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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Jun 08. 2023

'연속도시'

내가 사는 곳은 지방 중소 도시다. 같은 광역자치단체(도)에 속해 있는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지만, 수도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가 그렇듯 그 범위의 한계가 명확한, 흔하디 흔한 도시의 하나다.


그런 곳에서도 더욱 범위가 제한되어 있는, 면 안의 리에 살고 있는 내 입장에서, 이 마을을 도심지와 비교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처사임을 알면서도, 정작 시내에 나가 여러 곳을 다닐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 동네 참 좁다.

라는 것이다.


지도 앱을 켜서 내가 사는 지역을 보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시가지를 짙푸른 녹지, 곧 산이 둘러싸고 있고, 그 산 사이에 놓여 있는 좁은 몇 개 도로만이 타지로 나갈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하늘이나 우주에서 보면 한낱 개미와 같은 인간이지만, 이 지도라는 것은 그 작디 작은 인간에게 존재하는지도 모를 조물주의 관점을 허용해서, 한 점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나'란 존재로 하여금 이 도시와 저 도시를 비교 및 대조하게 하고, 어디는 꽤나 크고 넓은데, 어디는 이렇게 좁고 작은 곳이라 평하게 한다.


일차적으로 경험에 의거했을 때 내가 사는 곳은 절대적으로는 클지 몰라도 상대적으로는 작으며, 면적은 넓더라도 웬만한 경기도 소재 지자체에 비하면 단위면적 내에 있는 각종 건물과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 고층 빌딩 하나 없는, 그나마 최근에 지어진 몇몇 아파트만이 우뚝 솟아 있는 그런 지역. 버스비를 아끼고 운동도 하겠다는 이유로 이 동에서 저 동으로 이어지는 2-3km 되는 거리를 그냥 걸어다니곤 하는 내 입장에서는, 집을 제외하면 논과 밭이 전부인 우리 동네를 생각하면 이 즐비해 있는 상점가를 볼 때마다 그야말로 '다른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대학 생활을 했던 '수도'의 모습을 떠올리노라면 그마저도 듬성듬성해 보일 뿐이다.

서울이란 곳은 어떠한가? 단순히 건물의 밀집을 넘어 십 층 가까이 되는, 또는 그 이상인 건물이 계속해서 이어져 있으며, 도무지 그 끝이 있나 싶을 정도로 시가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는 곳이 아닌가? 그런 곳에 지방 중소도시를 비한다는 것은 무리긴 하지만, 그 기억을 지울 수 없는 나로서는 내가 사는 곳이 참 좁고, 뭣도 없는 곳에 불과하다.


그러다 언젠가, 우연히 '연속도시'란 개념을 접했다. 그 뜻은 이러하다. (네이버에 검색하면 나온다.)

연속도시 : 각각 별개의 도시가 경계 확장에 따라 하나로 연결되어 일체화된 도시. 영국의 게데스(Geddes, P.)가 제시한 개념.

도시라 함은 서로 다른 행정구역으로서 상이한 정체성을 지님과 동시에 각기 다른 지방정부의 관할하에 있는 지역을 의미한다. 이 도시와 도시가 계속해서 이어져 있다면, 이를 일러 '연속도시'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도시 내에선 어떨까? 이에 대한 개념도 이미 정립되어 있다.

연속 시가지 : 각각 별도의 시가지로 형성되었으나 경계 확장에 따라 하나로 연결된 시가지.

단순히 '도심(지)'이라 할 수 있는 곳에 여러 행정동(법정동)이 모여 있는 차원을 넘어서서, 한 지역 내에 존재하는 여러 개의 도심지가 규모의 확대로 인해 연결되면서 마치 하나의 형태로 유지되는 듯한 곳을 바로 연속 시가지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용어에 따르면, 내가 사는 지역은 연속도시에 해당하지 않는다. 인근 지역과 '도심'으로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단절도시'인 셈이다. 더욱이 이 작은 시골 마을은 그것이 속한 '시'와도 단절되어 있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은 연속도시에 거주하는 이들보다 자연친화적 삶을 사는 대신 생활이나 문화 방면에 있어 불편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대중교통이나 자가용)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도권 지역이 대개 '연속도시'인 이유는, 수도권 광역 전철로 각 지역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단, 철로가 산지를 통과하는 경우는 예외다.). 이런 경우 도시와 도시 사이의 경계는 매우 불명확해지고 모호해져서 한 발자국만 옮겨도 다른 도시에 있게 되며, 각 도시를 연결하는 것은 단순히 차도뿐만이 아니라 보도블록으로 이뤄진 인도이기도 하다. 나는 그냥 깔린 길을 걸을 뿐인데, 그것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연속도시 또는 연속 시가지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조작이 개입된다. 무슨 조작이냐, 녹지를 조작하는 것이다. 산과 산, 들판으로 연결된 각 도시는 비록 그 사이에 길고 좁은 도로가 놓여 있다고는 하지만 개입이 최소화된 녹지가 자연적 경계를 이룬다. 그러나 연속도시는 다르다. 서로 다른 도시가 모호한 경계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조작된 녹지를 필요로 한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최대한 다듬어진, 곧 그 원형을 상당히 잃어버린 그런 녹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별 거리낌 없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연속도시(연속 시가지)가 주는 편리함에 익숙해져 있다. 전철뿐만 아니라 버스로도, 도보로도 다른 곳에 갈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각종 편의시설과 문화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단절도시에 사는 사람, 그중에서도 더욱 단절된 곳에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마치 꿈과 같은 일이다. 경계가 명확하여 더는 그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교통수단이 있어야 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한계를 인식할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어서 걷고 싶으면 걸어서, 편하게 가고자 하면 버스나 전철을 이용하여 타지로 통할 수 있다.

요컨대, 별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연속도시가 지닌 매력이다.




연속도시의 관점으로 보면, 인구가 늚으로써 계속해서 녹지가 개발되고, 새로이 형성된 도심지가 기존의 도심지와 연결됨으로써 계속해서 이어지는 구조가 형성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자연 상태로 방치되다시피 했던 녹지가 인간에게 '개발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바뀌게 되면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달리 말하면 기존에는 없던 '매력'이 생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단절도시가 단절된 형태로 유지되는 이유는 그 주변의 녹지에 개발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지만, 연속도시의 경우엔 정반대인 것이다.


연속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인근 초대형 도시와 자신들의 거주지를 비교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이 상당히 편리한 생활 환경에 거주하고 있음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더더욱 그곳을 떠나지 않으려 하거나, 연속도시의 중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옮겨 가려 애를 쓴다.

반면, 단절된 도시에 거주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거주지가 더는 확장될 수 없음을 알기에 박탈감을 느끼거나, 아예 연속도시로 이주할 계획을 세운다. 비록 대부분은 현실에 안주하거나 만족한 채 제 일상을 영위하지만, 연속도시에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보내 본, 그리고 그곳의 편리함을 직접 경험한 몇몇 사람은 이러한 지역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알기에, 실제로 이주하느냐와는 별개로, 그곳에서 살았으면 하는 욕구를 갖게 된다.


지방 소멸과 수도권 인구 과밀이란 사회 현상의 기제가 바로 이렇다. 인간은 그 경계가 명확할 때 좌절한다. 경계는 곧 한계를 의미하고, 한계는 불가능이란 인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그 환경에서 살아가지만, 대부분이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인구 유출과 과밀이 국가적 문제로까지 대두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말인즉, 연속도시가 한번 형성되어 그 세를 뻗어나가기 시작하는 순간,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시의 확장은 반드시 인간의 욕망과 비례한다. 반면, 도시가 몰락하는 것은 인간이 더는 그곳에 욕망을 투사할 가치조차 없다고 판단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제 영역을 끊임없이 넓혀 '권역(圈域)'이 되는 곳이 있고, 생산 가능 인구가 죄다 빠져나가 노인만 남게 되는 곳이 있다. 역사적으로 도시는 인구의 증가와 함께 성장해 왔는데, 그런 도시가 폐허가 되는 일은 역병으로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전쟁으로 인해 초토화가 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없었다. 그런데, 인구가 폭증할 대로 폭증한 이 21세기에, 역병도 전쟁도 아닌, 먹고 살기 어렵다는 이유로 도시가 비어가고 있다는 것은, 이런 상황만으로도 사회는 이미 보이지 않는 전쟁으로 몰락해 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연속도시란 기본적으로 매력과 유인(誘因)이 없으면 형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연속도시와 대비되는, 이른바 '한계도시(또는 위에 언급한 '단절도시')'라 명명할 수 있는 곳은 당연히 상대적으로 매력과 유인이 덜한 곳이다. 문제는, 연속도시가 확장되는 속도보다 이 한계도시가 몰락하는 속도가 압도적으로 빠르다는 점이다. 타지역과 단절된 곳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계속해서 연속도시로 향할 것인데, 그렇다 하여 마구잡이로 건물을 지어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연속도시의 풍요로움과 편리함 뒤에는 그곳으로 몰린 수많은 이들의 생존 경쟁, 이로 인해 야기되는 불안정한 주거 환경과 인간 혐오, 궁극적으로 인간이 예로부터 신세를 져 왔던 자연의 파괴까지, '당장 사람이 살아야 하는데 어떡하느냐'란 말로 덮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그곳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하더라도, '더 좋은 지역', '더 괜찮은 환경'에서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계속해서 다른 이를 짓밟도록 추동할 것이고, 그렇게 사회적으로 선망받는 곳에서 살게 된 이들은 그곳의 원주민이 아님에도 마치 오래 전부터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 온 사람처럼 행세하며 다른 구역에 사는 이들을 비웃고, 다른 지역, 다른 권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조롱하며 우월감을 느낀다. 이렇게 연속도시가 그 찬란한 모습으로 변모하는 데에 지대하게 공헌한 인간의 욕망은, 끝내 타자에 대한 차별의식으로 변질되어 그곳을 인간지옥으로, '한계도시'를 폐허의 지대로 만드는 데에 크게 기여한다.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필연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속해 있는 연령대의 정치적 입김을 세게 한다. 이는 연속도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 욕망의 총량이 더 큰 지역일수록 세력화가 쉽고,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데에 있어서도 훨씬 유리하다. 그런 곳에 사는 이들이, 과연 다른 곳에 사는 이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고 싶어할까?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혐오시설'이라 불리는 곳은 더 넓지만 사람이 없는 곳으로 밀려나고, 그 빈자리는 다시 연속도시를 더 돋보이게 할 고급 상업 시설이 채울 것이다. 그렇다면 연속도시 이외의 지역은 분명 땅과 산으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끝내 섬 아닌 섬으로 전락할 것이고, 국가 경제를 책임지는 지역은 한정되어 있어 정치계에서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의 요구에 눈치를 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다움'이란 가치하에 겨우 유지되어 왔던 사회는, 머지 않아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로 회귀하여 결국 도태된 지역과 그곳의 사람들은 버리고 가능성이 있는 지역과 그곳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본을 투입하자 말하게 될 것이고, 고향을 떠나 연속도시의 일원으로 편입된 이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의 몰락을 두 눈으로 목도하며 탄식하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이유로 고개를 돌리며 더욱 더 연속도시의 중심부로 향하고자 안간힘을 쓰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회는 전보다 더욱 '다수 논리'에 의해 운영될 텐데, 그 다수 논리로 인해 언젠가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란 마치 저주와 같은 전망이, 과연 허튼 소리로만 치부될 수 있을까?




몇 년 전, EBS에서 <도시예찬>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바 있다. 도시의 부정적 요소가 아닌 긍정적 측면을 조명했는데, 사람이 몰리면 몰릴수록 더 나은 삶, 쾌적한 삶, 편리한 삶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으로써 오히려 그 지역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마치 '공동구매'의 원리와 같아서, 수요의 크기가 클수록 그것이 관철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더 적은 비용으로 목표한 바를 이뤄낼 수 있다는 누군가의 생각도 담겨 있었다.


새로운 관점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봐도 반쪽짜리일 뿐이다. 그 안락하고 쾌적한 삶이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이 '한계도시(단절도시)'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장 감내하는 이 불편함을, 연속도시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마냥 면피할 수 있을까?

어차피 연속도시의 누군가는 그런 '환경적 이점'을 누리는 대가로 핵심적인 무언가(주거, 교통, 결혼, 출산 등)를 포기해야만 하며, 그 결여를 메우고도 남을 위치에 있는 이들은 오히려 '나' 또는 '우리'의 삶에 그것이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현재의 안락함에 골몰한다. 강은 말라가는데, 정작 그것이 그 상류에 건설된 댐 때문이라면? 그 댐에는 실로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갇혀 있어 이를 방류하면 강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음에도, 그럴 필요나 이유가 없단 이유만으로 그런 상황을 방치한다면? 연속도시는 얼마 가지 않아 무너지고 말 것이다. 도시의 무한 확장을 가능케 했던 그 인간의 욕망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내가, 그리고 이 나라에 살아가는 모두가 직면한 암울한 현실이다. 그것을 먼저 직면하느냐, 나중에 맞닥뜨리느냐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최종수정 : 2023.11.29.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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