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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Jun 09. 2023

그는 과연 애국자였을까?

김형석 교수의 수필, 그리고 '왕징웨이'

나는 대학생 시절만 하더라도 '김형석'이란 이를 작곡가로만 알고 있었다. 그가 <나는 가수다>에 자문위원으로 나온 것을 보았고, <복면가왕>에도 고정 출연자로 나왔기에 당연히 그 외에는 딱히 알려진 인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2021-2년쯤, 작곡가 김형석이 아닌 '다른 김형석'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바로 연세대 철학과에서 재직했던 김형석 명예교수(이하 김형석 교수)였다. 후에 찾아 보니 김형석 교수가 언론 매체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그가 90대 후반의 나이에 접어들었을 때였고, 내가 대학 생활을 하던 때와 겹쳤다. 왜 그때는 그를 몰랐을까 싶지만, 당시 개신교 신자였던 나는 '100세 철학자'로 알려진 그의 저서<어떻게 믿을 것인가>를 사서 읽으며 '종교계 원로'라 할 수 있는 그의 종교에 대한 태도와 신앙적 관점을 배우고자 했다. 원론적인 얘기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가치 있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마저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종교를 나와 무의미한 처사가 되긴 했지만.


지금은 그저 한 명의 후배이자 독자로서 그의 책을 보고 있다. 책제는 <고독이라는 병>으로, 그의 첫 번째 수필집이다. 1960년대, 그러니까 그가 막 40대에 접어들었을 때에 이 책이 처음 나왔다 하니 벌써 60년이 넘게 흘렀고, 장년 내지 중년이었던 그때의 그는 노년을 거쳐 사실상 인생이란 긴 여정의 마지막 지점에 서게 되었다.

책제를 보자마자 왠지 모르게 이 책을 읽고 싶은 욕구가 솟았다. 그것은 아마 내가 이 '고독'이라는 문제에 골몰(달리 표현하면 천착穿鑿)해 왔고, 이미 수십 년 전에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던 선진이 먼저 자신의 고독을 두고 고민하며 이를 글로 남겼기에 어떤 소회가 담겨 있는지에 흥미가 생겼기 때문이리라. 다만 이 책은 절판 상태라 구할 수 없어서 아쉬울 따름이었는데, 얼마 전에 이 책이 22년 여름에 재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구매해서 읽게 되었다.


김형석 교수는 1920년생이다. 일제 강점기에 유년시절과 청년기를 보냈고, 해방(광복) 후 잠시 고향에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월남하여 '대한민국'의 일원이 다. 그런 배경으로 인해 그의 가치관이 전향적으로 변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인터뷰나 저서를 들여다 보니, 그는 인간을 중시하며 신을 사랑하는 기독교인으로서 평화를 사랑하고 폭력을 지양하는 인본주의자(휴머니스트) 결론에 이르렀다. 다만 그의 사고의 면면에서 아무래도 신세대에 속하는 내 입장으로 볼 때는 구시대적 가치가 드러난다.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개인을 분리하기보다는 연결하여 보는 점과, 성 역할이나 성별에 따른 고유한 특성을 언급하는 점, 출신 배경 및 역사적 맥락으로 인해 반공주의 우파의 입장에 서 있는 점이 그러하다. 아무래도 21세기 초에 청년으로 살고 있다 보니 공산주의의 본래 목표와 이상향 이해하면서도, 공산주의의 실현이 어떤 결과를 야기했는지, 그것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반인간적이었는지를 알기에 그의 관점에 동의하고 또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나조차도 후대에 나의 글이 알려진다면 분명 '시대의 아들'로서 그들의 가치관에 맞게 평가와 비판을 받을 것임을 알면서도, 지금의 나로서는 분명 현 시대와 합치하지 않거나 다소 편파적인 부분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 해서 그의 글을 못 읽을 정도로 불편하지는 않다. 애초에 불편하면 손도 대지 않았을 테니. 그저 그의 생각을 읽으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놓치고 있거나 버린 부분은 무엇인지, 그리고 선배 세대가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또는 않았던) 점은 무엇인지를 파악하며 사색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렇게 한참 책장을 넘기던 중, 책의 중반부가 조금 넘은 지점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그가 인생에서 선(善)이나 정의와 같이 가치 있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희생과 지성(至誠)이 필요함을 말하는 부분에서, 중국의 애국자라는 수식어로 '이 인물'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 인물의 이름은 왕징웨이(汪精衛. 왕정위). 중국국민당 출신의 혁명가였으나 중일전쟁기에 일본의 편에 붙어 괴뢰정부인 '중화민국 유신정부'를 수립한 한간(漢奸), 곧 '중화의 역적'으로 불리는 이었다.




왕징웨이(출처 : 나무위키)

왕징웨이는 중국국민당의 영수이자 혁명가였던 쑨원(孫文, 1866-1925)과 함께 당의 핵심었던 이로, 쑨원이 서거할 즈음 그의 유언('총리유촉' 또는 '국부유촉'이라 함)을 대필했을 정도로 그와 친밀했던 사람이다. 그만큼 당뿐만 아니라 중국(중화민국)을 통틀어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화살표 위의 문구가 기록자 왕징웨이筆記者 汪精衛다.

그런 그가 일생일대의 실수 또는 과오를 저지르는데, 그것이 위에 언급한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수립이다.

당시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일본의 대륙 침공으로 인해 중국 각지로 파천해 가는 위기상황을 맞이했는데(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때 국민정부를 따라 근거지를 옮겨 갔다.)그것이 국민정부의 항일 과정에 중대한 해악을 끼쳤는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일본'이라는 주적을 직면한 상황에서 그가 제국 일본과 손을 잡은 것은 국민정부 입장에서는 같은 편이었던 이에게 거하게 뒤통수를 엊어맞은 격이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그가 권력욕에 취해 이러한 선택을 의도적으로 했다는 이들, 전쟁의 확산을 막고 민생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했다는 이들과, 실수로 일을 그르쳤다는 이들이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항일 전쟁 수행에 재를 뿌리고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나는 그런 그를 '중국의 애국자'라고 칭한 김형석 교수가 도무지 무슨 생각으로 그리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왕징웨이를 '일평생 민족을 위해 살다가 끝까지 애국자로서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일본인에게 죽임을 당한 인물'이라고까지 묘사한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왜냐, 왕징웨이는 일제에 살해당한 게 아니라 다발성 골수종, 즉 혈액암으로 병사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치료를 위해 일본에 체류하던 중 사망한 것이라 김형석 교수의 설명은 사실과 완전히 어긋난다.


아무리 쑨원이 민주국가 건설을 위한답시고 권위주의적 방식의 불가피성을 내세웠고, 중국국민당도 이에 따라 '민주주의를 위한 독재'라는 모순적인 통치 방식을 채택하긴 했지만, 중화민국이 아시아 최초이자 중국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것은 엄연한 사실로서, 20세기 초중반 중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중국국민당을 (적어도 대륙 시기에 한정하면) 무작정 반자유주의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인 독재 집단이라 폄하하기는 곤란한 점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중국국민당 당원과 당 요인 및 국민혁명군은 항일전쟁을 적극적으로 수행한 반면, 왕징웨이를 필두로 한 대(對)일본 협력 세력은 그들과 정반대되는 선택을 했고, 왕징웨이는 사후 그의 무덤이 폭파당한 것도 모자라 그 시신은 화장되어 강에 뿌려지는 수모를 당했다. 그것이 비록 쟝중정 당시 국민정부 주석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기껏 공을 들여 형식적으로나마 군벌 정치를 청산하고 겨우 대륙을 통일하나 했더니 국토를 야금야금 갉아먹던 일본이 만주를 넘어 중국 동부 지역을 침공한 상황에서 왕징웨이와 그의 동지(?)들이 벌였던 행각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는 '만고의 역적'이나 할 만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왕징웨이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조선 사람을 꼽자면 춘원 이광수육당 최남선이 대표적이다. 특히 이광수의 경우 <민족적 경륜>이란 글에서 식민지 자치론을 제기하면서 친일파이자 이른바 '타협적 민족주의자'로 불리게 되었는데, 만약 일제가 독립 운동에 투신하다가 친일로 돌아선 이들에게 '조선 자치령' 운영권을 부여했다면 사실상 왕징웨이와 같은 노선을 밟게 되었을 것이다(물론 일제가 정말 '조선인'에게 자치권을 부여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왕징웨이는 자신의 행보를 후회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이 얼마나 있었겠냐마는, 어쨌든 본인이 선택한 '유신정부'를 최대한 운영함으로써 일본과 협력하여 중국을 안정화(?)하려는 구상을 뚝심 있게(...) 추진했는데, 그 결과는 위에 언급했다시피 병사와 무덤 폭파, 그리고 무려 '방부 처리'된 시신의 화장. 하필 이름을 남겨도 더럽게 남긴 왕징웨이의 뒤를 이어 유신정부 주석을 역임한 천궁보(陳公博)는 1947년 국공내전 중에 총살당했다.


최남선이나 이광수나 자신들의 적극적 친일 이력을 뉘우치고 사죄하기보다는 변명하거나 옹호하기에 바빴고, 실제로 이광수에게 또한 독립운동가였으나 친일로 돌아선 '최린'이 닥치라고까지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인데, 역사가 이러함에도 대체 김형석 교수는 왜 왕징웨이를 '중국의 애국자'로, '나라를 위해 분투하다 적국에 의해 살해당한 비운의 혁명가'로 묘사한 것인지...그 저의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고 싶다.




<고독이라는 병>에는 인촌 김성수를 다룬 부분이 있다. 1953년 어느 날(책에는 1950년이라 나와 있지만 '서울 환도'라고 명시된 것으로 보아 1953년이 맞는다.), 이승만 정부의 독재 야욕으로 발생한 '부산 정치 파동'에 분개하여 부통령직을 사임한 후 병석에 누워 있던 인촌을 만나러 간 이야기인데, 내용인즉 인촌 선생이 본인의 건강보다 민족 통합과 조국통일을 바라며 기도를 올렸다는 것이었다.


나는 고려대학교와 연도 없고, 오히려 고려대와 함께 '민족' 타령하는 대학을 나온 입장으로서 인촌에 대해 무슨 애틋한 감정이나 증오스런 감정이랄 것이 전혀 없. 하지만 오랜 시간을 교육과 언론, 독립운동에 힘썼던 그가 국민 총동원 시기에 '변절'하여 친일로 돌아섰다는 것에 있어 아쉬운 마음과 함께, 그것이 정말 본심에서 우러나온 적극적 친일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따지면 당시에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여러 (교육계) 인사들이 대거 친일로 돌아선 게 순전히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또는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냐는 비판이 제기될 것임을 알지만, 한국 진보주의 계열의 주된 무기인 '반일'과 '반독재'가 정작 동등한 가치가 아닌 상이한 무게로 취급 및 적용되고 있음을 생각하면 김성수 선생의 친일 전력이 그가 이승만의 독재 야욕에 항의한 것을 완전히 가릴 만큼 중대하고 심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보아야 하지 않나 싶다. 이는 4.3 사건의 강경 진압을 명령하여 무고한 제주도민이 학살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한 '조병옥' 박사(당시 경무청장, 후대통령 후보)도 마찬가지다. 과연 친일이 반독재보다 더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하는 사항인 것일까? 나는 이에 대해 누구처럼 확고부동하고 단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가 없다. (그럼에도 그의 친일은 분명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었고, 이로 인해 건국훈장 서훈이 취소된 것을 되돌리기란 어려운 일임을 안다.)


그런 점에서 그 장을 읽을 때 꽤나 마음이 아팠다. 나라의 비참한 현실과 미래를 걱정했다던 이가 왜 친일을 택해 그리도 지탄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를 자처했는지….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나는 이 점에서만큼은 김형석 교수의 입장에 마음이 기운다. 박정희가 주도했다는 이른바 '조국 근대화'는 민족과 국민을 위한 순수한 사랑과 대통령으로서의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기보단 정권 연장을 위한 고도의 술책으로서, 그의 마음에 일말의 애국애족적 감정이 있었다 한들, 궁극적으로는 집권을 위해 '민족과 국가의 발전'이란 구호를 채택하게 한 것이란 평가에 동의하는 사람으로서 뭔가 앞뒤가 안 맞는 태도를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김형석 교수가 저 왕징웨이를 '애국자'라고 표현한 것만큼은 도무지 넘어갈 수가 없었다. 중국국민당이 패퇴 이후 대만 섬을 강압 통치하여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를 탄압했고(중국국민당을 반공 및 반중정서를 이유로 과하게 고평가하는 것을 의미), 아무리 중국공산당에서 국수주의 광풍으로 통치 기반을 다지려 반일 감정을 꾸준히 선동해 왔다지만(중국공산당이 항일애국을 일종의 '통치 마케팅'으로 활용하는 것을 의미), 객관적으로 볼 때 왕징웨이는 조국의 주권을 위해 싸웠다기보다는 중국은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판단하에 어떻게 보더라도 결국 매국족(賣國族)을 택한 그를 애국자라고 칭한 것은, 김형석 교수가 책에서 지속적으로 언급한 '이익을 넘어선 선(善)의 추구'란 관점으로도,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는 입장으로서도 잘못된 판단이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떠날 날만을 기다리기는커녕 오히려 정해진 일과에 맞추어 규칙적인 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항상 자신을 사유(思維)의 장으로 이끄는 김형석 교수. 나도 나이가 들면 그처럼 살고 싶다. 내가 그의 책을 읽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하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틀린 것은 틀린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그것이 한 인간이자 후배로서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당연히 한 인간의 삶을 한 행적만을 두고 가타부타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처사가 아니나, 그 하나의 행적이 수많은 타인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명예와 위신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면, 그것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합당한 태도이리라

그런 점에서, 왕징웨이의 구상이 어떠했든 간에, 외적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와 같아진 조국의 상황을 앞두고 그는 너무나도 잘못된 선택을 하였으며, 김형석 교수 왕징웨이에 대해 내린 평가는 유감스럽게도 옳지 않.


이는 민족주의 정서를 경계하고, 한국 정치와 사회가 과거에 사로잡혀 답보 또는 퇴보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로서 내린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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