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한-알)시대의 도래

할아머니​, 삶의 가장 깊은 안쪽의 이름

by agon바두슴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지만, 어떤 이름은 부르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고요하고도 따뜻한 기운이 감돈다.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호칭의 첫음절인 ‘할’이 그러하다.


이 소리는 입술 끝에서 가볍게 튕겨 나가는 소리가 아니다.

혀가 뒤로 물러나고 숨이 목구멍 깊은 곳에 한 번 걸려 나오는,

마치 삶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듯한 낮은 울림이다.


​흔히 부모를 삶의 입구라고 한다면,

조부모는 삶의 안쪽이다.

부모가 우리를 세상으로 밀어 올리는 동적인 힘이라면,

‘할’의 이름을 가진 이들은 우리가 어디에서 흘러왔는지를

묵묵히 증언하는 정적인 뿌리다.


그들은 나를 직접 낳지는 않았지만,

내가 존재하기 위해 거쳐온

수많은 계절과 풍파를

몸소 통과해 온 이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할’이라 부를 때,

그것은 단순한 관계의 호칭을 넘어선다.


그것은 한 인간이 통과해 온

거대한 시간의 두께를 부르는 행위이자,

사라지지 않는 기억의 좌표를 찍는 일이다.


​이 ‘할’이라는 음절은 동사 ‘하다’와 묘하게 닮아 있다.

하지만 ‘하다’가 앞을 향해 달리고,

일을 만들고,

오늘을 완성하는 치열한 속도의 언어라면,

‘할’은 그 속도를 모두 덜어낸 가장 느린 형태의 동사다.


‘할’은 무언가를 새로이 시작하기보다,

이미 해온 것들 위에

조용히 내려앉는 눈과 같다.


​젊음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손을 뻗치며 나아가는 시기라면,

‘할’의 시간을 사는 이들은 ‘이미 해온 채로’ 존재한다.


그들의 손이 무엇을 했는지보다,

이제는 그 손이

얼마나 평온하게 멈추어 있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대신 침묵의 접두어가 되어

우리 곁에 앉아 있다.


그 침묵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을 가능하게 했던

그 모든 시간을

이미 몸속에 갈무리했기 때문에

나오는 여유다.


​우리는 조부모에게

무언가를 해달라고 보채지 않는다.

그들이 이미 충분히 살아냈고,

충분히 사랑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름을 바꾸지 않고도

이미 다른 생을 살고 있는 존재들이다.


하다가 멈춘 것이 아니라,

하다가 침묵으로 승화된 존재.

그들은 존재 자체로 우리에게 ‘삶은 결국 기억되는 것’ 임을 가르쳐준다.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나의 이름 앞에도

이 고요한 접두어 ‘할’이 붙을 것이다.

‘하다’라는 역동적인 동사에서 떨어져 나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조용히 안착하는 음절.

그때의 나는 더 이상 무언가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저 누군가의 가장 깊은 안쪽에 앉아,

내가 살아온 시간의 두께로 누군가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할’은 늙음이 아니다.

그것은 한 생애를 다 통과한 몸에만 허락되는, 세상에서 가장 품격 있는

마침표이자 새로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