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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Jan 14. 2024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대동운부군옥》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백과사전이다.(20권 20책. 목판본. 보물 제878호) 원(元)의 음시부((陰時夫)가 지은 《운부군옥(韻府群玉)》의 체재를 본떠 만든 것으로서 중국과 우리나라의 각종 책에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 운(韻)에 따라 배열했다. 이 책이야말로 고전을 공부하는 이의 필독 공구서라고 생각한다. 총 20권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이 책의 체제와 구성은 대개 해당어의 말뜻을 밝히고, 그 용례를 드는 것이다.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지만, 연전 이 책을 통독하면서 나름 정리해보자고 다짐한 적이 있었다. 그 흔적 하나가 눈에 띤다. “총(聰)” 자에 관한 짧은 글이다. 우선 《대동운부군옥》의 내용은 이렇다.


- 풀이 : 듣다[聞]. 귀가 밝다[明]. 귀의 힘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 용례 : 도이총(稻耳聰) : 농가에 빙절도(冰折稻)가 있는데, 그 성질은 매우 이르고, 그 귀는 매우 밝다.[農事直說] / 추살석총(椎殺釋聰) : 궁예가 머리를 깎고 불경을 스스로 풀이하는데, 그 말이 모두 괴이하고 망령되어 불경스러운 것들이었다. 석총(釋聰)이 말하기를, “간사한 말과 괴이한 이야기는 모두 후세에 가르침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궁예가 화가 나서 철퇴로 때려 죽였다.[高麗史]


그런데 “도이총”에 대한 풀이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벼[稻]인데 “귀가 매우 밝다”니, 이 무슨 말인가, 궁금해서 『농사직설(農事直說)』을 찾아보니 해당 구절이 없다. 아마 출전을 잘못 적은 모양이다. “빙절도(冰折稻)”는 얼음이 풀리자마자 바로 심는다고 해서 붙여진 벼의 한 종류이다. 이른바 올벼, 곧 조도(早稻)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그 올벼의 “귀가 매우 밝다”는 건 무슨 말인가? 여기서 “이(耳)”는 “싹”을 말한다. 그리고 “총(聰)”은 “빠르다”의 뜻이다. 이렇게 보면 “도이총”은 싹이 빨리 나오는 벼를 말한다. 그래야 올벼다. 권문해가 제대로 밝혀놓은 것을 번역자가 잘못 풀이해 결국은 책의 권위를 깎아내린 경우라 할 수 있다. 내 생각에, 해석이 잘 안 될 때는 끝까지 해결을 보든지, 정 모르면 미상(未詳)이라 해야 올바른 태도이다.


다음 “추살석총”이다. 궁예가 자기에 반대하는 중 석총을 철퇴로 때려죽였다는 기록은 역사의 패자가 지닐 수밖에 없는 상처일 가능성이 크다. 궁예에 대한 평가로, 신라에 반역하고 고려 창건주 왕건에게 패배한, 성질 더럽고 패악스러운 인물이었다고 해야 적절했을 것이다. 미륵으로 자처했다는 것도 ‘미친 중놈’이라는 욕설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참고로 허균은 궁예를 “호민(豪民)”이라 했다. 호민은 민란의 지도자 같은 존재다.


궁예와 석총이 있던 절은 세달사(世達寺)이다. 이 절은 궁예가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은 곳이다. 고통받는 민중을 구제하기 위해 스스로 미륵이라 하고 민심을 얻어나가는 근거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삼국유사》 〈조신의 꿈[調信夢]〉의 주인공 조신은 이 세달사의 장원(莊園)을 책임졌던 중이다. 그가 비록 꿈에서이지만 온갖 현실적 궁핍을 경험하고 난 후 세달사에 사표를 내는데, 세달사의 기존 노선으로는 현실에서 고통받는 가난한 백성들을 충분히 구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재산을 털어 새로 정토사(淨土寺)를 세워 여러 착한 일[白業]을 쌓은 것이다. 이것을 일연이 일장춘몽으로 해석한 이래로 그것이 교과서의 정설이 되었지만, 그것은 단지 일연의 생각일 뿐이다. 내 식으로 이해하면, 조신의 이야기는 세달사와 정토사의 노선 투쟁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대동운부군옥》은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텍스트이다. 이 책 하나만으로도 여러 주제의 이야기들을 엮어낼 수 있다. 마침 “총(聰)” 자를 다루었으니, 총명한 후학이 이 책에 전념하여 좋은 글감을 만들어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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