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의 문지방
(그림 제목 : 고지서)-- 유성펜, 싸인펜, 색연필
내가 늘 대책없이 미뤄두기만 했던 일들은, 마치 고지서처럼 끈질기게 내게 다시 날아들었다. 그것들은 끝내 나를 찾아내 따라 붙었다. 징글징글한 것들 같으니... 나는 결국 그것들에게 깔려서, 파묻힌 채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압사직전이었다.
불면의 문지방
다른 부부들은 잠자리에서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다 잠들곤 한다는데 우리부부에게는 그런 역사가 있을턱이 없다. 남편은, 흔히들 말하는 '머리만 대면 잠드는 사람' 이다. 누우면 곧장 잠들어 화통을 삶아 잡숫는 그가 나는 항상 너무 신기했다.
내 불안과 불면의 역사는 너무도 유구하여 언제부터 시작된것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아마도 중고등학교 시절부터가 아니었나 어렴풋이 더듬어 보지만, 그보다 훨씬 더 어린시절에도 아이답게 잘 자는 편은 아니었다. 눈만 마주치면 지옥처럼 다투는 부모를 중간에서 뜯어 말리느라, 숱한 밤을 눈물로 지새며 푸진 맘고생을 했던 어린애였다.
불안한 삶이란 잠을 내려놓은 삶을 말하는게 아닐까. 첨탑처럼 예리한 뭔가가 내 속에 24시간을 도사리고 서 있다. 그렇게 나의 정신은, 잘 벼라진 단도처럼 잘시간만 됐다하면 서슬을 시퍼렇게 세운다. 한마디로 잠은 나에게 사치였다. 어디서 오는 긴장인지도 알수 없었다. 영문도 모른채 며칠 동안이나 괴로운 밤을 허옇게 지새우고 나면 그 다음날은 아무리 중요한 일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도 전혀 의욕을 낼수 없었다. 나에게 무기력이란 놈은, 나의 폐부를 단숨에 찌르고 들어오는 어마무시한 능력자로서, 그 어떤 일도 일순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무서운 놈이다. 보통놈이 아니다.
한 일주일 정도를 하루 이삼십분 정도 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한채 버틴적도 많았다. 어떻게 사나 싶겠지만 잠못자는 고통은 사나흘정도서부터 절정을 이루다가 심신이 무감각해지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러다가 헛소리를 하거나 눈을 뜬채로 꿈을 꾸는 신기한 경험도 했다. 의사들은 그것을 ‘환시’라고 불렀다. 물론 환청도 경험했다.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다. 잠을 잘수만 있다면 나라를 팔아먹는건 일도 아니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신기하게도 그 와중에 밥도먹고 일도 했다는데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우스갯소리지만 영화에 나오는 좀비나 강시 같은 상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꼴도 우스웠을거다. 푸석한 얼굴에, 다크써클이 턱까지 내려온채로 걸핏하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겠지 아마도. 으으으.... 만화캐릭터에 나오는 시뻘겋게 금간 눈동자를 하고서 귀신처럼 활보?했을 생각을 하니 이건 공포 특집이 따로 없다. 잠을 못자는 동안은 사는게 그저 고역이었다.
문제없이 잘 자는 사람들의 진짜 문제는, 이런 고통을 잘 모르는데 그치지 않고 자꾸만 애먼소리를 한다는 거다. 결국 사람 속을 만땅 긁어 놓고야 만다. 낮에 고단하게 살지 못하고 너무 편해서 그렇다느니 삶이 치열하지 못해서 그렇다느니, 잘 알지도 못하면서 복장 긁는 소리만 자꾸 해댄다. 이젠 대꾸할 기운도 없다. 그 말이 맞는 경우도 간혹 있을수 있겠지만, 나처럼 갖은 노력을 다 해 봄에도 어릴적 부터의 불면을 해결하지 못한채 쭉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억울하다.
의외로 내 오랜 잠과의 전쟁을 쫑내 준것은 수면제도, 솔깃한 제목이 붙어있는 체조도 아니었다. 견디다 못해 처방받아 먹곤 했던 수면제는 어느하루, 담당의로부터 무시무시한 위험성을 경고받으며 된통 혼이 난 후 중단되었다.
수면제에 대한 맹신은 다름아닌, 성분에 대한 나의 무지에서 온것이 분명했다. 졸피뎀 성분의 수면제를 반알씩만 삼키다가, 내성이 생겨 온전한 한알을 먹어야만 했던 날부터 예감이 안 좋기는 했었다. 나에게 올바른 정보를 주고 나를 혼내준 주치의 덕분에 위험한 상황까지 가지 않아 천만 다행이었다.
황급히 졸피뎀을 그렇게 중단하고 난 후, 나는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몰라 실의에 빠져 있었다. 어떻게든 자야 하는데....그러다 우연히 그당시 내가 처방받아 복용하던 우울증약에 대한 이야기를 담당의로부터 듣게 되었다. 우울증약의 안전성에 대한 설명과 함께, 졸음을 불러오는 부작용을 오히려 활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우울증약 2종을 본격적으로 처방받아 자기전에 먹기 시작했고 그날로 매일 순하게 잠들었다. 중증 수면장애와 싸워온 전쟁같던 시간들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사실, 항우울제의 졸림효과는 스틸녹스(졸피뎀)만큼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두 약의 기제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의 부작용이나 성분의 위험성에 대한 부담이 덜어지니 훨씬 마음이 편안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호전이 있었다. 초반에 나는 항우울제 2종을 매일밤 챙겨 먹으며 아무생각없이 잠들었고, 실수로 약을 빼먹은 날은 전혀 잠들지 못했었다. 그렇게 6개월 이상을 전적으로 약에 의존하여 잠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완전히 덜어낸채 생활했다. 그런데 요즘은 전날밤에 약을 깜빡 챙기지 못했음에도 별 문제없이 잠들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도 한다. 와우! 문제는 잠에대한 부담감이었던 것이다.
약에 의존하는것은 확실히 불안하고 부담스러운 노릇이다. 그러나 안전한 약을 선택한 후 그 약에 의존한 생활을 통해 오히려 약없이도 잠들 수 있다는 사실을 몇 차례 경험한 것이 주효했던것 같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쨌건 잠에 대한 약간의 자신감이 생겨났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중요했다. 결국 ‘오늘밤도 잠들지 못하면 어쩌지’ 라는 강한 긴장감 때문에 평생 불면에 시달렸던게 아닐까. 약없이 내 힘만으로도 잠들 수 있다는 자신감. 그 자신감을 지금보다 월등히 더 많이 기르고 경험해야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 되겠지만, 그 약간의 희망으로도 이렇게 뿌듯할 수가 있다니...잠이라는게 뭔지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