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은 왜 이렇게 오래 남을까

〈기차의 꿈〉사르트르 이후의 삶, 카뮈 이후의 태도

by agon바두슴

영화를 봤다, 그리고 그날 저녁부터 내 삶의 몇몇 장면들은 이유 없이 자막이 달린 것처럼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시작도 없이 사랑은 이미 와 있었고,
사라짐은 이유 없이 들이닥쳤다.
〈기차의 꿈〉은 그 이후에도 끝내 떠나지 않는 고독을 바라본다.



클린트 벤틀리의 〈기차의 꿈〉은 이해보다 먼저 감각에 도착한다.

벌목의 소리,

철로의 진동,

눈과 흙과 바람과 계절의 반복.

설명은 없다.

별, 꽃, 아기


파스칼 키냐르의 말처럼, 인간은 언제나 의미 이전의 세계에 먼저 잠긴다. 이 영화에서 삶은 설계되지 않는다. 이미 놓인 자리에서, 오래 지속될 뿐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실존은 선택의 불안을 동반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인물에게 선택은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대신 남는 것은 감수다.

떠날 수 있었지만 떠나지 않는 시간,

말할 수 있었지만 침묵하는 시간.

자유는 여기서 선언이 아니라 잔여가 된다.

선택 이후에 남아, 끝내 포기되지 않는 태도.

카뮈의 부조리는 이 영화에서 소리 없이 작동한다. 세계는 이유를 주지 않고, 상실은 해명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삶은 중단되지 않는다. 기차는 목적지가 아니라 통과의 장치다. 시간은 구원이 아니라 반복이다. 반항은 없다. 다만 내려놓지 않는 지속만이 있다.


이 영화의 고독은 현대적 은둔에 가깝다. 사람을 피해서가 아니라, 세계를 너무 많이 겪은 뒤 물러난 상태. 그러나 이 고독은 공허로 끝나지 않는다. 스쳐 지나간 얼굴들, 웃는 얼굴들이 가족이 된다.



​"우리는 우리가 구하지 못한 자들의 유령을 입고 살아간다. 그 영혼의 무게가 곧 나의 부피가 된다."


레비나스가 말한 얼굴은 설명이 아니라 요청이다. 키냐르의 언어로 옮기면, 얼굴은 말 이전의 윤리다. 우리는 그 요청 앞에서 완전히 혼자가 되지 못한다.

〈기차의 꿈〉은 위로하지 않는다. 다만 묻는다. 설명되지 않는 삶을 견딜 수 있는가. 의미 없는 시간 속에서도 떠나지 않을 수 있는가. 이 영화에서 고독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 남아, 인간을 세계에 묶어 두는 마지막 감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