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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자전거와 할머니

by 고산골 산신령

앞산이 입산 통제되면서 자연스럽게 신천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형 산불 이후 내려진 지자체의 불가피한 조치였지만, 도심에서의 새로운 일상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 신천을 걷거나 달리는 동안 나는 도시의 리듬을 따라가며, 그 속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장면들과 자주 마주하게 된다.

며칠 전, 둔치에 세워진 공유자전거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던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다.

“멀쩡한 자전거를 왜 저기에 버려뒀노?”

그 말에 친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들에게 공유자전거는 ‘공유재산’이 아니라, ‘버려진 자전거’ 혹은 ‘도심의 쓰레기’처럼 보였던 거다. 세대 간 인식 차이일 수도 있지만, ‘공유’라는 개념 자체가 여전히 낯선 이들도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최근 재미있는 기사를 봤다. 하나는 지역 언론에 소개된 ‘공유서재’에 관한 칼럼이었다. 필자가 참여하고 있는 책 모임에서 이 운동을 펼치고 있기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누구나 책을 기증하고, 또 자유롭게 가져가 읽을 수 있는 열린 서재. 대구에서 시작된 이 작은 움직임이 지역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공유경제의 개념이 문화운동으로 확장되는 흐름은, 단순한 트렌드를 넘어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씨앗처럼 느껴졌다.

점점 그 비중이 커지고 있는 공유경제를 문화운동에 접목, 사회 변화의 단초를 제공하는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 하나는 중앙 언론의 재미과학자 인터뷰에서다. 리더의 개념을 달리 생각하게 하는 인터뷰였다. 재미과학자는 “예전에는 자기 밑에 많은 사람을 거느리든지, 조직을 운영하는 사람을 리더라고 했지만 1인 리더도 가능하다.” 했다. 리더는 ‘power of vision’ 즉 ‘미래를 보는 눈’만 있으면 그 위치가 어디든지 상관없다는 의미였다.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과 통찰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리더는 될 수 있다는 얘기여서 너무나 공감됐다.

신천이나 도심을 걷는데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생각에 집중하지 못하는 거다. 걷는 주변 환경이 달라지고, 오가는 사람도 자꾸만 바뀌는 탓인지 생각하다가도 이내 옆길로 새는 게 대부분이다. 앞산, 팔공산 등 대구의 주요 산 입산 금지 조치 이후 하루도 빼지 않고 신천을 걷거나 뛰었지만 ‘사고’를 할 수 없다는 게 매일 드는 아쉬움이었다.

도시를 산책하는 거와 숲을 걷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왜 숲을 ‘사유하는 철학자’라고 하는지를 조금은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퇴계가 ‘숲을 독서 하듯 즐겨라’는 의미의 ‘유산여독서(遊山如讀書)’를 그렇게 강조했는지도 이해가 됐다.

공유경제가 점점 일상에 스며들고 있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감각은 아직도 미숙한 경우가 많다. 공유자전거를 쓰레기로 본 할머니처럼, 우리 역시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숲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우리는 숲을 ‘등산하는 장소’ 정도로 여기지만, 사실 숲은 인류의 고향이자 문명의 기원이기도 하다. 공유경제를 생각할 때마다 숲이 대표적인 공유경제의 원천이 아닐까는 생각이 든다. 숲은 인류가 태어난 고향이고, 숲을 통해서 인간은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숲은 인류 기억의 공유 장소다. 숲만큼 인간의 수많은 신화와 전설, 영웅의 이야기를 가진 곳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숲은 인류 최초의 ‘공유 플랫폼’이 아닐까 싶다.

숲에 관한 우리의 사고는 단순히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다. 숲은 피톤치드의 보고로 그 속에 있는 인간을 스스로 치유하게 한다는 과학적 사고를 덧입히며 숲의 순기능을 끊임없이 강조하지만, 여전히 숲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버려진 공유자전거나 다름없다는 것 같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좋은 철학은 느린 철학’이라고 했다. 빠른 해결책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첨단을 사는 우리는 쉽게 동의하기가 힘들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유투브가 대세인 세상은 불과 몇 초의 쇼츠(shorts) 영상으로 우리의 삶과 인생을 재단하고 판단하고 있다. ‘멈춰야 인식할 수 있고, 사유할 수 있다’. 미래를 볼 수 있으면 ‘1인 리더’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리더는 관찰하고 성찰하고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숲에서 느린 사색을 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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