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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Jan 03. 2024

자조(自嘲)


스스로 자기를 비웃는다는 말이다. 사전에 "수차례 시험에 떨어진 그는 자조 섞인 말로 스스로를 원망했다."라는 용례가 보인다.


그건 한때 오만상을 찌푸린 개똥철학자의 전유물이었다. 시방은 좀 유치하거나 치기어린 포우즈 같은 냄새를 풍긴다.


요즘 김수영 시 해설들을 읽으면서 해설자들이 의외로 자조란 말을 자주 들먹인다는 점을 알게 됐다.


김수영의 시, 예컨대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같은 시에서는 '자조'가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도 그렇게만 읽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 않고 암만해도 조금씩 옆으로 비켜서 있다 /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라는 건 단지 자조가 아니라 자기의 비겁을 알고 있음을 천명하는 것이다.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꿔 버렸다"로 시작하는 <그 방을 생각하며>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 중 하나는 "헛소리처럼 아직도"가 두 번 반복된다는 점이다.


해설자는 그 혁명의 굉음을 "헛소리"라고 한 것을 "자조적인 표현"이라 이해한 모양이다. 그런데 정작 시가 말하고자 하는 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 나는 그 (혁명의)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실망의 가벼움", 한 마디로 스스로의 변신이 대단히 가볍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자조 아니냐 할 것이다. 그러나 "가벼움마저 잃어도 //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고 한 데서 보듯이, 그 "가벼움"은 잃어도 좋다고 했다. 잃어서 오히려 기쁘고 풍성하다고 했으니, 한갓 자조는 아니겠다는 말이다.


해설자는 그걸 "반전"이라고 규정한다. 좌절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면 정말이 깊을수록 기쁨도 커진다는 것이다. 좀 안가해 보인다. 이렇게 보면, 이 시는 '탕아의 귀향의식' 같은 것과 상동관계에 있는 것 같다. 자조에서 의지로!


내 생각은 이렇다. 시인은 혁명 이전에 키우던 '삶과 시의 밀착'을 4.19 이후 더욱 철저히 밀고 나갈 수 있게 되었음을 감지한 것이다.


각설. 자조, 굳이 그 말을 비평과 해설의 용어로 쓰려면 좀 더 시와 시인의 삶, 그리고 전반적인 흐름응 충실히 드러내는 관점을 전제해야 할지 모른다.


덧. 실상에도 부합하지 않겠지만, 나는 김수영의 시가 자조의 늪에서 허우적 댄다거나 자조로부터 벗어나 다시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는 식으로 읽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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