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특이한 회사를 다닌 적이 있었나요? 저는 있습니다. 대표가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다닌다거나 고양이가 대표라던가 비흡연자만 프로젝트 진행 사항을 공유받지 못하는 곳이라던가... 아마 직장 생활을 오래 해 보신 분들일수록 기가 막힌 일화가 나올 거라 짐작합니다.
저는 운이 좋게도 대표님이 물구나무를 서지도 않고 비흡연자라 받는 불이익도 없습니다. 직원들은 모두 서로를 존중하고 항상 존댓말을 쓰며, 부드러운 피드백을 주고받습니다. 다들 성격이 점잖고 특별히 튀는 구석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출근길에 오를 때마다 제가 다니는 회사가 참 특이하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에는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예술의 가치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대표님. 브랜드를 만드는 모두가 아티스트라고 말씀하시는 브랜드 디렉터. 세상 모든 사물을 브랜드로 인식하는 직원들. 가장 특이한 건 본인을 직장인이 아니라 브랜드 아티스트라고 믿게 된 저 자신입니다.
저는 지금 브랜딩 에이전시에서 콘텐츠 아티스트로 일하고 있습니다. 합류한 지는 9개월이 되었는데, '콘텐츠 아티스트'라는 직함 아래 여러 가지 도전을 해보았습니다. SNS의 콘텐츠를 기획하고, 브랜드 스토리를 제작하고, 협업툴의 언어를 보완하고. 글쓰기가 요구되는 업무는 한 번씩 도맡았던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여러 업무를 하는 것이 스타트업의 장단점인데 저에게는 좋은 방향으로 작용했던 편입니다.
처음에는 글만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매일이 행복하면서도 불안했습니다. 회사의 매출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퍼포먼스를 잘 내고 있는지 스스로 확실할 수 없어 답답했죠. 하지만 회사와 직장 동료들은 언어와 글쓰기의 가치를 인정해 주었고 잘하고 있다며 독려까지 해주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온전히 브랜드의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데만 집중하다 보니, 제가 정말 직장인이 아니라 아티스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본인을 브랜드 아티스트라고 부르는 건 회사로부터 세뇌를 당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ㄴ...) 실제로 브랜드 스토리를 만드는 일이 창작에 가까워서입니다. 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표현하는 직업인을 예술가(Artist)라고 부르니 저도 아티스트에 속하겠지요.
물론 저는 스스로를 치켜세우거나 특별하게 포장하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단지 요리가 직업인 사람이 요리사이듯이, 저는 창작이 직업이기 때문에 아티스트라고 스스로를 부를 뿐입니다. 적어도 회사 내에서는요.
그럼 브랜딩은 창작 활동일까요? 저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창작에 속하는 디자인이 있고 아닌 디자인이 있듯이, 브랜딩도 창작 활동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롤모델이 있는데, 바로 <어느 날 대표님이 우리도 브랜딩 좀 해보자고 말했다>의 저자 박창선 작가님(現 애프터모멘트 대표)입니다. 이 책에서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브랜딩은 학문이 아닙니다. 일종의 경영 전략이자 경영 트렌드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브랜딩의 역사는 100년도 채 되지 않습니다.
저는 창작 활동이 브랜딩 프로세스의 일부일뿐 브랜딩이라는 것은 결국 경영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프로세스의 '그 일부'를 담당하고 있으며, 브랜드의 스토리를 만들어 나가는 일은 창작과 경영 사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브랜드를 만드는 아티스트'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뻔뻔함은 스타트업에서 근무하는 9개월 차 주니어라서 가질 수 있는 걸 지도 모릅니다. 어느날 문득 감성이 닳아버리기 전에 지금의 객기를 기록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냅다 "대표님이 시키고 주니어가 쓰는 브랜딩 일기"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읽고 이불을 걷어차겠지만 어쩌겠나요. 주니어일 때는 주니어라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많이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실무자 분들이 보시기에 부족하고 서툰 글일 수도 있지만, 저는 브랜드 아티스트로서 최선을 다해 브랜드에 대한 얘기를 떠벌려 보겠습니다. 가끔 아찔할 정도로 순진한 얘기를 해도 놀라지 말아 주세요. 저는 직장인이 아니라 Z세대 브랜딩 아티스트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