그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강연을 준비한다.

ㅡ작가는 왜 글을 쓰는가?

ㅡ작가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

ㅡ글은 어디서 오는가?


첫 번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자는 작가 인터뷰, 사인회, 작품 속에 나타난 글 쓰는 이유, 심지어 작가들이 햄버거나 타파스 가게에서 나눈 잡스런 대화까지도 채집했지만, 글 쓰는 이유는 모두 다르고 공통적인 이유는 없다. 저자가 작가들에게 수집한 글 쓰는 이유는 너무 많아 공통점을 찾을 수 없다. 그중 73개의 이유를 책에 기록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서, 전부 잊히기 전에 기록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기쁨과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완벽한 예술작품을 창조하기 위해서, 돈 벌기 위해서 등등'

작가가 글 쓰는 이유는 끝이 없다.


저자는 글 쓰는 동기를 찾기에서 실패하는 대신 글을 쓴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구체적으로 소설가에게 소설로 들어갈 때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물었다. 소설가들의 공통적인 기분은, ' 앞을 볼 수는 없지만 앞으로 길이 나 있으며 가다 보면 결국 앞을 볼 수 있게 될 거라는 느낌'이라며 이것들이 바로 글쓰기 과정에 대한 수많은 묘사들의 공통 요소임을 알아낸다.


   글쓰기는, 홀로 캄캄한 길을 걸어가며 넘어지고 쓰러지며 스스로 길을 내면서 가야 한다. 작가 되기는, 글쓰기란 모험을 해서 운이 좋은 경우 그 밝은 곳으로 나올 수 있는, 치열한 생존게임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글쓰기는 어둠, 그리고 욕망이나 충동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속에 들어가서 운이 좋으면 어둠을 밝히고 빛 속으로 무엇인가를 들고 나오리란 욕망 또는 충동 말이다. 이 책은 그런 어둠, 그런 욕망에 관한 글이다.'(P.25)



1장 길 찾기 : 넌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작가'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작가가 되었나

1장 '길 찾기'는 저자의 유년시절과 청년기를 거치며 작가가 되는 과정을 쓴 자전적 내용이다.

 

길 찾기란 제목은 1978년 엘리스 몬로의 책,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Who Do You Think You Are"에서 가져왔다. 몬로의 책에서, 선생님은 학생 '로즈'에게 "시를 잘 외운다고 남보다 낫다고 생각해선 안돼.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라며 남다른 능력이 있다고 해서 남다른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힐난한다. 저자는 남다른 소설가 재능을 가졌지만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별다른 교육적 배려를 받지 못하고 틀에 갇힌 암울한 유년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낸다. 당시의 사회와 교육이 사람의 사고를 틀 안에 가둬두는 식이었다.


    저자는 유년시절 퀘벡의 숲 속 곤충연구소를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주로 캐나다 북부 산간 지대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오갈 데 없이 집에서 책을 읽는 조용한 아이였다. 저자가 7살 때 처음 유치한 희곡을 써기도 했으며 8살에 토론토로 이사 온 후, 1949년 열 살부터 1956년 열여섯이 될 때까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당시의 캐나다는 2차 대전 후의 암울한 시대상황으로 인해 캐나다 문학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고, 여성작가는 가명으로 책을 내거나 밥벌이는 고사하고 가정생활을 포기하거나,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하는, 여성에게 잔인한 사회였다. 여성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시대를 거치면서 저자는 성인이 되면서 여성 권리를 보호하는 글쓰기와 사회활동에 나선다.

  



 글쓰기, 작가, 글 쓰는 삶이란 주제는 명확히 그 경계를 가르기 어렵다. 저자는 일본 작가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에 나오는 니키의 발언을 인용하여 글쓰기와 작가의 경계는 모호하지만 작가가 되는 건 행복한

이라고 격려를 보낸다.


"물론 작가가 되는 것과 글 쓰는 것 자체는 구분할 필요가 있겠지요"

"아 거 봐요, 그래서 내가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겁니다. 아무리 글을 써도 작가가 될 수 없다면, 딱히 써야 할 필요도 없어요!"  

'글쓰기는 평범한 활동이며,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하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어떤 무게감이나 남다른 중요성을 지니는 일로 여긴다. 니키가 글을 쓰고자 하는 건 작가라는 지위를 원하기 때문이

지만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무작정 글을 쓰기 시작해도 작가는 행복하다'(p.32 )


1956년 어느 날 축구장을 가로질러 하교하던 저자는 갑자기 머릿속으로 쓴 시를 종이에 옮겨 쓰면서, 그때부터 오로지 글을 쓰고 싶다는 것 외엔 아무 생각도 안 났고 시인이 되었다고 회상한다. 대학에 입학 후 집을 떠나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쉴 새 없이 책을 읽고 시, 소설, 논픽션, 산문 등 거의 모든 형태의 글을 쓴 뒤, 26세에 첫 시집을 냈다.



2장 이중성 : 지킬의 손, 하이드의  손, 그리고 모호한 이중성 왜 항상 둘로 나뉘는가

2장은 생활하는 개인으로서의 작가와 글을 쓸 때의 자아에 관한 이중성에 관한 글이다.

작가는 자아가 두 개이다. 일반적 생활하는 개인 자아와 글 쓸 때의 자아. 일반적 개인 자아는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작가이지만 글 쓸 때의 자아는 왼전히 글에 몰입되어 글에 기록된 자아이며 책에 그 이름이 남는다.


저자는 이중성의 세계에서 자랐는데 이중성이란 그 시절 만화책에서도 볼 수 있었다. 슈퍼맨 VS 안경 재비 클라크 캔트, 캡틴 마블 VS 다리가 불편한 신문팔이 소년 빌리 뱃, 배트맨 VS 한심한 젊은이가 이중성 인물이며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가난한 목수 나사렛 예수의 모습으로 오신 것도 이중성이다. 작가의 이중성이란, 글을 쓰지 않을 때의 개인과 그 몸을 넘겨받아 글쓰기를 할 때의 또 다른 존재를 의미한다. 모든 작가는 생활인과는 다른, 글 쓰는 작가로서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글을 쓰고 출간하는 데에는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 출간할 때가 되면 그 책을 썼던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이 되고 없다. 작가와 그의 닮은꼴 존재, 그들은 교대한다. 각자 자신의 중요한 본질을 비워내어 상대방을 채워 준다. 둘 다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작가와 그 맞닿아 있는 인간 존재는 "각자 서로의 열쇠를 보관하고 있는 두 개의 잠긴 상자와 같다." 


저자는 작가의 이중성을 설명하기 위해 알려진 책 <거울 나라의 엘리스>를 이용한다.

"글을 쓰는 행위는 바로 엘리스가 거울을 통과하는 순간에 벌어집니다. 바로 그 순간, 똑 닮은 두 존재를 가로막던 유리 장벽이 녹아내리고 엘리스는 이곳도 저곳도, 예술도 삶도,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곳에 존재하게 됩니다. 동시에 그 모든 곳에 존재하게도 되지요. 작가와 독자 모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시간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P.95)



3장 헌신 : 위대한 판(Pan)의 신. 작가가 숭배해야 하는 제단은 어디일까

3장 헌신은 예술과 돈의 갈등에 대한 얘기다.

작가의 역할에는 다양한 기대와 우려가 투영된다. 오직 예술만을 섬기기 위해 '부의 신'이 주는 세속적 가치를 거부하는 문제, 그리고 이런 예술에 대한 헌신에 따르는 희생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다루었다.

저자는, 예술과 돈은 선택의 문제라고 본다. 작가도 밥은 먹고살아야겠는데, 책은 팔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고 질문한다.  작가를 성직자처럼 돈에 관심 없기를 바라는 사회 전반의 풍조 속에서 작가에게는 예술도 돈도 필요하며 다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는 있다고 저자는 현실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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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는 두 개의 자아를 가진다. 하나는 일상을 살다가 끝내 죽는 존재이고, 나머지 하나는 육체와 단절하고 작품과만 밀착한 채 글을 쓰고 이름이 되는 존재이죠. 이번엔 예술과 돈이라는 양 갈래에 대해 알아볼 차례입니다. 영어식 표현으로 도로가 바퀴와 부딪히는 지점, 그러나까 작가가 예술적 기교라는 돌바닥과 월세라는 단단한 바퀴 사이에 꽉 끼게 되는 지점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작가는 돈을 위해 글을 써야 할까요? 돈이 아니면 무엇을 목적으로 삼아야 할까요? 어떤 의도나 동기가 있어야 적합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술적 진실과 돈을 무 자르듯이 나눌 수 있을까요? 작가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헌신해야 할까요?' (P.102)   


예술을 만드는 가치는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게 아니며 오직 재능이 있어야만 예술을 만들 수 있다. 예술가가 되는 것은 자신이 선택하는 게 아니고 예술의 신이 예술가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의 신의 제단 맨 아래에 놓인 예술가의 시체의 수는 끝도 없다. 비록 재능 있는 예술가라 하지만 수많은 희생과 헌신을 바쳐야만 예술을 만들 수 있다. 특히 20세기 초만 해도 남자 예술가는 마음대로 살아도 되었지만 여자 예술가는 오로지 예술의 길을 걷기 위해 결혼 조차 포기할 뿐 아니라 온갖 험난한 일을 겪는다.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활동한 여성 시인들의 슬픈 인생사. 에밀리 디킨슨의 은둔,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고립된 삶,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의 마약중독, 샬롯 뮤의 자살, 실비아 프리스의 자살, 앤 섹스턴의 자살 등 수많은 여성 예술가의 슬픈 삶이 예술의 제단에 바쳐졌다.


'시나 소설을 예술로 만드는 가치는 시장교환 영역에서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가치는 작동 방식이 완전히 다른, 재능의 영역에서 나오지요. 재능은 측정할 수도 , 돈을 주고 살 수도 없습니다. 기대하고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재능은 주어지는 것이며, 그 외에 다른 식으론 얻지 못합니다. 신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존재의 충만함에서 나오는 은총이지요. 재능을 달라고 기도할 순 있지만, 그렇다고 기도에 꼭 응답을 받는 건 아닙니다. 응답이 보장되면 작가가 슬럼프에 빠지는 일도 없지 않을까요? 소설을 창작할 땐 1할의 영감과 9할의 노력이 필요하다지만, 작품이 예술로 살아남으려면 그 1할의 영감이 무조건 있어야 합니다. 문학적 가치와 돈은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돈이 되는 좋은 책, 돈이 되는 나쁜 책, 돈이 안 되는 좋은 책, 돈이 안 되는 나쁜 책. 조합은 이렇게 네 가지뿐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조합이 실현 가능하지요.' (p.110)



4장 유혹 : 푸로스퍼로, 오즈의 마법사, 메피스토와 그 무리들


4장은 보편적 인류와의 관계에서 작가를 환상 주의자, 숙련공, 사회 정치권력의 참여자란 측면에서 바라본다.

작가는 예술인이며 또한 생활인이다. 작가는 예술과 돈과 사회적 힘을 어떻게 균형을 만들어야 할지를 고민한다. 돈과 힘, 도덕 및 사회적 책임에 대한 예술가의 판단은 '작가가 원하는 대로 하고, 스스로 감수하는 것'이다. 저자는, 작가가 예술적 진실과 사회적 책임을 모두 중시하려면 '증인'이 되거나 직접 본 '목격자'가 되라고 한다. 그렇게 할 때 예술적 기반도 흔들리지 않고 사회와도 주체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사회적 의미는 독자가 결정함을 상기시킨다.   

  

'그중 하나는 예술과 돈과 권력이 엇갈리는 독특한 교차점과 관련이 있고, 나머지 하나는 도덕적 책임 아니면 사회적 책임이라 불리는 것과 관련이 있지요. 사람들이 예술활동을 통제하며 예술가에게 간섭하는 지점은 '돈과 힘'이라고. 예술가가 예술활동으로 사람들에게 간섭하는 지점은 '도덕 및 사회적 책임'이라 이름 붙일 수 있습니다. 시장에 영혼을 팔았는가? 영혼을 판 대가로 예술가가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영혼을 팔지 않았다면 누가 예술가를 껍질 무른 게처럼 짓밟는가?' p.152.


'술적 진실과 사회적 책임을 모두 중시한 작가에게 주체성이 있을까요? 있다면 어떤 종류의 주체성일까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물으면 이렇게 답할지도 모릅니다. '증인'이 되라고. 가능하다면 현장을 직접 본 '목격자'가 되라고. 과거엔 이런 역할이 많았어요. 내가 거기 있었다, 직접 봤다, 실제로 겪었다 이런 말들은 상상력을 자극하며 독자들을 유혹합니다.' (p.171)


'작가는 보편적 인류와의 관계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정말로 권력이 주어진다면, 권력의 사다리 어디쯤에 자리 잡아야 할까요? 선택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했다시피 나도 모릅니다. 그래도 젊은 작가에게 꼭 조언을 할려면, 엘리스 먼로의 말처럼 '원하는 대로 하고 결과는 스스로 감수하라' 고 말하겠어요. 아니면 '이야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라'라고 혹은 "공들여 쓰다 보면 사회라는 문제는 절로 해결된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에요. 비밀을 말하자면, 작품이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지 아닌지를 정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걸 정하는 건 작가가 아니라 독자예요.' (P.177)




작가는 늘 돈과 힘, 사회적 책임의 기로에서 고뇌한다. 그러나 작가도 밥 먹고 살아야 하니 돈 되는 글을 써야 한다. 어떤 글이 돈 되는지는 작가가 정하는 게 아닌 시장에서 독자가 정한다. 작가가 사회적 책임을 가져 자신의 영혼이 끄는 풍성한 예술적 글을 쓰더라도 예술적 글인지 아닌지는 시장이 결정하므로 작가의 선택지는 좁디좁다. 책은 발행하기 전에 모른다. 그래서 돈 되는 글쓰기가 따로 있다기보다 공들여 쓰다 보면 사회적 책임과 돈이 저절로 따라오는 책이 돈 되는 책이다. 작가 스스로가 사회적 문제를 잘 쓰는 작가인지, 예술성 깊은 좋은 글을 쓰는 작가인지에 대한 가치판단은 독자가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5장 성찬식 : 무명인에서 무명인으로

다섯 번째 강의는 작가, 책, 독자의 영원한 삼각관계를 탐구한다. 작가는 진짜 사람, 구체적인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서 글을 쓴다. 저자는 1988년 '갈색 올빼미'를 위해 소설 <고양이 눈>을 썼다. '갈색 올빼미'는 저자가 9살 때 무척 따랐던 성인이었는데, 그후로 서로 연락이 없는 채 '갈색 올빼미'가 90세 되던 해에 저자와 해후한다.


'작가는 지면과 소통합니다. 독자 역시 지면과 소통합니다. 작가와 독자는 오직 지면을 통해서만 소통하지요. 이것이 글쓰기의 삼단 논법입니다. 첫째, 작가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  둘째,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의 책의 기능, 그러니까 의무는 무엇인가? 작가가 생각하는 책의 기능은 무엇인가? 세 번째 질문은, 앞의 두 질문에서 파생된 것으로, 독자가 책을 읽고 있을 때 작가는 어디에 있나? 정말 타인의 편지와 일기 훔쳐보기를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라면 곧장 답을 맞힐 겁니다. 답은, "글을 읽을 때 작가는 같은 방에 없다 "이지요.'

(P.182)


'그러다 책이 성공하면 작가는 '유명인'이 되고 독자 집단은 그를 흠모하는 '늪지'가 됩니다. 하지만 무명인에서 유명인으로 바뀌는 데는 트라우마가 동반돼요. 메릴린 먼로가 말했지요. "다른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무명인은 유명인이 될 수 없다." ' (p.193)


'작가는 누구를 위해서 글을 쓰는가라는 대답은 두 가지입니다. 작가는 갈색 올빼미를 위해, 그때 자신의 인생에서 '갈색 올빼미'에 해당하는 누군가를 위해 글을 씁니다. 진짜 사람, 그러니까 구체적인 단 한 사람을 위해서 말이에요. 작가가 글을 쓰는 건 바로 '독자'를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아닌, '당신'인 독자를 위해, '친애하는 독자'를 위해. '갈색 올빼미'와 '신'의 중간 어디쯤에 존재하는 , 이상적인 독자를 위해, 그리고 어쨌거나 이런 이상적인 독자는 누군가, 어떤 '한 사람'이지요. 독서라는 행위도 글을 쓴 행위처럼 언제나 단수로 이루어지니까요.' (p.213)



6장 하강 : 죽은 자와 협상하기

여섯 번째 강의는 저자의 특이한 이론인데, 작가가 이야기를 찾아가는 여정과 그 어둡고 복잡한 길에 대해 다룬다.

'이번 장의 제목은 "죽은 자와 협상하기", 모든 서술적 글쓰기, 아니 어쩌면 모든 글쓰기는 사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매혹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가설을 깔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위험을 무릅쓰고 사후세계로 들어가 , 죽은 자로부터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데려오고자 하는 욕망에서 글쓰기가 비롯되는 게 아닐까 하는 거죠. 좀 특이한 주제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조금 특이한 게 맞습니다, 글쓰기 자체가 원래 조금 특이하니까요.' (p.220)


'죽은 자의 땅으로 가서 세상 사람을 산의 땅으로 데려오는 것.  이것은 인간의 아주 깊숙한 욕망이자, 아주 엄격히 금지된 행동입니다. 하지만 글을 씀으로써 죽은 자에게 일종의 생명을 부여할 수 있어요.' (p.238)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이 아니라, 그에 대한 걱정(덧없음, 무상함,결국 언젠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글을 짓고자 하는 욕구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는 많습니다. 왜 다른 예술이나 매체가 아닌 굳이 글쓰기가 개인의 최종적 소멸에 대한 불안과 그토록 밀접하게 연결되는 걸까요? 당연히 글쓰기의 속성도 한 몫합니다. 이를테면 공연 무대와는 달리 영원해 보이고 결과물도 오래도록 살아남으니까요. 글을 쓰는 행위가 사고 과정을 기록하는 거라면 그 과정으로 남는 건 일련의 화석화된 발자국입니다.' (p.221)  


책은, 시인 오비디우스의 쿠마에의 무녀인 시빌의 말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운명이 내게 목소리를 남겨 놓아,

                    사람들이 그 목소리로 나를 알아보게 될 겁니다."   





    저자는 글쓰기와 작가되려는 것에 대한 경험을 얘기한다. 글쓰기는 컴컴한 미로속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경고하지만, 걸어가다보면 밝은 곳을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준다. 이 책에 있는 엄청난 분량의 인용구절을 읽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단, 반복해서 읽노라면 단테에서 스테판 킹까지의 120여 가지의 작품을 조금씩 맛볼 수 있으며, 저자의 엄청난 독서량,지성과 위트에 감탄한다. 저자는 글쓰기와 작가의 경계는 모호하지만 사회적 지위가 없더라도 작가는 행복하다는 격려를 독자들에게 해준다.(제일 맘에 드는 말이다) 

작가가 되려면 글쓰는 재능이 있어야하며 작가가 되고 싶다고 작가가 되는 게 아니고 예술의 신이 작가를 선택하는 것이라는 저자의 이론은 평범한 글쓰는 이들과 작가를 구분하는 잣대이다. 하지만 예술가의 제단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려 있다고 하니 무릇 작가가 되려는 이는 재능만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 헌신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저자는, 글쓰기와 작가가 된다는 것이 참으로 지난한 일이지만 매우 특이하면서도 행복한 것이라고 유혹하며 성찬을 차려준다.    



     <왼쪽 2판 표지와 오른쪽 초판 표지의 제목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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