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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Apr 27. 2024

피로파괴


천안함 때 유행했던 말 중 하나가 피로파괴(疲勞破壞)다. 사전에 보니,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공학에서, 금속선을 계속 구부렸다가 펴면 절단되는 것처럼 반복적인 하중에 의한 고체의 파괴진행 징후.....피로파괴는 힘을 반복하여 가하는 동안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균열이 발생하면서 시작되고 그 후 재료 내부로 확산되다가, 균열이 발생되지 않은 부분이 너무 약해져 하중에 견디지 못할 때 갑자기 완전파괴가 발생한다. 따라서 진동이나 다른 반복적인 하중이 가해지는 구조물과 기계 부품은 피로파괴를 피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이 설명의 키워드는 아마 "반복하중"과 "완전파괴"인 듯하다. 그것을 인간관계로 치환하면 대략 "권태"와 "단절"일지 모르겠다.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그런 징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서로들 "결"을 놓치고 있거나 쉽게 지나쳐 버리려고 하는 것 같다.


동양에서 흔한 말이기는 하지만, 김시습은 이렇게 말했다. "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 뜻을 실행할 수 있는데도 물러나 자기 몸만을 깨끗히 하여 도덕과 윤리를 저버린다면, 이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자기 뜻을 실행할 수 없을 바에는 차라리 제 한 몸이나 깨끗이 하는 것이 나으리라." 새삼 깊이 따져볼 말이다.


나는 김시습의 저 마음을 김수영의 이 시로 약간 이해했다.


파자마바람으로

(김수영)

          

파자마바람으로 우는 아이를 데리러 나가서

노상에서 支署의 순경을 만났더니

[아니 어디를 갔다 오슈?]

이렇게 돼서야 고만이지

어떻게든지 체면을 차려볼 궁리 좀 해야지


파자마바람으로 닭모이를 주러 나가서

문지방 안에 夕刊이 떨어져 딩굴고 있는데도

심부름하는 놈더러

[저것 좀 집어와라!]호령 하나 못하니

이렇게 돼서야 고만이지

어떻게든지 체면을 차려볼 궁리 좀 해야지


파자마바람으로 체면도 차리고 돈도 벌자고

하다하다못해 번역업을 했더니

卷末에 붙어나오는 역자약력에는

한사코 xx대학 중퇴가 xx대학 졸업으로 誤植이 돼 나오니

이렇게 돼서야 고만이지

어떻게든지 체면을 차려볼 궁리 좀 해야지


파자마바람으로 쥬우스를 마시면서

프레이서의 現代詩論을 사전을 찾아가며 읽고 있으려니

여편네가 일본에서 온 새 잡지 안의

金素雲의 수필을 보라고 내던져준다

잃어보지 않으신 분은 읽어보시오

나의 프레이서의 책 속의 낱말이

송충이처럼 꾸불텅거리면서 어찌나 지겨워 보이던지

이렇게 돼서야 고만이지

어떻게든지 체면을 차려볼 궁리 좀 해야지

<196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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