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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Sep 22. 2022

"마스크를 착용하세요"

이게 세뇌가 아니면 뭐야?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울에서) 지하철과 버스를 탑승할 때 카드를 단말기에 대면 늘 나오는 음성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마스크를 착용하세요", 심지어는 환승을 할 때조차 "환승입니다"라는 음성이 나온  그 짧은 시간에 저 '마스크를 착용하세요'가 아슬아슬하게 따라붙는다. 마치 억지로 끼워 넣은 듯한 저 안내 음성이 사람들의 귓가에 익숙해짐을 넘어 맴돌게 된 지도 아마 1년 반 족히 됐을 것이다.


해당 안내 음성을 들으면 한국 사람들이 마스크를 잘 안 쓰는 것 같고, 이로 인해 감염자가 엄청 많이 나온 것 같다. 그러나 모두가 안다.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아, 저 '모두' 중에는 실제로 감염된 이들이 마스크를 제대로 쓰지 않아서, 즉 방역 수칙을 준수하지 않아서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것이 사실인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이는 '나는 열심히 하라는 대로 했지만 네가 안 해서 감염됐다'는 비난의 근거로 쓰 왔다. 스스로의 부주의는 탓할 생각이 없고, 그저 다른 이가 잘못하여 본인이 해를 입었다는 편향적 확신에 의거한 무분별한 비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안내 음성과 글귀는 지하철과 버스에 타서도 듣고 볼 수 있다. 심심할 만하면 "코로나 19 바이러스 확산 차단을 위하여 차 내에서 마스크 착용의무화…", "마스크는 코와 입을 가려 착용해 주시고…"라는 음성이 끊임없이 사람들의 귀를 찌르며, 버스에 타면 어느 정류장으로 향하는지를 알려주는 맨 앞의 LED 전광판에 마스크 착용을 안내(라 하고 강요라 읽는다)하는 글귀가 주기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비단 시내 교통뿐이랴? 시외교통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기차를 이용할 경우, 한국철도(코레일) 측의 '마스크는 코와 입을 가려 착용하라', '대화는 자제하라'는 음성과 함께 '음식물을 섭취하고 바로 마스크를 올려 쓰라'는 당부의 말을 들을 수 있다. 바이러스 확산 차단을 위해 마스크를 착용해 달라 하면서, 정작 객차에서 음식물을 먹게 한다니, 어쩌면 이리도 방역 당국의 눈물겨운 노력에 반하는 처사인지!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안내문 어디에서든 볼 수 있다. 그놈의 과태료 10만 원을 부과한다는 친절한 문구와 함께 마스크 미착용자는 출입을 제한한다는 단호한 경고를 볼 때마다 마치 감시사회로 접어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과 모든 개인이 '시민경찰'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한인이 이렇게나 투철한 신고자였나 싶기도 하다. 간첩 의심자가 보이면 까닥 신고했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마스크를 안 쓰는 사람이 보이면 즉각 신고하는 시대가 됐으니 말이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요즘은 1-2년 전에 비하면 덜하기는 하다.


그래도 '시민 감시자'아예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아닌 듯하고, 제도에 의해 강제된 사항은 모두가 스스로의 일상으로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그토록 돌아오길 바랐던 일상과는 저절로 멀어진 꼴이 는데, 그 기저에는 언제나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각종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깔려 있다. 일단 마스크 미착용에 따른 과태료를 물고 싶지 않은 심리 있긴 하지만 실제로 과태료가 부과된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안 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은 그런 일 자체를 만들지 않으려 열심히 마스크를 제 몸의 일부로 삼았지만, 본인의 판단에 의하든 정신적 문제가 있든 간에 경찰이나 지자체의 과태료 지불 요구에 불응하는 경우 이를 강제하는 건 상당히 어려웠다. 다가 10만 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내면 또 낼 수 있는 금액이기 때문에 과태료 부과가 사람들로 하여금 마스크를 열심히 쓰고 다니게 한 가장 큰 이유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사실상 이유는 하나다. 안 쓰면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쌓여 해(年)가 되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나니 사회의 비난이 두려워 마스크를 썼던 이들은 점점 '정부에서 쓰라 하니 쓰는' 으로 바뀌어갔고, 방역 당국에서 '마스크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지 않고 있으니 어쩌겠냐는 말만 할 뿐이다. 민주주의 시대의 개인이 상전의 은혜를 간절히 바라는 노비인가? 그런데도 정부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다니, 이 얼마나 얼토당토않는 일인지….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과, 이에 따른 사회적 배제폭력적 행태는 분명 화됐으나, 이를 대신이라도 하듯 정부에서 뭔가를 해 주지 않는 한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않겠다는 소극성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 바이러스 차단을 전적으로 보장한다는 '무적의 마스크' 착용을 강요하는 메시지는 사회 곳곳에서 넘쳐흐르듯 나오고 있고, 사람들은 이에 완전히 무뎌져 도대체 왜 쓰는지도 모른 채 그저 쓰라니 쓰고 있을 따름이다. 의문을 가진 이조차도 마찬가지니 달라지는 게 있을까


고백하건대, 이런 말을 하는 나조차도 전철과 기차, 버스를 탈 때엔 마스크를 쓴다. 지 않으면 버스를 탈 수 없고, 전철과 기차를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없어서다. 그렇다. 난 위선자다. 하지만 위선자임을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현실을 묵인하고 그저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괴로워서 견딜 수 없다. 지난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지만, 통제로 점철된 3년을 그저 긍정하기에는 이 시간은 지극히 소중하여 정부의 지침에 좌우되느라 이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안타깝고 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가 위선자임을 밝히면서도, 이 부당한 현실을 지적하고자 오늘도 글을 쓰는 것이다.


당분간 '마스크를 착용하세요'라는 안내 음성은 계속해서 우리의 귓가에 맴돌 것이다. 그러나 마스크 착용률이 100%에 육박하는 한국인에게 이는 애초에 들려줄 필요도 없다. 그런 짓을 2년 가까이 반복하고 있는 대중교통 회사도 문제지만, 해당 지침을 하달한 행정기관이 더 문제고, 최종적으로는 이 모든 망동을 사주한 질병관리청과 그 독재식 결정이 문제다. 공부하고 있는데 공부하란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나쁜 게 당연하듯,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 자꾸 쓰라 하면 또한 기분이 나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기분이 나쁜 건, 더는 쓸 필요도 이유도 없는데 쉴새없이 마스크 착용을 주문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는 죄다 마스크가 없어도 일상 생활을 영위할 수 있고, (지난 얘기긴 하지만) 누군가가 본인의 판단으로 국가 방침에 어긋나게 행동하더라도 대놓고 비난하거나 모욕하지 않았건만, 한국은 모두가 하는 대로 안 하면 면전에다 싫은 소리를 했으며, 철 지난 마스크를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는 한편 전문가란 인간은 '단계적 마스크 의무화 조치 해제'와 같은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으니 오늘도 한국인은 세뇌당하듯 마스크 착용을 주문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건대, '경애하는 최고 사령관 동지'에의 충성을 매일 강요받는 저 북쪽 국가의 상황이 왠지 익숙하게 다가온다. 하라는 대로 하는 어리석은 어른들에겐 당연히 문제가 있지만, 영문도 모르고 부모가 시키는 대로 그 작은 얼굴을 마스크로 덮은 어린아이들은 대체 무슨 죄인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 조그마한 아이들 마스크 착용을 규범으로 받아들여야 했냐는 말이다. 이 의문을 두고 숙고하기는커녕 회피하려 든다면, 한국 사회는 자주적인 개인을 육성하는 대신 말 잘 듣는 기계만 양산하겠다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모두에게 묻는다.

2022년 오늘의 한국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은 과연 권위에의 맹목적인 복종에서 자유롭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한국인은 권위를 두려워하는 것인가, 아니면 권위(체)를 부정함으로써 당할 불이익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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