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기법을 말한다. 사물이나 인물의 외형적인 형태보다는 그 대상이 갖는 내면의 정신을 잘 드러낸다는 “신사(神似)”와 짝이 되는 개념이다.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는 자화상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석공(石工)>이니 <나물 캐는 아낙>, <백마>니 하는 이른바 속화(俗畫)에도 능했다. 국립박물관에 갊아 있는 <석공>의 여백에는 서수집가이자 비평가인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 1727~1797)의 이런 말이 적혀 있다.(그림 1)
“오른쪽 석공이 돌을 깨는 모습을 그린 그림은 바로 공재 윤두서의 희작(戲作)으로 새속에서는 속화라 부른다. 자못 형사(形似)를 얻었으나,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의 작품과 비교해보면 한 수 아래다.”
두 가지가 흥미롭다.
하나는 <인왕산도>로 유명한 강희언(姜熙彦; 1710~1784)이 <석공>을 흉내 내어 모작을 만들었다는 것이다.(澹拙學恭齋石工攻石圖) 흉내 냈다고 하지만, 거의 똑같이 베껴 그린 것이다. 그래서 “학(學)”이라는 말을 썼다. 이런 그림을 임모화(臨模畵)라 한다. 그런데 역시 2탄은 1편에 미치지 못한다. 다른 부분은 그렇다 치고 석공의 오른쪽 다리 부분이 좀 어색해서 그런지 “순간의 힘(momentum)”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아 보인다.(그림 2)
둘은 그렇다면 조영석의 “형사”는 어떠한가 하는 점이다. 비교를 하려면 유사한 소재의 그림을 두고 하는 게 좋다. 하나는 윤두서의 <목기깎기>(그림 3)이고, 다른 하나는 조영석의 <목기깎기>(그림 4)이다. 그림 크기도 비슷하다. 다만 앞의 것은 ‘종이에 수묵’이고, 뒤의 것은 ‘종이에 채색’이다. 단적으로 말해, 조영석의 작품이 훨씬 더 사실적이다. 조영석이 실제 노동의 현장에서 스케치한 것이라면, 공재는 아마 중국의 화첩을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저 위에서 ‘김광국이 형사의 면에서 볼 때 조영석이 윤두서보다 한 수 위다’라고 한 주장을 이해할 수 있겠다.
이렇듯 특정 개념을 실제 작품으로 구현된 양상과 결부시켜 이해하면 좀 더 쉽고 자세히 알 수 있다. 사람의 일 치고 교육 아닌 것이 없다니, 미술사가들이 이런 식으로 교양서를 내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