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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Aug 20. 2023

원문

김열규 선생의 『독서』를 보니 릴케의 『말테의 수기』 첫 부분 번역과 그것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 번역 : 버려진 것 같아 보이는 허름한 유모차에 잠들어 있는 젖먹이를 보았다. 포동포동한데도 얼굴이 푸르죽죽한 녀석은 크게 벌린 입으로 소독약 냄새와 감자 튀기는 냄새와 불안의 냄새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마시고 있었다.


- 설명(김열규) :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도시에 가득한 것은 질병의 냄새이고 살기 위한 몸부림의 기척이다. 뒤죽박죽이고 엉망진창이다. 그 두 가지 냄새는 서로 겹친다. 질병의 냄새와 음식의 냄새가 한통속이다. 끼니를 먹는 건지 질병을 먹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바로 그러기에 마음은 바늘방석이다. 불안하다.


여기까지 보면 『독서』의 부제가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인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설명은 그렇다 하더라도, 원문[번역문]이라고 소개된 부분에서 내가 예전에 느꼈던 릴케의 “불안”이 제대로 느껴지지가 않는다. 왜 그럴까? 그래서 근래 독어전공자인 김인경이 번역한 책(행복한 아침, 2008) 해당 부분을 비교해 보았다.


- 김인경 번역 : 멈춰 선 유모차 안에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통통하고 옅은 푸른빛이 돌았으며 이마에는 종기 자국이 선명했다. 종기는 다 나아서 아플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는 잠들어 있었고, 입을 벌린 채 요오드포름과 감자튀김 냄새를, 불안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김열규 선생이 참고한 책이 누구의 번역인지, 외국어에 능통한 선생의 것인지, 알 수 없어서 옳다 그르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두 번역이 너무 다르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이른바 ‘대의’는 비슷할지 몰라도 세부가 너무 다른 것이다. 무엇보다도 김열규는 소독약, 감자튀김, 불안의 세 가지 냄새를 병렬적으로 나열했지만, 김인경은 소독약과 감자튀김 두 냄새를 불안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독일어 원문을 찾아보려 했지만, 내 짧은 독어 실력으로는 아예 시도하지 않는 게 낫다.


그런데 인용한 부분 마지막에 “중요한 것은 살아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중요했다”는 말이 붙어 있다. 이것을 빼놓고서는 그 앞부분의 정서를 온전히 느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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