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CY Apr 10. 2023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

사람은 사람이고, 동물은 동물이다.

진화론적 세계관을 신봉하든,

종교적 세계관을 신봉하든 간에

동물은 오랜 시간 인간의 옆에 함께했고, 한편으로는 인간의 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이 지구상의 모든 존재를 압도한 현재,

인간의 적이라 할 만한 동물은, 거의가 동물원이나 몇몇 보호 구역 안에 들어앉아 있을 뿐이다.

이제 인간의 옆에는,

긴 시간 동안 그 곁을 맴도는 몇몇 작은 동물이 있다.

개와 고양이 같은, 그런 녀석들.

단순히 '가축'이자 '사육'의 대상이었던 소동물들은, 언젠가부터 그 지위가 승격되어, 지금에 이르러서는 과장 좀 보태 '인간에 필적하는 위치'까지 올라왔다.

사람들은 개를 사랑하고, 고양이를 사랑한다.

햄스터도, 고슴도치도, 심지어는 각종 곤충과 파충류도 총애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동물을 키우는 이들에게, 동물은 더는 동물이 아니다.

가족이다.

좋은 일이든 기쁜 일이든 함께하는 가족.

그래서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어디를 가든지 목줄을 채우든, 포대기에 싸든, 심지어는 유모차에 태우든 해서

그 작고 소중한 가족과 동행다.

그게 꼴사납다고 여길 수도, 뭐 하는 건가 싶을 수도 있다.

생각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그들에게 자신들의 가족을 그런 방식으로 데리고 다닐 자유가 있듯이.


언제부턴가 '동물권'이란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도덕적 고려 대상으로 인간뿐만이 아니라 동물까지 포함시키려는 일련의 사상이자 운동이다.

그들도 동의하는 것은,

도덕 행동의 주체는 오로지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들 또한 (아직, 어쩌면 근본적으로) 도덕은 인간의 영역이라는 것에는 동의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로, 쾌고감수(快苦感受) 능력을 든다.

동물에게는 감정이 있어, 즐거움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취지다.

굳이 이를 증명하려 들지 않더라도, 우리 곁에 있는 동물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인간처럼 복잡하고 세세한 수준은 아닐지라도, 분명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런 의미에서, 그저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로서 존재했던 동물은,

이제 그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의 동반자, 인간의 친구로 자리매김했으며,

동물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행동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동물 학대를 금지하고, 이를 어길 경우 처벌하는 법령이 제정되기도 했다.

이는 비단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 세계적 추세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동물을 싫어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동물을 괴롭히는 것을 혐오한다.

동물을 함부로 대하고, 심지어는 잔혹하게 죽이기까지 하는 사례를 접하면 매우 불쾌해진다.

왜냐,

동물에게도 고유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목적론적 세계관이 아닐지라도,

굳이 모든 존재를 아름답고 숭고하게 대하지는 않을지라도,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새끼를 낳아 기르고, '가족'이란 것을 꾸리는 녀석들을 왜 굳이 학대하는지,

그리도 잔인하게, 울부짖는 녀석들을 죽이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내가 동물을 특별히 우대하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논리적으로 비약이 있을지는 모르나,

작은 것 하나, 보잘것없어 보이는 무언가 하나 함부로 대하는 이가

비록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가급적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고, 존중할지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조금만 '갑'의 위치에 있다고 여겨져도 상대방을 하대하고, 무시하며, 인격적으로 짓밟는 행동을 하는 것이 인간 아니던가?

나는 그런 의미에서,

동물을 함부로 대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는 것은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과 동물이 동등한 가치를 지녀서,

동물이 특별히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그리 생각하는 건 아니다.



나는,

인간은 인간이고

동물은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근대 생물학과 진화론의 최대 폐해는,

인간을 하나의 종(種)으로 전락시킴으로써,

적어도 과학의 영역에서만큼은, 인간과 동물의 구분을 무너뜨렸다는 점에 있다.

인간 고유의 잔혹성과 야만성, 그리고 폭력성에 치를 떨고,

때로는 동물보다 못한 모습을 보인다고도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내게 있어, 인간은 인간이고, 동물은 동물이다.

인간이 감히 지구의 주인으로 군림하며, 누구의 허락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자연과 생태계를 마음대로 헤집어 놓고, 또 파괴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로 인해 인간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부정적 결과에 대한 인정과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과는 별개로

동물은 인간의 반열에 올라설 수 없으며,

인간 또한 동물의 반열로 내려갈 수는 없다.

종종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이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동물보다 못한 것은 아니며,

동물도 인간도, 이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라 할지라도

인간과 동물은 구분되어야 하며, 인간과 동물을 대하는 방식도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동물은 끔찍히 여기고, 그리도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정작 인간은 혐오하고, 불신하고,

속된 말로 '개만도 못한 사람' 취급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동물은 제 주인에게 목숨까지 바쳐 충성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제 이익에 따라 배신하고 뒤통수 치는 존재라며

동물을 오히려 높이고, 인간은 낮게 보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은,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일반적 인식과는 달리, 인간 심성은 거꾸로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 또한 계속해서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씁쓸하다.

사람들은 왜 동물의 고통은 그리도 안타깝게, 가엾게 여기면서도

정작 같은 '사람'의 고통에는 이리도 둔감하고 무관심한지.

어쩌면,

이제 수많은 사람들은

동물과 사람 둘 중 하나가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누굴 구하겠냐는 질문에

거리낌 없이, 망설임 없이 '동물'을 택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동물의 가치는 상승한 반면,

인간의 가치는 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한때 꽤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노래 제목이자 가사다.

난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존재만으로 늘 사람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꽃과 달리

인간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어마어마한 분노를 안겨다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저 새끼를 없애버리겠다'란 생각까지 들게 하는, 참으로 입체적인 존재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하면서도

'과연 그럴까?'

'꼭 그래야만 할까?'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이란 존재의 가치를 가장 높게 치며,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인간을 소중하게 여기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누군가가 "어떻게 동물을 그렇게 대할 수 있어?"라고 묻는 것이, '동물은 그렇게 대해선 안 된다'란 의미와 같듯이,

"인간은 그렇게 대해선 안 된다."라고,

달리 말해, "인간은 그렇게 대해야 한다."라고 말하고자 한다.

우리 집 개가,

우리 집 고양이가 소중한 것 이상으로

내가 스쳐 지나는 수많은 사람이,

내가 잠깐 마주하는 카페의 직원이, 편의점 직원이, 식당 종업원이야말로

진정 내가, 그리고 당신이 그 무엇보다 높여야 할, 그리고 무겁게 대해야 할 존재다.

동물은 동물로서 아끼고 잘 돌봐 주되,

사람은 사람이기에 더욱 그리해야 한다.

만약 동물을 동물로,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게 된다면

우리의 인간다움이란, 솔직히 별 의미가 없는 개념이 돼버려도 이상할 게 없다.

'동물다움', '식물다움', '무생물다움'이란 말은 없지만

'인간다움'이란 말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온 천지 만물이 소중하고, 그러므로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들,

인간이 다른 그 무엇보다 낮게 대우받을 이유는 없다.

인간이 인간을 선대하지 않고, 비하하고, 증오하며 조롱한다면

인간이 인간의 이름으로 쌓아온 수많은 요소는, 이름뿐인 가치로 전락하여 텅텅 비고 만다.

안타깝게도, 유사 이래 인간은 그런 취급을 받아 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만인 평등이란 가치는, 늘 그랬듯 있으나 없으나 한, 그저 형식적인 개념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 집 개가 우렁차게 짖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 용인하라 말하고,

우리 집 개는 안 문다며 타인의 불안감을 그저 과민 반응 취급하면서

정작 윗집에서 쿵쿵 소리가 나는 것은

'저 미친 것들'이라며 날선 말과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은 (이것이 매우 얹짢고 화나는 일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잖은가?


자동차 뒷면 유리에 붙은 스티커에,

'사고 시 우리 집 동물을 먼저 구해주세요'와 같은 글귀가 적혀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된 건지,

사람들이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싶어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난다.

아무리 동물 목숨이 소중하더라도,

그것은 '당신'에게 그러할 뿐이다.

모두에게 동물의 가치가 인간의 그것에 필적할 이유는 없다.

동물은 동물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이를 잊는 순간,

우리가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취해야 할 모든 행동 또한 그 의미를 잃는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글쎄,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노라면

마냥 뜬구름 잡는 소리,

그리고 헛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과 동물의 경계가 허물어질수록,

모두가 존중받고 그 가치를 인정받기는커녕

무언가는 필시 평가 절하되고,

다른 무언가는 절상된다.

통화 가치가 상승하면 금값이 떨어지고,

그 반대의 경우, 금값이 오르는 것처럼

모든 것이 다 좋아질 수는 없다는 것을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잖은가?



구구절절 이런 말 저런 말을 하긴 했으나,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 무엇보다 사람이 중하다는 사실, 이것 하나다.

사람 구실 못 하는 사람은 차마 포함시키지 못하더라도,

사람이라면, 사람 귀한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다른 것도 귀한 줄 안다.

그 반대?

유감스럽게도 명제의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게 법칙이란다.

그리고 경험적으로나 현상적으로나, 참인 듯하다.


부디 사람들이 이러한 점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작가의 이전글 '하나의 중국'과 현상 유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