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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Apr 09. 2024

주석


잘 알려진 조선 후기의 노래들을 다시 읽어 보니, 주석이 거의 달려 있지 않거나 잘못 달린 경우가 지나치게 많다. 고증은 고사하고 자의적으로 추정한 것이 많아도 너무도 많다. 그런데도 시험, 특히 국가고시인 ‘수능’에도 출제가 되고 있으니, 참 뭐라고 말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민탄가(民歎歌)」는 1859년 삼정의 문란으로 고통받는 진주 읍민이 겪던 당시 부세 제도의 모순과 폐해를 고발하고, 그 시정을 촉구하는 한편으로 민란의 불가피함을 역설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한 구절은 이렇다.


紙上窓文 寒心하오 백성들만 죽여내네

精宲穀을 감색하여 휘둘러서 받은 환자


『오늘의 가사문학』이라는 가사 전문 잡지에서 이 노래를 소개하면서 마지막의 ‘환자’에만 주석을 달았다. 나머지는 주석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알고 있는 내용인가? 어느 학원 강사는 이 중에서 ‘정당곡(精宲穀)’에만 “질이 좋은 곡식”이라는 주석을 달았다.


그런데  '지상창문(紙上窓文)’은 ‘지상공문(紙上空文)’, 곧 ‘종이 위의 헛된 글’이라는 뜻이다. ‘공문(空文)’은 실제 효력이 없는 법률이나 조문(條文) 혹은 아무런 결과도 기대할 수 없거나 실행이 불가능한 헛된 글을 말한다.


그리고 ‘정포곡(精宲穀)’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정당곡’으로 읽는 신공은 무엇인가? 저 말은 정실곡(精實穀)의 잘못이다. ‘정실곡’은 낟알이 몽글고 옹골찬 벼를 말한다. 환곡의 폐단 중 하나가 관에서 옹골찬 벼를 받아가고 환곡 때는 오래 묵어 썩은 벼를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일성록(日省錄)』의 전언이 참고된다. “(간리들이) 매번 훔치고 농간을 부리는 과정에서 번번이 백성들이 새로 바치는 정실곡(精實穀)을 가져가고 오래 묵어 썩은 것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감색’은 ‘감색(監色)’으로 물건의 질을 살펴보기 위하여 그 일부분을 살펴본다는 말이고, ‘휘둘러서’는 ‘남을 정신 차릴 수 없도록 얼떨떨하게 만들어서’라는 뜻이다. 환곡을 주면서 간리(奸吏)들이 온갖 요상한 짓들, 예컨대 벼에 돌을 섞어주는 따위의 짓거리를 자행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저런 설명과 풀이가 없이 과연 이 노래를 이해하고 감상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학자들의 책임이 제일 크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동안 해야 할 최소한의 작업도 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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