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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Jan 04. 2024

노류장화(路柳墻花)와 감인(甘人)


‘노류장화’란 말은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을 때 근거가 되었던 명 나라 구우(瞿佑; 1347~1433)의『전등신화(剪燈新話)』중「애경전(愛卿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산꿩과 들오리는 / 山鷄野鶩

집에서 길들이지 못하고 / 家莫能馴

길가 버들과 담장의 꽃은 / 路柳墻花

누구나 꺾어댄다네 / 人皆可折


기생출신인 애경이 “새 손님 받고 옛 손님 보내며, 이 집에서 밥 먹고 잠은 저 집에서 자는 오랜 습관에 젖어 있었지요. 오늘은 장씨의 부인이 되고 내일은 이씨의 아내가 됩니다.(迎新送舊, 東家食而西家宿, 久習遺風, 長郞婦而李郞妻)”라고 한탄하면서 한 말이다. 솔직하고 아름다운 시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춘향전」에서 춘향이 변학도에게 이부종사할 수 없다고 하자, 변학도는 “노류장화가 수절이란 말 괴이하다. 요망한 말 말고 오늘부터 수청 거행하라”고 다그친다. 노류장화인 춘향이 이부종사를 할 수 없다고 한 발언에서 근대의 맹아를 엿볼 수 있다. 오늘날도 조롱 받기 십상인 ‘몸 파는 여자의 인간선언’이었던 셈이니, “춘향의 절개는 허울 좋은 열녀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버전일 뿐”(장희창,『 춘향이는 그래도 운이 좋았다』, 뿔, 2008)이라는 주장은 춘향을 두 번 죽이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노류장화를 이른바 ‘굴욕자’로 몰아붙이는 못된 습성이 있다. 그러나「창부타령」의 다음 발언은 그것이 근거 없음을 설득력 있게 알려주고 있다.


“노류장화 몸이 되니, 차라리 다 떨치고 산중으로 들어가서 세상번뇌를 잊어 볼까. 창문을 닫아도 숨어드는 달빛, 마음을 달래도 파고드는 사랑. 사랑이 달빛이냐, 달빛이 사랑이냐. 텅 비인 내 가슴엔 사랑만 가득 쌓였구나.  사랑 사랑 사랑이라니, 사랑이란 게 무엇이냐.”  


신경림이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느냐”고 일갈했듯이, 기생·작부·창녀라고 해서 우리와 무에 그리 다르겠는가.   


각설. 우리 나라에서 근대적 의미의 공창가(公娼街), 요즘의 괴상한 표현으로 ‘집창촌(集娼村)’은 언제, 어디에서 생겨났을까? 오늘날의 매매춘의 경제적 토대는 물론 자본주의다. 논란이 많기는 하지만, 우리의 자본주의가 일제에 의해 이식되었으니, 공창의 출현도 그 어름이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열강과 공창은 동전의 앞뒷면인 것이다.


근대적 의미의 공창은 20세기 초 지금의 회현동 부근에 처음 자리를 잡았다. ‘대연각(大然閣)’이 ‘대연각(大燃閣)’이 되었던 그 호텔이 자리한 골목 언저리쯤이다. 요즘만큼이야 화려한 홍등가였을리는 없었겠지만, 어스름한 저녁부터 야한 조명 아래 여러 나라의 노류장화들이 요염하게 손님을 끌어들였을 것이다. 물론 손님의 대다수는 일제의 관료, 자본가, 그리고 여러 나라의 ‘양코쟁이’들이었다. 거기에는 영화「왕과 나」에서 우리의 여신 데보라 카와 연애를 하는 태국의 왕 율 브린너의 할아버지도 끼어 있었을 것이다. 그는 1896년 울릉도 산림채벌권을 따낸 블라디보스톡의 장사꾼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야한 옷을 걸치는 둥 마는 둥하고, 짐승만도 못한 표정으로 손님을 구걸하는 당시의 노류장화들을 조선사람들은 ‘감인(甘人)’이라고 불렀다. 무슨 뜻일까?  ‘달콤한 사람’이라니? 당시 조선 뭇 남정네들의 로망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여러 나라들에서 물 건너 온 노류장화들(그 대부분은 라루시야, 곧 백러시아계 여인들)이 역시 여러 나라의 ‘허기진’손님들을 유혹할 때 했던 말을 생각해 보라. 그제나 지금이나 공용어는 영어였다. 이쯤에서 감을 잡았을 것이다. come in! 바로 그것이다. 이른바 음차(音借)다. club을 구락부(俱樂部)하고, coca cola를 가구가락(可口可樂)이라고 하는 따위다.


그런데 ‘헐벗은’ 노류장화들을 ‘감인’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부른 조선인의 순진한 얼굴에서 당혹감 혹은 무력감 같은 것을 느꼈다면 지나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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