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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Jan 02. 2024

유유(儒諛)


하늘이 어찌 높지 않겠냐마는(謂天蓋高)

감히 몸을 굽히지 않을 수 없고(不敢不局)

땅이 어찌 두텁지 않겠냐마는(謂地蓋厚)

감히 조심스레 걷지 않을 수 없다(不敢不蹐)


연암의「호질(虎叱)」에서 위선자인 북곽선생이 마지막에 읊은 시다. 자신이 지은 것은 아니고 『시경(詩經)』 「소아(小雅)」 ‘정월(正月)’에 나오는 구절이다.


호랑이에게 잡혀 먹을 지경에 이르자 북곽선생은 굴욕적인 아첨도 불사한다. 호랑이가 그의 지독한 악취로 먹지 않고 돌아선 줄도 모르고, 아침까지 머리를 조아리는 꼴을 본 농부가, 새벽부터 들에서 경배를 드리냐고 묻자, 북곽선생이 둘러댄 말이다. 이솝우화의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보다 더 심하다.


호랑이가 “예전에 듣기를 ‘유(儒, 선비)’는 ‘유(諛, 아첨)’라더니, 과연 그렇구나. 너는 평소에 천하의 못된 이름을 다 모아 함부로 나에게 갖다 붙이다가, 이제 급하니까 면전에서 아첨을 하니, 장차 누가 너를 신뢰하겠느냐”고 심하게 꾸짖자, 북곽선생은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면서도 종국에는 그 못나고 너절한 성질을 버리지 못한다.


지식인만큼 개과천선하기 어려운 존재도 없을 것이다. 아니 지식인의 사전엔 '개과천선'이란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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