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면도에 대한 추억

by 칠봉

내가 클래식 면도를 처음 보았던 것은 어릴적 아버지가 세이빙 솔로 비누거품을 정성스럽게 내고 난 후,

얼굴에 곱게 펴바르고 면도를 하셨던 것부터 출발한다.

당시는 모두가 어려웠던 60년대 후반이라서 모든 것을 절약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아이고 비누 아까버라, 저리 비누거품을 많이 내면 어떻게 해요.”

어머니의 잔소리가 귀에 꽂힌다.

“말시키지마소. 얼굴에 피칠갑하니깐!”

그 당시는 모두가 아끼고 아껴서 성공해야지 하며 열심히들 살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생활력 덕분에 우리나라가 이만큼 성장하고 커온 것이 아닐까 싶다.

아버지의 클래식 면도에 대한 추억은 또 있다. 그것은 동네목욕탕에서 였다. 그당시에는 지금은 집집마다 있는 샤워실이 갖춰진 집이 거의 없었다. 우리집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한겨울 따뜻한 샤워를 위해서는 공동목욕탕에 가야만 했다.

목욕가방 같은 것은 그당시에는 없었다.

아버지는 의식을 치르듯이 수건 두장을 겹쳐서 펼쳐놓고, 그 위에 비누케이스, 때타올, 면도기, 면도날, 세이빙브러쉬 를 차곡차곡 야무지게 쌓아 한켠에 놓고 수건으로 단단하게 싸매었다.

당시 아버지와 목욕탕 가는 것이 나는 무척이나 좋았다. 아니 목욕 후 아버지가 사주시는 유리병에 담긴 우유나 삼각비닐팩에 담긴 바나나 우유를 더 좋아했던 것 같다.

그렇게 단단히 싸맨 목욕용품을 겨드랑이에 끼고 우리는 신나게 공동목욕탕에 갔다.

당시는 어느 목욕탕이나 주말이면 만원이었다. 목욕용품을 어디 제대로 내려놓을 공간을 찾기도 힘들 정도로 주말의 공동 목욕탕은 만원이었다.

“아빠! 아빠! 여기 여기 자리 있어요. 어서 오세요!”

선비마냥 수줍어서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지도 못하시는 아버지를 대신해 어린 나는 자리를 맡아서 아버지를 불렀다.

“아이고, 기집애 처럼 뽀얀 놈이 목청이 대단허네.”

옆에서 때를 밀고 계시는 어떤 아저씨가 한 소리를 해댄다.

아버니는 쭈볐쭈볐 다른 사람과 부딪히면 큰일이라도 날 것 처럼 나에게도 다가 오셨다. 그리고는 내가 맡은 자리에 목욕용 대야에 목욕용품을 넣으시고 더운 물로 쉐이빙솔을 적시고는 비누거품부터 내셨다. 마치 선비들이 먹을 갈듯이. 그리고 더운 증기로 가득차 프리쉐이빙이 저절로 된 수염에 거품을 바르고 면도를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빨리 커서 저렇게 면도를 해야지 하며 아버지의 면도를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도 나이가 들고 대학생활, 직장생활을 하면서 면도에 대한 그런 추억을 사라졌다. 직장생활 초임 때는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말할 정도로 일년의 거의 모든 날을 회사에서 보냈다.

게다가 어떤때는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어머니 미안하지만, 제 속옷하고 와이셔츠 좀 회사앞 안내데스크에 맡겨 주세요.” 할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 그때의 클래식 면도는 잊혀진채 일회용 면도기, 전기 면도기, 그리고 최근까지 카트리지 면도기로 면도를 했다.

그렇게 바쁘던 날들을 보내던 중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전에 아버지께서 사용하시던 면도기와 세이빙솔을 나에게 전해주면서, “네가 예전에 이것들 좋아했었지. 이제는 네가 써라.” 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먼곳으로 떠나시기 얼마전이었다.

“아버지. 고마웠어요. 항상 고마웠어요. 사랑합니다. 아버지 평생 잊지 않으며 살겠습니다.” 라고 울면서 아버지께 그동안의 고마움을 표현했다.

아버지는 이내 “나도 사랑한다. 너희들 때문에 한 세상 잘 살았다.” 하셨다. 그후 얼마뒤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나에게 면도는 하나의 의식같다. 항상 거품을 내면서 지난날의 아버지를 기억한다. 거품속에서 지난날들을 반추하기도 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고민하기도 하면서 부걱부걱 거품을 낸다.

오늘도 나는 거품을 내면서 아버지를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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