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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Sep 15. 2022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까?

'방역 옹호 세력'에 대한 일갈

방역 지속을 요구하는 세력은 높은 비율로 ‘민주 진영’ 내지 ‘진보 진영’에 속한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손으로 19대 대통령을 선출했다는 데에 자부심을 갖고 있기에 그 정부에서 행하는 (거의) 모든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거나 지지했다. 방역도 마찬가지였다. 정부에 대한 우호적 태도는 ‘위기 상황에 대한 국가의 합당한 대처’라는 의식과 맞물려 방역에 대한 절대적 지지로 이어졌으며,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낼지는 생각조차 않고서 오로지 ‘내 손으로 만든 정부’가 사회 곳곳에 손을 뻗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논리는 일관적이었다. '바이러스는 위험하며, 감염 또한 위험하다. 감염되면 노약자들이 가장 먼저 위험에 빠지며 심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으니 이를 방지하기 위해, 또한 궁극적으로 바이러스 대유행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의 자유를 마땅히 제한하여야 한다'는 전형적 국가 역할론다. (단, 이 논리는 비단 한국에서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만 펴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면서도 방역을 옹호하는 사람들 또한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2020년 한 해를 보냈고 2021년을 겼다.

 

이윽고 만 2년이 지나 2022년이 되었다.

 

정작 그들이 그토록 허망하게 보내선 안 된다고 말했던 이들이 가장 많이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노약자였고, 병환을 앓고 있었다. 그 어떤 외부 자극에도 민감한 군(群)이었다. 방역은 그들의 죽음을 막지 못했으며, 그렇게 효능이 뛰어나다던 백신과 마스크도 그들을 지켜주지는 못했다.

 

방역 옹호자들이 늘 언급했던 것이 (자유와 대비되는) ‘방종’이었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으로서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됨과, ‘민주적 시민성’을 들어 마땅히 사회의 어려움 타개에 동참해야 함을 역설(力說)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외출하는 것조차 문제시했으며, 마스크 착용이 의무가 아니었던 때조차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이들을 맹렬히 비난했다. ‘당신들 때문에 남들이 감염되어 목숨을 잃으면 어쩌느냐’는 이유였다.

 

그런데 의문스러운 것은, 과연 바이러스 감염에 있어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히 구분되냐는 점과, 바이러스 감염을 두고 왜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눠야 하냐는 점이다. 그 누구도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싶어 감염되지 않았고, 퍼뜨리고 싶어서 퍼뜨리지도 않았다. 그저 어쩌다 보니 감염되었을 뿐이고, 어쩌다 보니 감염원이 되어 누군가에게 바이러스를 옮겼을 뿐이다. 이를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가 무식함의 발로인 것은, 바이러스 전파에는 그 어떤 의도성도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예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전염병에 걸린 이를 기피하고 심지어는 집에서 나오지 말라며 금줄을 치고 얼굴이라도 내보이면 돌을 던지며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이는 다 ‘모두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근데 그 당시 사람들은 ‘시민’이 아니었다. 전염병에 더욱 취약했던 시대를 살았던 이들은 왕과 황제, 제후와 영주의 통치를 받았고, 그들은 역사적으로 ‘신민(臣民)’으로 지칭된다. 현대인에 비하면 10분의 1은 될까 싶은 자유와 주체성마저도 쉽게 누리지 못했던 이들이 과거인이었으나, 현대인인 우리는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이 시기, 다수의 폭력적 대처는 민주주의 사회라는 이유로 ‘시민적 의무감’에 의거한 합당한 행위로 포장되었고, 이를 지키지 않는 이는 시민임에도 시민이 아닌 이로 전락하여 지탄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를 두고도, 모두의 폭력적이고도 공격적인 행동이 ‘민주적 시민성’을 이유로 합리화될 수 있나?

 

바이러스 확산을 막겠다고 외출을 자제하고, 매일 나오는 감염자를 비난하는 동안 사람들은 모처럼 파래진 하늘과 봄꽃을 맘껏 감상하지 못했고, 누군가는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지 못해 도산하거나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혹자는 전부터 세워 두었던 계획이 틀어져 곤란함을 겪었고, 어떤 이는 오랫동안 간직했던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피해자면 피해자지 결코 가해자라 불릴 처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상 회복’이란 대의를 앞세우며 ‘사회적 연대’를 통해 이 사태를 해결하자 말해놓고는 정작 타인에게는 매우 무정했으며 또 타자를 공격적으로 했다. 감염자는 만고의 역적 취급을 당했고, 감염자가 나온 상점, 기관이 어디인지를 밝히지 않으면 지자체에 어마어마한 민원이 제기됐다. ‘거기에 가서 내가 감염되면 어쩌느냐’는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이기적인 이유였다.

또한 어떤 건물에서 일괄적으로 감염자가 나올 경우,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코호트 격리’, 동일집단격리’ 대상이 되어 한 발짝도 건물 밖에 나갈 수 없었다. 감염은 결코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리의 따뜻한 마음으로 이 어려움을 극복하자’ 말해놓고서 뒤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인권 침해와 정한 행동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한편으론 ‘내 일이 될 가능성’을 최대한 낮추기 위함이었다. 모두가 피해자면서도 동시에 가해자가 된 사회, 이것이 한국의 모습이었다.

 

‘죽음’을 막자는 이유로 죽는 것보다 못한 시기를 보내야 했던 이들은 사람들이 그토록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던 취약계층이었고, ‘동일집단격리’의 대상 또한 취약계층으로서 환자거나 요양원에 누워 꼼짝도 할 수 없었던 노인들이었다. 이게 방역을 옹호했던 이들이 말하는 ‘보호’의 방식이었나? 그들의 목숨을 살릴 수만 있다면, 원색적으로 말해 그들이 ‘연명’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최소한의 삶마저도 통제되어야 했던 것인가? 자기 손으로 선출한 대통령, 그리고 그 대통령이 수반인 정부의 업적을 위해 모든 것을 ‘사회성’과 ‘시민적 의무’라는 그럴듯한 개념으로 덮었던 당신들이 과연 이런 현실을 목도하고도 뻔뻔하게 ‘뭐가 문제냐’, ‘잘 대처하지 않았느냐’ 말할 수 있나?

 

스스로 ‘민주주의자’ 내지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보인 이러한 모순은 예전에 그들이 취했던 행동과도 연결된다. 사실 그들은 노인들을 싫어했고, 더 나아가서는 증오했다(요즘 들어서는 '2찍'이라는 이름으로 상대편을 범주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노년 세대는 그 어느 세대보다 열심히 투표하지만, 그 표는 대개 이른바 보수 정당으로 쏠린다. 이렇게 되면 자칭 진보주의자에게 있어 ‘민주정부 (재)집권’에 지장이 생긴다. 그러니 노인 세대의 일반과 반대편에 있는 들 입장에서는 노인들이 ‘저 간악한 독재정부의 후신 정당’에 표를 몰아주는 꼴이므로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반면 많은 노인은 그런 그들을 ‘빨갱이 정당이나 찍는 빨갱이 놈들’로 생각하니, 선거철 정도에나 반복되는 현상이라지만, 모두가 잠재적 공격성을 내포한 채 그때가 되기를 기다리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런 그들이 순전히 생명, 특히 취약계층의 생명을 위해 방역을 옹호한다? 과연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생명은 ‘모두의 생명’이 맞을까? 오히려 ‘나의 목숨’, ‘내 주변 사람의 목숨’이 아까?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정년 연장 및 노인 연령 상향에 대한 주장이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적잖은 이들이 공공근로와 같은 ‘노인 일자리 사업’에 매우 부정적이며, 노인 대중교통 무임승차는 더더욱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사람은 줄고 있는데 세금이 ‘다수’인(결코 소수는 아닌) 노년 세대에게 지나치게(또는 불필요하게) 투입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정작 그들이 주요한 방역 옹호 세력이란 사실은 이를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인지부조화 상태에 빠지게 한다. 그들의 방역 옹호 논거 중 하나가 취약계층의 사망 방지(최소화)가 아니던가?취약계층의 다수를 점하는 노인의 감염 및 사망은 염려하면서 고령화에 따른 노인 관련 재정 지출에는 부정적이고, 현 정부에서 조금이라도 방역을 완화하려는 손짓을 취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반대하는 모습을 보자니(앞서 작성한 여러 편의 글에서 밝혔듯 나는 윤석열 정부 지지자 아니고, 그들의 방역 정책을 전혀 과학적이라 생각하지 않으며, 현 방역 당국이 이를 즉각 폐지하지 않는 것에 매우 불만인 사람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행태인가 싶다. 그들이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정말 취약계층이 맞긴 한가? 유감스럽게도 내가 보기에는 전혀 그런 것 같지 않고, 한편으로는 사안에 따라 다른 태세를 보이고 있으니 당최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도 모르겠다.

 

방역은 반드시 이에 따른 피해자와 희생자를 낸다. 방역 자체가 그렇다. 방역이 끝나지 않는 한 보건소 병원 관계자는 계속해서 사회에 의해 강요된 착취에 시달려야 하고, 잠재적 감염원으로서 검사 대상이 되는 모든 이는 끝나지 않는 이 지난(持難)한 싸움에 지쳐 생기를 잃는다. 이것이 방역의 진면목이다. 방역은 사람을 살리는 것 이상으로 사람을 죽인다. 방역을 국가, 그리고 사회 주도의 개인에 대한 정신적 살해라고 해도 무방한 이유다. 개인이 방역 기간에 겪어야 할 그 모든 문제는 결국 개인의 몫이다. 정부에서 방역을 계속하고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정부는 할 일을 하고 있다’ 말할 수는 절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방역으로 풀린 어마어마한 정부 재정이 훗날 발생한 인플레이션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 고통은 방역 지속에 따른 고통만큼이나 큰 상황이다. 이런데도 방역은 지속돼야 하고, ‘마스크 착용은 최후의 보루’라며 모두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이들은 그들이 그토록 외쳤던 ‘합리적 대응’과 자신이 멀어져 있는지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어느샌가 쑥 들어가버린 '의료진 고맙습니다' 따위의 캠페인이 진정 의료진에게 힘이 될까? 오히려 그들에게는 하루빨리 방역을 전면 중단하고 일반 의료 체계로 전환하는 것이 힘이 될 것이다.

 

방역을 여전히 지지하고 옹호하는 이들은 자꾸만 ‘사회’를 입에 담는다. 그러나 그들이 방역을 그리도 못 놓고 있는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내가 감염되면 아플까 봐’, 이차적으로는 ‘나의 소중한 가족, 소중한 사람들이 감염되어 잘못될까 봐’이기 때문이지 정말 취약계층의 감염(에 따른 사망)을 걱정한다거나 숭고한 인류애나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는 없다고 본다(이 또한 진보주의자를 자처하지 않는, 그러나 방역 정책의 지속은 긍정하는 사람들도 보이는 이중적 태도다). 물론 그런 사람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방역은 지속돼야 한다’는 인식과 발언은 실상 스스로를 포함한 모두와 이 사회를 갉아먹고 있음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그런 인식이 없는 한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마스크 착용이 강제되는 거의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나라로 남아 ‘K-방역’으로 찬사를 받던 2년 전과는 달리, 그 어떤 국가와 각국 언론의 주목도 받지 못하는 곳으로(이건 지금도 그렇다), 어쩌면 조롱 대상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찔하고 답답하기 그지없다.

 

이런 사람들이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날로 높아지고 있고, 한국이 국제 사회와 문화를 선도한다며 자랑스러워할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을 수가 있나. ‘방역 및 마스크 의무화 조치 최장기 유지 국가’란 오명은 애써 외면하고 ‘이것이 진정한 자유’라 자기 합리화를 하는 이들…. 부디 정신을 좀 차리고 생각을 바꾸어야 할 텐데, 아직도 그 확고한 믿음 체계 안에 갇혀 인식 또한 2년 전에 머물러 있으니 여러모로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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