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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Dec 28. 2023

세밑, 두보의 <강촌>을 다시 꺼내본다.


세상사 이래저래 시들해지고, 만사가 따분하고 귀찮아질 때면, 슬쩍 그려보는 풍경 하나가 있다. 강촌이다. 앞으론 유장하게 강이 흐르고, 뒤로는 높고 낮은 동산이 펼쳐져 있는 그 사이, 수백 년 되었다는 느티나무에 게으르게 기대 앉아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을 맞고 보내는.....이럴 때 생각나는 시가, 잘 짜인 대구(對句)로 유명한 두보의 「강촌(江村)」이다.

  

淸江一曲抱村流 / 맑은 강의 한 굽이 마을을 안아 흐르니

長夏江村事事幽 / 긴 여름 강촌의 일마다 그윽하도다

自去自來堂上燕 / 절로 가며 절로 오는 것은 집 위의 제비요

相親相近水中鷗 / 서로 친하며 서로 가까운 것은 물 가운데의 갈매기로다

老妻畵紙爲碁局 / 늙은 아내는 종이를 그려 장기판을 만들거늘  

稚子敲針作釣鉤 / 어린 아들은 바늘을 두드려 고기 낚을 낚시를 만든다

多病所須唯藥物 / 많은 병에 얻고자 하는 바는 오직 약물이니  

微軀此外更何求 / 천한 몸이 이것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


 이 시는 두보가 49세가 된 760년 청두에서 초당을 짓고 한가로이 지내던 어느 여름날 지은 것이다. 첫 구에서, 강이 마을을 감싸 흐르는 공간 배치와 긴 여름이라는 시간 배경이 조화롭게 어울려 한층 그윽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딱히 할 일 없는 어느 여름날 오후, 한가롭다 못해 나른한 느낌마저 풍기는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그런데 그 한적한 풍경 속으로 제비와 갈매기가 느닷없이 등장한다. 언뜻 분위기가 깨어지는 듯하지만, 그러나 그 한적함은 오히려 더 고양된다. 나른하게 펼쳐진 여름, 느긋한 촌마을을 무대로 빠르게 움직이는 제비와 갈매기의 작은 몸짓이 분위기를 한층 더 조용하고 차분하게 만들어 준다. 작고 빠른 존재로 말미암아 그것이 안고 있는 더 크고 느린 배경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다음 구에서도 이어진다. 아내와 아들은 시방 장기판과 낚시를 만들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느긋한 행동과 관계된 것들이다. 그것을 만드는 과정도 그러하려니와 장기와 낚시는 오랜 시간을 두고 여유롭게 즐기는 놀이다. 이처럼 여기까지의 모든 시어와 구절은 실로 느긋한 평화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서로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하겠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라면 자연과 인간은 자연스럽게 하나가 될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물아일체의 평화는 마지막 구절에 오면서 급격하고도 충격적으로 깨어진다. 평화를 깨뜨리는 적은 다름 아니라 ‘다병(多病)’이다. 외부의 평화로운 정경이 시인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오자마자 산산이 부서지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돌연한 파괴야말로 시인이 붙잡고자 하는 주된 심상이다. 강촌 마을에서 대하는 안온한 정경과 불안한 자아의 모습이 강렬하게 대비되고 있는데, 이렇게 보면 강촌은 외적으로는 질서와 조화의 세계지만, 내적으로는 이미 파괴된 형상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심상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세상이 어지러운데 한가롭게 강촌에 머물러 앉아 자연이나 감상하면서 사는 것이 과연 올바른 삶의 방식일 수 있는가 하는 고뇌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전쟁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럴 것 같다. 이렇게 보면, 아내와 아들이 만들고 있는 바둑판과 낚시 도구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장기는 타협이 있을 수 없는 나와 적의 싸움이며, 낚시질 또한 서로 잡고 잡히는 냉혹한 대결이다. 결국 시인은 은연중에 세태가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그러한 상황에서 자연에 묻혀 사는 이의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이 시는 혼탁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의 참다운 평화와 안식이란, 은거나 도피에서 가능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강변하고 있다.


그림 : 청대(淸代) 화가 석암(夕庵) 장음(張崟)의 ‘강촌소경(江村小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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