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버드나무는 불교, 특히 관음보살의 도상에서 발견되는데 그것은 단지 하나의 배경이 아니라 관음신앙을 잘 드러내주는 역할을 한다. 관음은 민중의 고통의 소리를 잘 듣고[관세음(觀世音)], 곧장 달려와 그들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는 어머니같이 따스한 보살이다. 고통은 진정을 필요로 할 터인데, 그때 버드나무가 진정제 역할을 한다. 어려서 이가 아프면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지근지근 씹어대면 치통이 좀 가라앉곤 했다. 지금 세계적으로 많이 쓰고 있는 해열진통제인 아스피린의 원료 글리코시드 살리신은 바로 버드나무 껍질에 들어 있다.
(2) ‘노류장화’란 말은,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을 때 근거가 되었던 명 나라 구우(瞿佑; 1347~1433)의 『전등신화(剪燈新話)』의 「애경전(愛卿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산꿩과 들오리는(山鷄野鶩)
집에서 길들이지 못하고(家莫能馴)
길가 버들과 담장의 꽃은(路柳墻花)
누구나 꺾어댄다네(人皆可折)
기생 출신인 애경이 “새 손님 받고 옛 손님 보내며, 이 집에서 밥 먹고 잠은 저 집에서 자는 오랜 습관에 젖어 있었지요. 오늘은 장씨의 부인이 되고 내일은 이씨의 아내가 됩니다.(迎新送舊, 東家食而西家宿, 久習遺風, 長郞婦而李郞妻)”라고 한탄하면서 나온 말이다. 솔직하고 아름다운 시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춘향전」에서 춘향이 변학도에게 이부종사할 수 없다고 하자, 변학도는 “노류장화가 수절이란 말 괴이하다. 요망한 말 말고 오늘부터 수청 거행하라”고 다그친다. 노류장화인 춘향이 이부종사를 할 수 없다고 한 발언에서 근대의 맹아를 엿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조롱받기 십상인 ‘몸 파는 여자의 인간선언’이었던 셈이니, “춘향의 절개는 허울 좋은 열녀문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버전일 뿐”(장희창,『 춘향이는 그래도 운이 좋았다』, 뿔, 2008)이라는 주장은 춘향을 두 번 죽이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노류장화를 이른바 ‘굴욕자’로 몰아붙이는 못된 습성이 있다. 그러나 「창부타령」의 다음 발언은 그것이 근거 없음을 설득력 있게 알려주고 있다.
"노류장화 몸이 되니, 차라리 다 떨치고 산중으로 들어가서 세상번뇌를 잊어 볼까. 창문을 닫아도 숨어드는 달빛, 마음을 달래도 파고드는 사랑. 사랑이 달빛이냐, 달빛이 사랑이냐. 텅 비인 내 가슴엔 사랑만 가득 쌓였구나. 사랑 사랑 사랑이라니, 사랑이란 게 무엇이냐"
신경림이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느냐”고 일갈했듯이, 기생, 작부, 창녀라고 해서 우리와 무에 그리 다르겠는가.
(3) 《구운몽》에서 양소유와 진채봉은 ‘양류사’를 놓고 수작을 벌인다. 아주 노골적인 “히야까시”다. 양소유가 먼저 희롱을 한다.
버들은 어찌하여 푸르고 푸른가
긴 가지 비단 기둥에 드리웠구나
바라건대 그대는 휘어잡아 꺽지 말라
이 나무가 가장 정이 많음이로다.
이에 진채봉이 화합한다.
누각 앞에 버들 심었음은
낭군의 말을 매어 머물게 하려 하였더니
어찌하여 꺾어 채를 만들어
재촉하여 서울 길로 향하십니까?
그러자 양소유는 ‘결정타’를 먹인다.
수양버들 천만 실이
실마다 곡진한 마음이 맺히었도다
바라건대 달 아래 노끈을 만들어
좋이 봄소식을 맺으리라.
“바라건대 달 아래 노끈을 만든다”는 말은 결혼을 하고 싶다는 뜻이다.
(4) 홍랑과 소월도 버들을 노래했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 밤지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홍랑이 이별의 선물로 버들을 보냄으로써 헤어지지 말고 머물러달라는 속내를 드러냈다. 버글 류(柳) 자가 머물 류(留) 자와 음이 같다는 점을 그렇게 활용했다. 또 버드나무는 그 가지를 어디에 묻든지 싹이 자라기 때문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도 거기에 담았다.
"실버들을 천만사 늘여놓고도 / 가는 봄을 잡지도 못한단 말인가 // 이내 몸이 아무리 아쉽다기로 / 돌아서는 님이야 어이 잡으랴 // 한갓되이 실버들 바람에 늙고 / 이내 몸은 시름에 혼자 여위네 // 가을 바람에 풀벌레 슬피 울 적에 / 외로운 밤에 그대도 잠 못 이루리." 소월의 <실버들>은 그저 절창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