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성 앞에 남루해져 버린 인간

영화 〈살인자 리포트〉, 확신이라는 방어막

by agon바두슴
넥플릭스 캡쳐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다.
그리고 그 무너짐은 언제나 아주 부드럽게 시작된다.

누군가 말한다.
차분하게, 전문가의 얼굴로, 선의의 어조로.
그 말은 폭력이 아니다.
오히려 보호처럼 들린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말을 믿는다.

악은 그렇게 시작된다.
위협이 아니라 안도의 형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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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언제나 설명 가능하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설명한다.
상황을, 선택을, 감정을.
설명은 언제나 정확하고 논리적이며 빈틈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설명이 많아질수록
어떤 감정은 점점 사라진다.
불편함, 꺼림칙함,
설명되지 않는 찜찜함.

그 감정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편안해진다.
그리고 바로 그 편안함 속에서
악은 자리를 잡는다.

악은 이해되지 않을 때보다
너무 잘 이해될 때 더 오래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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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어도 기자님 자신을 믿으셔야 합니다.”

정신과 의사 이영훈의 이 말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정중한 문장이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문장이기도 하다.

이 말은 기자를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존중하는 척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자는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 문장은 이렇게 작동한다.
현실을 다시 보게 하지 않는다.
대신 자기 안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만든다.

의심의 방향은 바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다.
타인의 말, 타인의 고통,
타인의 침묵은 점점 중요하지 않게 된다.

모든 판단은
‘내가 지금 얼마나 안정적인가’라는
내부의 기준으로 환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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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 앞에 남루해져 버린 인간

이 영화의 인물들은
비열하지도, 잔인하지도 않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은 가장 초라해진다.

존재의 본성은
옳고 그름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의 얼굴 앞에서
말을 멈출 수 있는가의 문제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멈추지 않는다.
계속 말하고, 계속 해석하고, 계속 정리한다.

그 과정에서
타자의 고통은
사건이 되고, 사례가 되고,
보고서의 한 줄이 된다.

존재 앞에서
인간은 그렇게 남루해진다.
자신의 언어로
타자를 덮어버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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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악이 처벌로 끝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말한다.
악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 이유는 단순하다.
악은 언제나
정상적인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도 안에 있고,
전문성 속에 있고,
친절한 문장 안에 있다.

그래서 악은
폭력으로 드러나기보다
정당성으로 보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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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그노크라시가 무너진 자리

존엄이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인간을 설명하기 전에 멈춘다.
판단하기 전에
얼굴을 본다.

그러나 이 영화의 세계에서는
그 순서가 뒤바뀌어 있다.
먼저 분석하고,
나중에 이해한다.

존엄은 말해지지만
결정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그 자리를
논리와 확신이 대신 차지한다.

디그노크라시가 무너진 자리에서
인간은 서로를
존재가 아니라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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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

이 영화가 끝난 뒤
관객에게 남는 질문은
사건에 대한 것이 아니다.

> 우리는 왜 이렇게 쉽게
자신을 믿게 되었는가.



회복해야 할 것은
자기 확신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자신의 판단을 유보할 수 있는 능력.
설명보다 먼저
멈출 수 있는 용기.

그때에야 비로소
존엄은 다시 정치가 된다.
디그노크라시는
다시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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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이 영화는 우리를 남겨둔다

〈살인자 리포트〉는
해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를
존재 앞에 남겨둔다.
그리고 묻는다.

> 당신은
이 말을 여전히 믿겠는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믿어야 한다”라고.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너무 쉽게 안심하는 순간,
가장 조용히 우리 옆에 앉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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