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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Feb 25. 2023

'정체'와 '번체' 사이

한자 명칭의 국가별 사용 양상

1949년 10월 1일, 내전에서 승기를 잡아 마지막 기세를 몰아가던 중국공산당은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모택동의 주도하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다. 이로써 1912년부터 대륙을 불완전하게나마 통치해 왔던 중화민국의 국민정부는 막 일본에게 돌려받은 대만(타이완) 섬으로 패퇴하게 되었으며, 두 국가 모두 대만 섬과 대륙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가운데 이른바 '양안관계'가 시작된다.


대륙을 새로이 접수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처음부터 이른바 '문자 개혁'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19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륙에서는 여전히 전통 한자가 사용되었다. 그러다 6.25 전쟁이 끝난 후 본격적으로 사회의 공산주의화에 돌입한 공산당 당국에서는 '문자간화방안(文字簡化方案)'을 제정하여 1956년에 흔히 말하는 간체자 사용을 공식화한다. 이로써 수천 년간 중국에서 사용되어 온 전통 한자는 공식화된 간화자에 의해 대체되었고, 1958년에는 간체자 입력 방식인 '한어병음(漢語拼音)'이 채택되면서 본격적으로 한자를 라틴 자모로 입력하게 된다.


한편, 대륙이 아닌 대만에서 새출발을 하게 된 중화민국 정부는 기존의 전통 한자와 1918년 제정된 한자 표기 방안인 '주음부호(注音符號)' 또한 계속해서 채택하였다. 이로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어는 '보통화(普通話)'로, 중화민국의 중국어는 '국어'로서 지금까지 이어진다.




'간체자'가 중국 대륙의 공식 한자가 되었지만 전통 한자가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다. 서예와 같은 문예 활동에 있어서는 전통 한자가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다만 '한자 간화' 작업이 완료된 1964년부터 전통 한자는 '번체자'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하게 되는데, 번체자의 번 자는 '번성(번영)하다'라는 대표훈을 갖고 있으나, '번잡하다', '번거롭다'라는 뜻으로도 많이 쓰인다. 당연히 새로운 형태의 한자를 만든(그렇다 해서 모든 간체자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중공의 입장에서는 '문맹 타파'와 '쉬운 습득'을 위시로 한 간화자를 두고 굳이 기존의 한자를 정자(正字)라고 부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중국인은 정부의 주도하에 자신들이 오랫동안 써 오던 글자를 일순간에 '번거로운 글자', 즉 번체(繁體)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대만의 경우, 내전에서 패배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니와 중국 대륙을 기반으로 창립된 중국국민당의 독재가 진행되고 있었기에 중국적 정체성이 매우 강한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중국의 합법적 계승/통치국'이자 '중화 문명의 정통 계승국'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있던 중화민국 정부는 대륙의 위와 같은 시도에 대하여 자국의 한자를 정체자라 칭하였으며, 분서갱유 이래 대규모 문화 말살 정책이었던 '문화대혁명'에 반하여 '중화문명부흥운동'이 시행된다. 그만큼 중화권에 있어 한자와 그 형태는 단순히 문자의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 국가와 문화의 정체성에 해당되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옆나라인 한국은 어떠했을까? 비록 박정희 정부의 강력한 억제 정책으로 국한문 혼용체가 자취를 감추고 한글 전용 표기가 정착되긴 했으나, 여전히 기존 한자를 정자(正字)로, 간략화된 한자는 약자(략자, 略字)나 속자(俗字)로 지칭했다. 당시 한국에게 중국은 '중화민국'이었으니 굳이 '중공(중화인민공화국)'의 입장을 채택하여 전통 한자를 '번체'로 부를 이유는 없었으며, 만약 기존의 한자를 번체로 칭할 경우, 자국(한국)에서 사용되는 한자마저 번거롭다는 인식이 생기므로 국가 차원의 한자 간략화 작업을 시행한 적 없는 한국 입장에선 불필요한 처사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1990년대에 접어들자, 노태우 정부의 '북방 외교'로 인해 중화민국은 그 외교적 지위를 크게 위협받게 되었으며, 결국 '자유중국'이란 표현은 점점 밀려나고 '대만'이란 표현이 일상화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92년, 끝내 대한민국 정부는 중화민국 정부와의 단교를 결정함과 동시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수교를 결정함으로써 '한중(한국-중화민국)' 양국의 관계는 새로운 '한중(한국-중화인민공화국)' 관계로 대체된다(한국과 대만의 민간 교류는 2003년부터 공식 재개되었다).


어떤 국가가 대한민국과 수교하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수교하든 문제가 없는 것과는 달리, 중화인민공화국의 손을 잡느냐, 중화민국의 손을 잡느냐에 따라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상대국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남북과 같지만, '대만'과 수교하던 국가가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 공식 외교 관계를 맺을 경우엔 '대만'과의 모든 외교 관계를 단절해야 했고, '베이징'과 수교하려는 국가에 대한 '중국(중화민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두 중화 모두 상대국에 '양자택일'을 강요했던 것이다.

결과는 역사가 보여주듯 전 세계 절대 다수 국가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 정부로 승인함으로써 중화민국은 국제 사회에서 공식 국호를 사용하지 못하고 여러 상이한 명칭으로 불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대륙 정부와의 수교는 기존의 중국 문화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일으켰는데, '중공'에서 '중국'으로 국가의 명칭(호칭)이 달라진 것이 첫 번째지만, 중국어 교육에도 적잖은 변화가 생겼다. 기존의 중국어 교육은 대만에서 중화민국 국어를 배운 이들이나 한국 화교의 주도로 진행되었는데,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한 이후 대륙의 보통화가 한국으로 유입되면서 한국인은 처음으로 '간체자'라는 공식화된 표준 한자를 접하게 되었고, 이에 상대하여 기존의 중국식 한자는 '정체자'가 아닌 '번체자'로 전락하였다. 즉, 한국인은 전부터 불러 왔던 '한자'라는 명칭은 그대로 사용하되, '정체'가 아닌 '간체'를 학습하게 되었으며, 안 그래도 한자 문맹률이 높았던 상황에서 새로운 한자에 대한 공급이 대폭 증가하자 기존 한자에 대한 수요 또한 이에 맞춰 감소했으며, 한글 전용으로 인해 기존 한자에 대해 가져 왔던 '어렵다'는 인식이 간체자 유입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 강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대학에서 한문학과 중어중문학을 전공했다. 한문학과 중문학의 범위와 대상은 겹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으로 나뉘는데, 한문학은 기본적으로 '문언(文言)으로 쓰인 중국/한국 고전 문학'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 중문학은 '문언과 백화(白話)로 쓰인 중국 문학'을 대상으로 하기에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뚜렷하게 나뉜다. 더군다나 중어중문학 수업 때는 간체자만을 사용하고, 한문학 수업 시에는 한국 정자만을 사용하기에 똑같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간체자냐 정자냐에 따라 인식하는 데에 차이가 제법 크다.


한문학과 학생 입장에서 보면, 일단 기본적으로 한문학과 학생이라고 해도 한자를 잘 모른다. 이는 '입시 시장'에서 한문학과의 지위가 갖는 한계 때문이기도 하고, 사실상 한자를 거의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초중고교를 졸업하는 한국의 학생들이 필연적으로 직면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일본의 경우에는 '가나(假名)-한자'의 이중문자 체계라 한자 사용에 무리가 없지만, 한국은 국한문을 혼용하지 않은 지 오래라 한자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도가 매우 떨어지므로 한자로 1부터 3까지는 쓰더라도 4와 5부터는 헷갈려하는 사람이 많은 수준이다.

한문학과 학생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다. 어릴 때부터 한자를 공부해 온 학생의 경우엔 당연히 중고교 필수 한자는 거의 다 아는 수준이고, 본인의 학습량에 따라 그 이상의 한자도 알지만(대개 이런 학생들은 대학원에 간다), 한자 수준이 높지 않은 이의 경우 더듬더듬 한자를 읽어내려가더라도 모르는 음의 한자가 나오면 바로 막힌다. 더군다나 획수가 많은 전통 한자를 쓰는데다 상대적으로 간편한 한글을 사용하므로 한자를 복잡하고 어려운 문자로 인식하는 경우가 절대 다수다. 그러므로 한자의 모양(形), 소리(音), 뜻(義)을 습득하느라 시간을 꽤나 써야 한다.

그렇지만 기본 한자 자형이 예전부터 사용해 오던 '정자'라는 인식은 고루 갖고 있으므로 굳이 이를 '정자'로 부르지 않는다. 한문학에 있어 '한자=정자'이기 때문이다.


한편, 중문학과 학생 입장에서 한자를 보면, 간체자를 아는 학생이 절대 다수, '정체자(正體字)'를 아는 학생은 절대 소수다. 나는 개인적 특성상 간체자와 정체자를 다 알지만, 한자와 한문을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중국어만 배운 학생들은 간체자만 알고, 화교 신분의 학생들은 정체자를 기본적으로 하되 간체자도 구사할 수 있다(중국 대륙에서 살다 온 학생들은 정체자를 읽을 수는 있다).

다만 중문학과 학생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한자를 열이면 열 '간체'라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에 상대하여 정자체는 '번체'라고 읽으며, 어렸을 때 학교에서, 또는 개인적으로 정체자를 배운 학생마저도 이를 정자가 아닌 '번체'라고 읽는다. 그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분위기로 정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수들조차 전통 한자를 번체라고 부르니 학생들이 굳이 이를 정체자라고 일컫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시험에서 정자를 쓸 경우 아예 틀린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교수자도 존재하는데, 아무리 배움에는 표준이 있다고 해도 개인적으로는 과도한 처사가 아닌가 싶다.


요약하자면, 한문학계에선 굳이 한자=정자이므로 별다른 이칭 없이 그냥 '한자'라 하지만, 중문학계에선 한자=간체자이므로 '한자'와 함께 '간체'란 말을 사용하며, 이에 상대하여 전통 한자를 이를 때엔 '정체(정자)'가 아닌 '번체'로 일컫는다.




중화민국이 민주화된 이후, '대만' 정체성 중심의 민주진보당이 집권하면서 대만 사회는 빠르게 탈중국화(중국어로 去中化라 함)하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대만에도 중국 대륙의 문화가 유입된다. 그러는 와중에 대만에서도 점점 '정체자'를 '번체자'로 부르는 이들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대륙식 중국어를 이르는 표현인 간체중문(簡體中文)에 상대하여 자국의 중국어를 번체중문(繁體中文)이라 칭하는 비율이 크게 늘었다. 공식 문서에서는 '정체'란 표현을 사용하지만, 실생활에선 간체와 번체를 간체/번체(簡/繁)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으며, '정체자(정체중문)'이란 표현을 사용하기를 강력히 주문한 때는 2008년에서 2016년 사이에 집권한 중국국민당의 마잉져우(馬英九) 정부 시기가 다다.


한국에서는 수교국이 바뀌면서 용어가 대체된 경우지만, 대만에서는 중화권에 속하는데다 공식적으로 '중화민국'임에도 대륙의 영향을 받아 본래 용어보다 외래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한 경우로, 사정은 다르지만 결과는 거의 동일하다. 물론 대만에서는 여전히 전통 한자인 정자를 가르치고 있고, 문맹률도 워낙 낮아 한자가 어렵다 인식하는 이들은 교육 수준이 낮은 이들이 전부지만, 한국에서는 한자 교육에 전반적으로 관심이 없는데다, 관심이 생기게 하려면 입시 필수 과목에 끼워넣어야 하는 실정이라 한자에 대한 인식은 앞으로도 낮은 상태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정부에서 간체자를 공식 사용하도록 한 것은 형식적으로는 '문맹 퇴치'가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이는 한자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일본의 문맹률은 중국보다 낮고, 대만의 경우 비슷한 수준이라는 점에서 글자 형태의 번거로움은 문맹률과 절대적인 상관성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문맹률을 좌우하는 것은 '교육 보급 수준'이다. 중국 대륙에서 간체자를 만들었다 한들 제대로 보급이 안 되었다면 문맹률은 지금보다 크게 높았을 것이다.

물론 이와는 별개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전략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중국어라 하면 중국 대륙의 간체자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고, 중국어 학습자들도 대륙식 중국어와 한자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번체 대 정체의 대결에서는 '번체'가 승리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현실이 이렇다 하여 (중국어 학습에 있어) 전통 한자를 '번체'라고 칭하는 것은 지양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서도 상용한자를 제정하면서 기존의 서체를 '구자체', 새로운 서체를 '신자체'로 칭하긴 했으나 이 명칭에는 사용 시기의 차이만이 담겨 있을 뿐 복잡하고 간단하고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본 형태인 한자는 정자로 일컫되 간략한 형태를 약자나 속자라고 칭하므로 표준이냐 그렇지 않으냐의 차이만 있다. 그런데 간체와 번체는 아예 달라서, '간단하다 대 번거롭다'의 구도가 되어버리고, 번거로운 기존의 한자는 가르치고 배우기에 어려우므로 '간체자'를 학습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는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

이런 중국의 의도를 굳이 한자 문화권에 속한 나라와 그 국민이 받아들일 이유가 있을까? 영어로도 간체는 Simplified Chinese지만 정체는 Traditional Chinese(애초에 '복잡한 중국어'란 뜻의 Complex Chinese란 말은 있지도, 쓰이지도 않는다)라 하여 간략화되었느냐, 전통적으로 쓰여 왔느냐를 기준으로 구분하는데, 굳이 예로부터 한자를 쓰는 한국인 중국어 학습자가 중국의 입장에 따라 기존 한자를 '번거로워서 배우기 어려운 한자'로 인식할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다. 애초에 '표준'이란 모범이자 본이 되는 것이지 '복잡하고 번거로워서 시행하기 어려운 방안'이 아닌 만큼, 본인들의 전통을 (공산주의라는) 사상과 이념에 맞추어 폄하하기 위해 사용한 '번체자'라는 말을 굳이 사용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한자 문화권에서 정자를 번체로 부르는 것도 서러운데, 이에 더해 2000년대 후반, 유엔(UN, 연합국)에서는 '번체로 된 중국어(繁體中文)'를 퇴출시키고 간체로 된 중국어(簡體中文)만을 유엔 내 공식 언어로 지정하였다. 그만큼 정자체로 된 중국어에 대한 수요는 중국의 국제 사회에서의 위상이 높아짐에 비례하여 낮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비록 국내 모든 중국어 관련 서적이나 교재에서 정자란 말 대신 번체만이 쓰이고 있는 실정이지만, 한자 문화권에 속한 나라로서, 그리고 전통적으로 쓰여 온 한자를 사용하는 나라로서 '번체'만큼은 본래 이름대로 '정자(정체자)'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정치적 사정으로 인해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 공식 국호가 아닌 대만(Taiwan), 중화 타이베이(Chinese Taipei), 타이완·펑후·진먼·마주 개별관세영역(Separate Customs Territory of Taiwan, Penghu, Kinmen and Matsu)으로 불리는 것을 안다면, 문자만큼은 정치의 영역을 떠나 원래 이름을 되찾아주이 낫지 않을까?


물론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최종수정 :  2023.02.25.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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