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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Feb 07. 2023

실현할 수 없는 가치, '나다움'

'나다움'이란 말은 생겨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근대도 아니고, 기껏해야 현대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역사가 짧다.

왜냐, 그전까지 인간은 늘 개별자가 아닌 집합체의 일부로서, 단독자가 아닌 소속자로서만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며, 어딘가의 구성원이어야만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나'가 안정적인 지위를 가졌을 리 만무하며, 오히려 '나'의 존재를 언급했을 경우 무가치한 존재로 낙인찍혀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사회 부적응자, 심지어는 방랑자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다만 '나다움'의 등장에 있어 선행 요소인 '나'란 존재가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근대의 의식 혁명 덕분이었다. '나'는 반드시 '무언가의 나'여야 했던 사회에서 '나'는 그냥 '나'라는 실로 혁명적인 주장이 제기된 이래, 인류 사회는 점진적으로, 때론 급진적으로 그 앞에 아무 수식어도 붙지 않은 '나'를 찾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으며, 이는 인간을 전제 통치자의 피보호자이자 신하(신민臣民) 신분에서 그냥 '사람', 즉 인민人民으로 변모시켰다. 성곽 안에서 왕과 그 군대의 보호를 받던 이들뿐만 아니라, 성문 밖에 살던 사람까지도 동일하게 한 명의 '인간'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극적 변화와는 달리, 실상은 전혀 명목에 부합하지 않은 것이 현실임을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다만 외면할 뿐이다. 21세기 하고도 23년째인 지금, 과연 모든 사람이 온전히 '나'로서, 그 어떤 수식어도 필요치 않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나?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그 사람을 설명하는 관형어가 없다면, 그는 실제로는 '인간'이되 사실상 인간이 아닌 존재 취급을 받고 만다. 현대 사회의 '인민'들조차 '~의', '~인', '~한'이란 조사의 수식을 받아야만 사람답게 살아갈 수가 있다. 그것이 과연 그를 온전히 대신하는 대상인가? 다시 말해, 그 수식어가 '나'라는 피수식어와 완전히 동일시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저 그 사람을 일컫는 하나의 표현 방식일 뿐이다. 그러나 그 흔하디흔한 수식어 하나마저 없는 이는 드디어 '단독자'로 오롯이 존재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끝내 스스로 단독자를 마다해야만 하는 가련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만약 그 어떤 말로도 '나'를 드러내지 못하게 될 경우, 그 사람은 곧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무능력자'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 '제 몫'이란 건 누가 정한 것인가? 바로 사회다. 사회는 결코 개별자를 개별자로 존재하지 못하게 한다. 의도치 않게 태어나 불가피하게 사회에 속해 있는 이라면 반드시 무엇이라도 괜찮으니 직함 하나씩은 달게 한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비로소 그를 일러 '인간답다'고 한다. 이렇게 신민에서 인민으로 승격된 인간은, 도리어 달라진 것이 없음을, 오히려 나름의 수단성과 기능성을 지녀야만 인간으로 대우받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음을 깨달을 뿐이다.


'나'란 왜 존재하며, 또 왜 존재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철학과 사상, 종교가 태동했다. 그러나 저기서 말하는 '나'는 개별적으로 의미를 갖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 일반'이라 하여, 전체 인간의 범주에 종속되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곧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같았다.

그런데 이에 이의를 제기하며, '나'라는 개별자가 누구인지를 묻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늘 인간(또는 인류)이라는 큰 틀에 속해 그것을 벗어나서는 의미를 추구할 수 없던 존재에서, 드디어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모든 대상에서 벗어난 상태의 '나'가 누구인지를 묻기 시작한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질문은 곧 사회에 대한 의문으로 이행되었고, 현 체제는 부조리하며 모순으로 가득하다 생각한 이들은 이를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 했다. 몇몇 사람들은 실패했으나, 그 의지를 이어받은 다른 이들은 끝내 성공했다. 그렇게 인류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보편적으로 누리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성립했다.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동의와 동참을 끌어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체제 전복의 근거를 정당화할 수단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른바 '혁명가(사상가)'들은 기존의 인식과는 다른 새로운 인식으로 인간과 사회, 국가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나온 개념이 바로 '인민 주권(론)'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동등한 권리가 주어지며, 그 권리는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삶을 살아갈지 또한 결정할 수 있는 힘이라는 인민주권사상은, 왕(황제)이란 이가 '신'에게서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받았다는 기존의 인식을 지우고 오히려 그 권력을 모든 인간이 고루 나눠 갖는다는 획기적인 사상적 전환을 일으켰고,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이들의 투쟁이 성공하며 그저 왕이라면 끔뻑 죽던 이들에게 왕 없이도 멀쩡히 살아갈 수 있는 주체적인 지위를 부여했다. 모든 힘은 '우리'에게 있으며, 이제 이 힘으로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새로운 체제를 기반으로 한 국가가 하나둘씩 성립하기 시작했고, 그에 맞게 법제가 재·개편되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는 곧 기만임을 알게 된다. 과연 그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삶을 꾸려갈 권리와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아마 대다수가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이는 인간이란 존재가 본성(본능)적으로 지닌 욕심/욕망 때문이기도 하나, 정작 내가 되고자/하고자 하는 바가 나를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해 준 '국가'와 '법률'의 제약을 받기 때문임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며 내 의지와 결정을 방해하는 큰 요인이 바로 국가와 법률이다.

게다가 그뿐인가? 체제의 전복으로 완전히 사라진 줄만 알았던 과거의 인식, 즉 '문화'는 여전히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된 채 대를 걸쳐 학습되고 있다. 이 문화는 예전과 똑같이 인간을 '나'가 아닌 '사회의 구성원'이 되길 강제한다. 심지어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마찬가지다. 지배 계급의 명령에 예속되었던 과거의 인간, 그리고 그들의 삶을 정당화했던 그 시절의 문화는 소멸되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동일한 족쇄로 모든 개인을 옭아매고 있다. 철 지난 얘기라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입에 올리고, 머리 긴 남자와 머리 짧은 여성을 이상하게 바라본다. 과거와 양상은 달라졌을지라도, '전형적인 남성상'과 '전형적인 여성상'은 성적 매력과 결부되어 훌륭한 남성/여성과 그렇지 않은 남성/여성을 가르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이런 사회에서 과연 개별자로 존재하는 '나'가 인식적 틀과는 무관하게 온전히 '나'가 원하고 지향하는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는가?

수많은 직업이 사라졌지만 다시 생겨난 반면,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직업도 있다. 그러나 하는 일과 성격만 다를 뿐,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새로운 사회는 개인을 묶어 두었던 틀에서 그를 해방했다고 자신감 넘친 어조로 선언했으나, 어제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자신을 규정하는 수많은 단어의 수식을 받으며 그 단어에 담긴 가치대로 살아갈 것을 암묵적으로, 때로는 대놓고 강요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가치는 누가 담은 것인가? 바로 사람이다. 시대가 달라졌고, 주된 가치관도 변화했다지만 정작 실상은 옛날과 그리 다르지 않은 듯하다. 사람은 개별자가 아닌 늘 집합의 일부로서, 내가 몸담고 있는 '직업'과 그 기능에 맞게 살아가는 하나의 톱니(바퀴)로서 살아가야만 하며, 이를 요구하고 종용하며 심지어는 강요하는 주체야말로 바로 사람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벗어나길 원했던, 나를 둘러쌌던 수많은 틀에서 벗어났다는 게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라는 질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항상 '~~다움'이란 굴레에 갇혀 있어야 했던 옛날의 '나'와 제대로 이별한 줄 알았건만, 사실은 형태만 다를 뿐, 그 원리는 동일한 제2, 제3의 굴레에 다시 갇혀 그 속성에 맞게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에 다시금 직면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과연 우리가 과거와 온전히 작별을 고한 것이 맞는지, 과거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 '현재', '현대'에 맞는 존재로 성공적으로 탈바꿈한 것인지에 의문을 품게 한다.


분홍색 좋아한다는 남자에겐 그게 뭐냐며 힐

하고, 바지'' 입는 여자는 여성스럽지 않은 존재로 규정하는 현대 사회, 근육질의 남성이 웃통을 드러내며 그 몸매를 뽐내더라도 아무런 조치 없이 방송에 내보내면서, 정작 관능적인 몸매의 여성에겐 반드시 가슴을 가릴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개인의 존재성 자체를 능가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명목으로 옛사람을 가두고 있던 인식·문화적 틀을 부수고 등장한 새로운 사상. 그러나 현실은 달라서 사람들은 전처럼 그 존재성을 능가하여 작동하는 수많은 틀에 갇혀 있고, 그것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따가운 눈총을 받거나 사회·법률적 제재를 받기까지 하며, 심하게는 인간임에도 제대로 된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이른바 '하등인간' 내지 '이등시민'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임을 안다면, 진정 현대 인류는 모든 억압의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부당하게 개인을 억압하고 가두던 틀 안에 도로 갇혀 수많은 이들을 괴롭혔던 쳇바퀴를 다시금 돌리고 있는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나다움'은 본질적으로 유의미할 수 있는가?

유감스럽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너답게 살라' 말하며 '나다움'의 가치를 설파하는 이가 있다면, 단언컨대 그는 그 의도와 무관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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