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삶도 헛되이 짓이겨지지 않는다: 쑥과 냉이

십자화과의 정면승부와 국화과의 은둔적 저항에 관하여

by agon바두슴

​생태숲해설가로 살아온 지난 15년, 수많은 봄을 들판에서 맞이했습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신록의 찬란함 속에서 내가 목격한 것은 고요한 평화가 아닌, 지독하리만치 치열한 생존의 전쟁이었습니다.


움직일 수 없다는 부동(不動)의 숙명을 짊어진 채, 도망칠 발 대신 '맛'이라는 화학적 병기를 갈고닦아온 식물들의 응전.


​젓가락 끝에 걸린 연약한 냉이 한 줄기, 쌉싸름한 씀바귀 한 점은 단순한 허기를 채우는 재료가 아닙니다. 그것은 수억 년을 이어온 거대한 생존의 역사이자, 그들이 온몸으로 써 내려간 실존의 문장입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우리 식탁을 양분하는 두 거대 가문, 십자화과(Brassicaceae)와 국화과(Asteraceae)가 봄의 전장에서 구사하는 각기 다른 실존의 문법을 읽어내고자 합니다.



​1. 십자화과: 십자가의 숙명과 정면승부


​냉이, 배추, 무, 유채, 갓, 고추냉이, 양배추, 케일 그리고 브로콜리.


이들의 공통점은 꽃잎이 네 갈래로 갈라진 '열 十(십)'자 모양이라는 점입니다.

냉이-십자화과 카멜리나족(Camelineae)의 고고조할아버지 조상

십자화과 군단은 흡사 십자가라는 숙명을 짊어진 수도자처럼 정직하게 싸웁니다. 이들의 주 무기인 '글루코시놀레이트'는 파괴와 동시에 완성됩니다.


​포식자의 이빨에 제 세포가 짓이겨지는 절망의 순간, 비로소 격리되어 있던 효소가 터져 나오며 알싸한 매운맛을 뿜어냅니다.


"나를 건드리는 순간, 네 입안을 불태우겠다"는 이 기세는 상처받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본질을 증명해 내는 역설적인 투쟁입니다.


고난이 닥쳤을 때 가장 강렬한 향기를 내뿜는 이들의 방식은, 시련 속에서 단단해지는 인간의 정신과도 닮아 있습니다.




​2. 국화과: 쓴맛의 성벽, 거절의 미학


​반면 씀바귀, 민들레, 망초, 쑥, 쑥갓, 상추, 해바라기, 코스모스, 구절초, 고들빼기로 이어지는 국화과 군단은 은둔자의 길을 걷습니다. 이들은 매운맛으로 상대를 위협하기보다,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깊은 쓴맛'의 장벽을 칩니다.

국화과 쑥-약 1,000만 년 전 (신생대 마이오세 후기)태생

줄기를 꺾으면 흐르는 하얀 유액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연고이자, 침입자를 밀어내는 단호한 경계선입니다.


​인생의 쓴맛을 본 자만이 삶의 깊이를 이해하듯, 국화과는 쓴맛이라는 인내의 과정을 통해 자신을 보존합니다.


이들에게 쓴맛은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켜 지켜내는 고독한 성벽과 같습니다. 달콤함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 이들의 쌉싸름함은 "모든 요구에 응답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존재론적 위로를 건넵니다.



​3. 진화의 역설이 선물한 만찬


​재미있는 사실은 인간이라는 가장 강력한 포식자가 이들의 '독'을 '미식'과 '약'으로 치환해 버렸다는 점입니다.


식물이 적을 물리치기 위해 연마한 칼날이 우리에겐 풍미가 되고 건강이 된다는 이 지독한 역설은, 자연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가장 아름다운 비극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방어 기제를 먹으며 그들이 버텨낸 생의 시간을 공유합니다.



엘랑 비탈, 멈추지 않는 도약의 기록


​들판을 거닐며 깨닫는 것은 단순한 식물의 성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앙리 베르그송이 말한 '엘랑 비탈(Élan Vital)', 즉 거침없이 솟구치는 생명의 비약 그 자체입니다. 물질의 저항을 뚫고, 부동의 숙명을 깨뜨리며 기어이 꽃을 피워내는 저 초록의 군단들을 보십시오.



​십자화과의 매운맛도, 국화과의 쓴맛도 결국은 정지된 물질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창조적 진화를 이어가려는 생명 에너지의 분출입니다. 그들은 포식자라는 저항벽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 위협을 자신만의 독특한 향기와 맛으로 변주해 내며 생명의 도약을 완수합니다.


​이제 식탁 앞의 마음가짐을 조금 달리해 봅니다. 내 입안을 감도는 알싸하고 쌉싸름한 기운은, 생명이 물질을 뚫고 솟구칠 때 발생하는 마찰음입니다.


15년 전 처음 숲에 섰을 때의 설렘으로, 나는 오늘 다시금 이 푸른 전사들의 투항을 받아들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 또한 저 들판의 나물들처럼 때로는 짓이겨지고 때로는 외로이 고립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안에도 멈추지 않는 '엘랑 비탈'이 흐르고 있음을. 상처 속에서 향기를 빚고 고통 속에서 경계를 세우며, 우리 역시 매 순간 찬란하게 도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식탁 위를 가득 채운 이 소리 없는 전쟁은 결국, 삶이라는 위대한 승리로 귀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