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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Jan 03. 2024

강남좌파

‘강남좌파’라는 말을 놓고 곰곰 생각해 보니, ‘강남’과 ‘좌파’ 모두 바깥에서 들어온 말들임을 알겠다. 지금은 강남․서초․송파의 저 비옥한 삼구를 가리키지만, 본디 ‘강남’은 중국의 양자강 이남, 농사짓기 좋아 부자가 많았던 곳으로, 「흥부전」에서 ‘강남 갔던 제비’ 운운한 그 강남이다. 신라 말에 최치원崔致遠(857~?)이 “아침 내내 베틀에서 북을 놀려도終朝弄機杼 / … / 비단옷은 네게는 돌아가지 않는구나羅衣不到汝(「江南女」)”라고, 부자를 위해 노동력을 바쳐야만 했던 강남의 가난한 처녀를 위로한, 그 강남이기도 하다.


‘좌파’니 ‘우파’니 하는 말이 애당초 프랑스 혁명의 와중인 1792년, 공화정을 수립한 두 주체 지롱드 당과 자코뱅 당의 의회 내 좌석 배치에서 나온 것임은 공지의 사실이다. 부르주아지를 대변한 지롱드 당이 국민공회에서 오른쪽에, 소시민과 민중을 지지한 자코뱅 당이 왼쪽에 앉았기 때문에,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그 이후에 극좌파니 중도좌파니, 극우파니 중도우파니 하는 변종들이 그야말로 족출(簇出)한 바 있다. 우리에게는 ‘지식인의 사상적 지형도’라고 하면서 좌표라는 걸 그려놓고 지식인 하나하나에게 이른바 ‘딱지’를 붙이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도 ‘강남좌파’라는 말은 없었다.

  

‘강남좌파’란 무엇인가? 말 자체로 보면, 역시 서양에서 들어온 말의 번안이다. 우선 19세기 후반 독일의 ‘강단(講壇) 사회주의자’라는 말이 떠오른다. 자본주의 제도를 바꾸지 않고, 사회 정책과 입법에 의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문제를 점진적으로 개혁하자고 대학 강단에서 핏대를 올린 교수들을 맑스주의자들이 우롱한 말이다. “우리가 따뜻한 응접실에서 샴페인 잔을 부딪치며 사회주의에 관해 잡담을 할 때, 바깥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죽어가는 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쓴 19세기 러시아 철학자 알렉산드르 게르첸Gertsen, Aleksandr Ivanovich의 글에서 ‘샴페인 사회주의자’라는 말이 생겨났다. 프랑스에서는 철갑상어의 알을 먹으며 사회주의를 떠든다는 의미로 ‘캐비어 좌파’라는 말로 부자 좌파를 조롱한다. 알마니 수트에 리무진을 타고 다니는 좌파 부자를 ‘리무진 리버럴limousine liberal’이라고 ‘깐’ 것은 미국이다. 이밖에도 진보적 성향의 고소득 사무직과 전문직 종사자들로서 1990년대 중도좌파의 정치적 기획인 ‘제3의 길’을 지지하고 나선 ‘여피 좌파’, 즉 ‘문화 좌파’ 또는 ‘골드칼라 좌파’, 그리고 ‘구찌 맑시스트Gucci Marxist’, ‘살롱 좌파’, ‘래디컬 시크radical shic’, 심지어는 ‘영남좌파’까지 그 변주의 목록은 끝이 없다.


“생각은 좌파적이지만 생활수준은 강남 사람 못지않은 이들”이라고 강준만 교수가 규정한 ‘강남좌파’는 기본적으로 지식인의 의식과 존재의 불일치를 지적하고 있다. 위에서 열거한 여러 용어들을 관통하고 있는 정서가 지식인의 ‘위선’에 대한 ‘조롱’과 ‘힐난’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교수가, ‘좌파는 강북에만 있냐’거나, ‘어떻든 좌파는 많을수록 좋다’고 한 것은 사회과학자답지 않은 치기어린 대응이다. ‘사람을 너무 기계론적으로 보지 말라’고 하는 그에게 ‘생활에서도 좌파가 되라’고 주문하는 것은 그야말로 강짜일 뿐이다. 하루하루 지적·문화적·상징적인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 생리가 된 그(들)에게 그런 주문은 철학적이지도 않고, 정치경제학적이지도 않다.

 

려 말에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圭報; 1168∼1241)는 농민시를 여러 편 지었다.


한 알 한 알 어찌 가벼이 여기리 一粒一粒安可輕

사람의 생사와 빈부가 달렸네 係人生死與富貧

나는 농부 공경하기를 부처님 공경하듯 하니 我敬農夫如敬佛

부처님은 오히려 굶주린 사람을 살리기 어렵네 佛猶難活已飢人

기쁘다네 이 늙은이는 可喜白首翁

올해도 또 햅쌀을 보네 又見今年稻穀新

비록 죽더라도 모자람이 없으니 雖死無所

농사의 혜택이 내게까지 미치기 때문이네 東作餘膏及此身 (「新穀行」)


13세기, 지금부터 대략 800년 전에 한갓 농민을 부처님 공경하듯 섬긴다고 한 발언은 지식인의 포우즈라고 하기에는 너무 진지하다. 이것이 제스쳐라면, 지금 노동자를 역사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지식인도 그럴듯한 연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흉년 들어 다 죽게 된 백성 歲儉民幾死

앙상히 뼈와 가죽만 남았는데 唯殘骨與皮

남은 살이 얼마나 된다고 身中餘幾肉

남김없이 죄다 발라내려 하는가 屠割欲無遺


너는 보는가, 강물 마시는 두더지도 君看飮河鼴

자기 배를 채우면 더는 먹지 않는 걸 不過備其腹

묻노니, 너는 얼마나 입이 많기에 問汝將幾口

백성들의 살을 탐욕스레 처먹는 것이냐 貪喫蒼生肉(「聞郡守數人以贓被罪 二首」)


허리띠가 양식인 농민의 쥐꼬리만한 재산을 착취한 군수(郡守)를 욕하는 시지만, 나는 이 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먹힐’ 것으로 본다. 그것도 아주 ‘진보적인 시’로 말이다. 노동자를 그야말로 무참하게 짤라 버리고 이른바 ‘노동유연성’을 강조하는 후안무치의 자본가를 ‘너’ 대신 넣어 읽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은가.   

 

조선 전기 시인 어무적魚無迹(?~?)은 좀 더 나아간다.


백성들의 어려움이여 蒼生難

백성들의 어려움이여 蒼生難

흉년이라 너희는 먹을 게 없구나 年貧爾無食

나는 너희를 구제할 마음이 있지만 我有濟爾心

너희를 구제할 힘이 없구나 而無濟爾力

백성들의 괴로움이여 蒼生苦

백성들의 괴로움이여 蒼生苦

추워도 너희는 이불이 없구나 天寒爾無衾

저들은 너희를 구제할 힘이 있지만 彼有濟爾力

너희를 구제할 마음은 없구나 而無濟爾心

바라건데 소인의 마음을 돌려 回顧小人腹

잠시 군자의 걱정을 하고 暫爲君子慮

잠시 군자의 귀를 빌려 暫借君子耳

백성들의 말을 들어 보아라 試廳小民語(「流民嘆」)

 

“백성들의 어려움이여”, “백성들의 괴로움이여”라는 고뇌에서 진정성이 물씬 묻어난다. 이 시 역시 지금 읽어도 진한 호소력을 느낄 수 있다. 오히려 모순에 찬 현실을 생생하게 재현해 내는 힘을 지니고 있어, 이른바 ‘비판적 리얼리즘’에 값한다고 할 만하다.


다음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시다.


노전마을 젊은 아낙 그칠 줄 모르는 통곡소리 蘆田少婦哭聲長

관아 문을 향해 가며 하늘에 울부짖길 哭向縣門號穹蒼

전장에 간 지아비가 못 돌아오는 수는 있어도 夫征不復尙可有

남자가 성기를 자른 건 들어본 일 없다네 自古未聞男絶陽

시아버지 삼년상 겨우 지나고 애는 아직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舅喪已縞兒未澡

삼대가 다 군보에 실리다니 三代名簽在軍保

아무리 호소해도 문지기는 호랑이요 薄言往愬虎守閽

관리가 으르렁대며 마굿간 소 몰아가자 里正咆哮牛去皁

칼을 갈아 방에 들고 자리에는 피가 가득 磨刀入房血滿席

자식 낳아 군액 당한 것 한스러워 그랬다네 自恨生兒遭窘厄

무슨 죄가 있어서 잠실음형 당했던가 蠶室淫刑豈有辜

민땅의 자식들 거세한 것도 역시 슬픈 일인데 閩囝去勢良亦慽

자식 낳고 또 낳음은 하늘이 정한 이치기에 生生之理天所予

하늘 닮아 아들 되고 땅 닮아 딸이 되지 乾道成男坤道女

불깐 말 불깐 돼지 그도 서럽다 할 것이어늘 騸馬豶豕猶云悲

대 이을 생민들이야 말해서 무엇하리 況乃生民恩繼序

부호들은 일 년 내내 풍류나 즐기면서 豪家終歲奏管弦

낟알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 없건만 粒米寸帛無所捐

똑같은 백성 두고 왜 이리 차별일까 均吾赤子何厚薄

객창에서 거듭거듭 시구편을 외워보네 客窓重誦鳲鳩篇


 「애절양」이란 시다. ‘애절양(哀絶陽)’이란 ‘자기 성기를 자른 것을 슬퍼함’이라는 의미다. “이 시는1803년 가을 내가 강진에서 지은 것이다. 그때 노전에 사는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3일 만에 군보에 올라 있어 관리가 군포 대신 소를 빼앗아가니 남편은 칼을 뽑아 자신의 남근을 잘라버리면서 ‘나는 이 물건 때문에 이런 곤액을 받는구나’라고 하였다 그의 아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근을 들고 관가에 가서 울면서 호소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아버렸다. 내가 이를 듣고 이 시를 지었다.”(『목민심서』) 실성한 듯 울부짖는 여인의 울음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농민의 입장에 온전히 서지 않으면 도저히 지을 수 없는 시다.


다시 우리의 주제인 ‘강남좌파’로 돌아가 보자. 길게 말할 필요 없겠다. 문제는 ‘겸손’이다. 자신이 상징자본의 구현자로서의 명망가임을, 진보의 중심에 서 있다는 허위의식에서 ‘철두철미’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면 된다. ‘진보 집권 플랜’이니 하면서 ‘극좌의 전유물인 진보 딱지’를 둘러싼 소유권 논란을 야기하지 않으면 된다. 자기가 진보를 주도하는 양, 자기 없으면 진보가 곧 무너지는 양하는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비아냥일 수밖에 없는 그 언표를 욕설로 듣고 발끈하는 것이다. 현실과 당위의 괴리 문제가 아니라, 지니고 있는 자본의 절대적인 양 때문이라도 참다운 좌파가 되지 못함을 흔쾌히 인정해야 한다.


이규보, 어무적, 정약용은 사회적 위치가 서로 다르고 신분상 혹은 정치적 입장 때문에 불우한 생을 보내기도 했지만, 각각 군인정권 하에서 정이품의 문하시랑(門下侍郞), 미관말직이기는 하지만 율려습독관(律呂習讀官), 오랜 귀양살이를 끝내고 정삼품의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냈다. 이들은 현실의 모순을 치열하게 비판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체제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이들이 발 딛고 있는 토대를 뒤집으려는 목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해서 그 한계를 지적할 것인가? 그렇게 하겠다면 뭐 어쩔 수 없지만, 이들은 자신의 생에서 적어도 허위의식 없이 살아가려고 고투한 진보적인 사람들이다. 그 덕분에 이렇게 역사에 자랑스러운 이름을 올리지 않았는가.


‘강남좌파’ 논란으로 소란을 일으키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특히 “나는 너희를 구제할 마음이 있지만 / 너희를 구제할 힘이 없구나”라고 한 어무적의 회한을 깊이 성찰해 볼 것을 권유한다. 자기 위상과 역할에 제한을 두라는 말이 아니다. 겸손해지자는 것이다. ‘강남좌파’는 시방 우리에게 소중한 그룹이거나 자산일 수 있다. 그들이 자신의 ‘특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근거는 겸손 이외에는 없다. 그들의 입에서 모처럼 터져 나오고 있는, 그리고 한때 우리의 청춘을 사로잡았던 ‘브 나로드V narod’의 깃발이 두 번째의 실패를 경험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의 역사적 소명의 아토즈atoz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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