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와 교양인

by 진경환


교양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는 소위 전문가들에게 권하는 저녁 말씀 둘


[1] 도쿄경제대 복귀 서경식 성공회대 연구교수 인터뷰 전문(경향신문, 2008.2.26.) 중에서


다카하시 데쓰야라는 도쿄대 철학과 교수가 있습니다. 지난 10년 간 일본 사회의 우경화를 막으려고 노력해 온 사람입니다. 일본 사회가 그 다카하시에게 붙인 별명이 '정의파'입니다. 그런데 이거 칭찬이 아니에요. 오히려 아이러니라 할까. 웃음거리로 만드는 거죠. "야 너는 정의파다"하는 식으로 고립화시킵니다. "너는 너무 정의파니까 우리는 못 따라 간다", "사람이 이렇게 너무 정의로운 얘기만 할 수는 없다", "이 문제는 정의니,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문제가 아니다"하는 식으로 항상 외면하려고 합니다. 대중들뿐 아니라 학계, 지식인도 그래요.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습니까? 있을 수 없지요. 물론 아주 광신적인 기독교인들, 이슬람 사회가 악이라고 하는 사람들 빼고는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한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당화할 수 없는 그런 힘에 이렇게 끌려갈 수밖에 없어요. 그 쪽으로 따라가면 이익이 되니까 따라가는 사람이 돼버리지요. 그런 시대입니다. 정의에 대해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이 사람들에게 불편하죠. 어떤 자리에 정의로운 사람이 끼어있으면 불편하니까, 정의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을 고립화시키려고 해요. 고립화시키려고 할 때에도 그들을 논파할 수는 없어요. 상대방이 정의고, 자신은 정의가 아니니까. 그래서 시라케(しらけ) ‘시라케 세대’란 1970년대에 대학 시절을 보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무기력, 무감동, 무관심’이라는 삼무주의적인 태도가 그들의 공통분모다. 왜 그들이 그렇게 되었느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1972년에 일어난 아사마 산장 사건을 계기로 그때까지 활발했던 학생 운동이 급속하게 식어 버리고, 그 결과 어차피 권력에 반항해도 소용없으니 정치적인 일들에는 아예 관심을 갖지 말자는 태도가 만연되었다고. 다시 말해 사회개혁이라는 ‘꿈’에는 의미가 없으니 그런 것들은 아예 외면하자는 건데, 그 시절 젊은이들의 무기력 뒤에는 정치적인 좌절이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꿈’을 포기함으로써 ‘꿈’을 추구하다가 좌절했을 때 입는 상처나 억울함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수사로 "나/우리는 힘이 없어요", "너무 정의로운 얘기는 제가 못 따라 가요, "나는 맨날 먹고살기 힘들어서, 바빠서 그런 일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라는 식으로 회피하는 겁니다. 지식인들조차 그렇습니다. 먹고살기 바쁘다고 하는데, 그래도 지식인은 대학교에서 책을 보고, 글을 쓰면서도 월급을 받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과 똑같다고 할 수 없지요. 그러면 우리는 그렇게 월급 받으면서 책 보고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책임 그런 게 있지 않느냐는 애기를 합니다. 보통사람들은 아주 조그마한 반경 100밖에 못 본다고 하면, 그래도 우리는 한 반경 500 정도는 볼 수 있고, 또 그렇게 봐야 하는 존재라고 했을 때, “우리에게는 이론상 이런 게 보인다, 조심하라”는 경고를 하는 게 지식인의 역할이 아닌가요. '정의'라는 말처럼 '지식인'이라는 말도 일본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됐습니다. "선생님, 저는 지식인이 아닙니다. 선생님처럼 훌륭한 분들이 지식인이지요. 저는 그냥 월급쟁이에요"라고 자신을 비하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렇게 자신을 비하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권력의 중심에 가 있어요. 우리는 권력의 중심에 없으니까 이런 얘기밖에 할 수밖에 없지요. 아주 흥미로운 일인데, 잘 관찰해 보세요. 앞으로 몇 년 내에 한국에서 그런 어휘의 어감의 변화가 비슷하게 일어날 거에요. ‘정의’라는 말을 하기가 좀 쑥스럽고, ‘정의’라고 하면 자리가 좀 어색해 지고, 그리고 대학에서도 자신이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좀 줄어들고, 그래도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좀 웃음거리가 되고, 그렇게 될 것입니다.


[2] 에드워드 사이드, 『권력과 지성인』, 도서출판 창, 1996, 141-142.


오늘날 지성인은 아마추어가 되어야만 한다. 아마추어란 한 사회의 사려 깊은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나라와 권력, 그리고 다른 사회에 대한 것만큼의 그 나라 시민들과의 상호작용 양식까지를 포함하는 가장 기술적이고 전문화된 행동의 핵심에 대한 것까지도 도덕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다. 더욱이 아마추어로서 지성인의 정신은, 우리들 대부분이 겪고 있는 단순히 전문화된 일상의 과정을 훨씬 더 활기 있고 근원적인 것으로 만들고 변형할 수 있게 해준다. 즉 아마추어 정신은 해야 할 것으로 간주되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것을 해야 하는가, 그것으로부터 누가 혜택을 받는가, 그것이 어떻게 개인적 과제이자 근원적 생각들과 다시 연결될 수 있는가를 물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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