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극에는 자주, 한국 사극에는 가끔 등장하는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큰 대 자에 사람 인 자를 써서 생긴 이 말, '대인'이다. 대인에는 여러 뜻이 있는데,
덕과 지위가 높은 사람을 이르는 말
부모나 나이가 많은 이를 이르는 말
권력을 쥐고 있거나 관리인 사람을 이르는 말
이 일반적인 용례다.
눈썰미 있는 사람은 하나가 빠졌다고 할 수 있다. 그게 무엇이냐, '성인(成人)'의 의미로서의 대인이다. 그렇다. 이 또한 대인의 용례에 해당한다. 그런데 정작 이는 대인의 그리 흔한 용법은 아니(었)다.
흔히 성인을 대인, 어린아이를 소인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중국과 한국에서는 그리 많이 사용하지는 않은 용법이었으며, 아이의 경우 그냥 아이 아(兒) 자나 아이 해(孩) 자를 써서 표현하였다. 대인과 소인은 주로 몸집이 큰 사람과 몸집이 작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었는데, 이 경우 대인은 곧 거인(巨人)이었다(다만 시간이 흐르며 거인이 훨씬 많이 쓰이게 되었다.). 오히려 대인과 소인을 어른과 아이의 의미로 사용한 것은 일본이었다. 추측컨대 한국에 대인과 소인이 이러한 의미로 많이 쓰이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다(향교나 성균관 입구의 '하마비'에 새겨진 '대소인원개하마'라는 문구를 예시로 들 수 있겠다. 여기서 '대소'는 어른과 아이가 아니라 신분의 높고 낮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대인과 소인이란 표현은 단순히 연장자와 연소자를 구분하는 의미가 아니었다. 1인칭 대명사로서 자기를 낮출 때 쓰는 말로도 자주 쓰였고, 간혹 '일반 백성'을 소인이라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용례는 바로 이 대인이나 군자(君子), 성인(聖人, 물론 성인의 격이 가장 높다)에 반대되는 뜻으로써, 덕이 출중한 사람을 이르는 존칭인 대인, 군자, 성인과는 달리 덕이나 지혜가 없고 인격이 낮은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서양에서는 워낙 복수를 의미하는 어미가 발달해 있어서 영어만 하더라도 어미 '-s'나 '-es'를 붙이는 것이 절대적이지만, 정작 동양에서는 명사를 복수화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그 이유는 한 단어가 '집합명사'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양에서는 '말' 또는 마(馬) 자가 쓰여 있으면 말 한 마리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종류의 말을 통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물론 구어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현대 중국어만 봐도 수량사를 의미하는 '양사'가 어마어마한지라...). 하지만 영어의 경우 A horse와 Horses가 다르다. 반드시 관사가 포함되어야 한다. 이런 차이로 인해 국어에서도 '-들'이 붙는 단어는 본래 드물었다.
갑자기 대인과 소인의 의미/용례 차이를 언급해 놓고 무슨 단수 복수 얘기냐면, 이 '소인' 뒤에 종종 붙는 한 글자, 즉 '무리'를 의미하는 배(輩)자 때문이다. 한문에는 복수를 의미하는 말이 간혹 등장하는데, 무리 등(等) 자와 저 배 자가 대표적이다.
위에 언급했다시피 한문에서는 복수를 나타내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런데 이를 사용할 경우에는 명확하게 둘 이상의 대상을 언급하기 위함이었는데, 기미독립선언문 가장 앞에 등장하는 '오등(吾等)'이 대표적이다. 단순히 '나 오' 자 하나만 써서는 '모든 조선 사람'을 포함시키기 어려웠으므로 저 등 자를 붙여 '우리'라는 뜻을 명확히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배(輩) 자에 무슨 문제가 있길래?
우리란 표현이 있으면 당연히 '너희'란 표현이 있을 터. 너희를 대표하는 표현은 여배(汝輩)다. 그런데 배 자의 경우, 순전히 복수를 나타내는 표지로 쓰이지는 않았다. 등 자와는 달리 상대방을 낮춰 부르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불량배, 폭력배, 무뢰배, 그리고 '소인배'다.
...뭔가 딱 느낌이 오지 않는가? 등 자나 배 자나 똑같이 뜻은 '무리(군群 또는 중衆)'인데, 하나는 단순히 복수를 나타내는 표지인 반면, 다른 하나는 주로 부정적인 단어와 결합하여 '떼로 다니는 이들'을 의미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아마 글자에 인격이 있다면 배 자는 100% 화를 내며 내게 무슨 잘못이 있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고대 동양에서 이 '무리'라는 말은 그다지 좋은 의미가 아니었던 것 같다. 실제로 군자나 대인, 성인에는 접미사가 붙지 않는다. 군자배, 대인배, 성인배란 말이 낯선 이유다. 요즘 들어 저 '소인배'와 대응하여 '대인배'라는 말이 제법 쓰이는데, 이는 엄연히 말해 언어의 역사성에 어긋난다. 즉, 단순히 단어를 1:1 대응하여 사용하다 보니 용례가 전혀 고려되지 않아 생긴 문제라는 뜻이다.
'소인'이란 역사적으로 덕을 추구하는 자와는 달리 이익을 좇는 자의 의미가 강했다. 이익을 도모한다는 뜻의 '모리(謀利)'야말로 소인과 걸맞는 단어인데, 공교롭게도 이에 배 자가 붙어 모리배라는 말이 생겨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곧 덕과 같은 정신적 가치가 아닌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은 늘 집단적으로 존재하며 서로의 이익을 위해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존재로 여겨졌음을 알려준다 할 수 있는데, 이와는 달리 덕을 추구하는 이들은 늘 독보적인 존재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이익을 위해 발빠르게 이곳저곳을 오가는 '소인'과는 달리 대인이나 군자는 덕을 실천하기 위해 수양하는 삶을 살았기에 굳이 이 사람 저 사람과 어울려 다닐 이유가 없었으므로 명사를 복수화하는 단어와 결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덕 있는 자가 제자를 거느리는 것을 무리를 짓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저 소인이란 말이 단순히 돈 버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비록 유가(儒家)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비천하게 본 것은 사실이나, 생업을 위해 장사를 하는 것과 제 잇속을 챙기고자 남 등처먹고 다니는 사람을 동일시했다고 보아서는 안 되며, 소인은 사실상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이 아니라 '권력자에게 아부하고 아첨하여 재력과 권력를 얻으려는 이'의 통칭이었다. 공자는 특히 고대 중국의 신분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들을 소인으로 규정했는데, 주나라가 이민족의 침입으로 동천(東遷)하자 신분 질서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하면서 하극상이 자주 일어난 것이 그 배경이었다.
당연히 권력자에게 빌붙어 제 입지를 넓히려는 이들이 자신의 재력과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인간성'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자 공자와 유가 사상가들의 입장에서는 좋아 보일 리 없었으므로, '분수'라고 일컬어지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자리를 벗어나는 행위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한 것이고, 그들에게 "너네 똑바로 살아." 하며 딱지를 붙인 게 바로 저 '소인'이었던 것이다.
소인 입장에서는 내가 내 살 길을 도모하겠다는데 당신네가 무슨 자격으로 인의예지니 타령하며 나를 모욕하고 비판하느냐 할 수 있고, 이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공자를 위시로 한 유가에서 지적하는 점은 그것이 과연 정도(正道)에 맞으며, 정도(程度)가 지나친 행동이지는 않느냐 하는 것이다. 내가 먹고 살자고 다른 이의 생업에 지장을 가하고, 그 가정을 망가뜨리며, 그의 삶을 해치는 것이 정말 옳으냐, 그리고 인간다움에 부합하느냐 묻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으로서 고전 사상이나 종교에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지만, 소크라테스가 그러했고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가 그랬듯 '성찰하는 삶'을 살지 않는 인간을 과연 인간이라 할 수 있는지, 옳고 그름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행동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지 않나 싶다. 인간에게 문제가 있으니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사상과 종교에도 각기 결함이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면 '인간'으로서 바람직한 삶을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한 결과물이 사상과 종교임을 고려하면, 스스로는 개차반처럼 살면서 남에게는 감히 지적질을 일삼는 꼰대에게 순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관점에서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받는 이들이 추구했던 가치를 거울 삼아 스스로의 삶과 행적을 돌아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는 말이다.
개개인을 규약하고 심지어는 통제하기까지 했던 일원론의 시대는 가고 각자의 삶과 사고의 방식이 인정되는 다원주의 시대가 찾아왔다. 그러다 보니 따질 게 워낙 많았던 옛날과는 달리 요즘에는 뭔가를 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이와 관련하여 '쓰레기 (총량) 보존의 법칙'이란 말이 있는데, 어느 사회건 어느 시대건 쓰레기 같은 인간은 일정한 비율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로 보면, 예나 지금이나 범죄를 저지르고 타인의 눈에 (피)눈물을 내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그 마수를 뻗치고 있다는 뜻인데, 국가권력과 법 이외의 규제 수단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21세기 현재, 어쩌면 옛날보다 지금이 소인으로 살기가 더 쉬운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법만 피하면, 권력의 손아귀만 벗어나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대인이나 군자, 심지어는 성인처럼 살 수는 없다. 그건 옛날에도 그랬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를 얽매는 무언가로부터 벗어나면 할수록, 스스로를 바람직한 길로 이끌 기준 또한 옅어지는 것이 사실인 만큼, 적어도 '내가 내 인생 살겠다는데 네깟 것들이 무슨 상관이냐'라며 마음대로 행동하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유와 권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무언가에 묶인 채 하라는 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를 알기에, 매일 실수하고 과오를 범하는 나약한 존재지만, 그래서 더욱 살피고 돌아보며 조금이라도 나은 나로 살아가려 하는 것은, 남이 나를 두고 넌 이게 문제다 하고 지적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나를 살핌으로써 실수를 보완하고, 궁극적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게 어려우니 문제지만.
좌우간 이러한 다짐과는 별개로, 별 생각 없이 '대인배'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을 보면서, 고대인의 인식상, 소인은 무리를 짓되 대인은 그리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소인배'는 있되 '대인배'는 없음을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대인이나 군자가 떼를 지어 다닌다, 뭐 충분히 생각할 수도, 또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한데, 막상 소피스테스(σοφιστής, 소피스트sophist)와 소크라테스가 설전을 벌이던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로 돌아가 보자면, '소피스테스(단수 명사)'라 불린 이들은 워낙 많아 대개 소피스트'들'이라 일컬어졌지만, 소크라테스는 오직 그 한 명뿐이었고,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테스들이 1 대 다(多)의 대립 구도로 설정된 것을 생각하면(뭐, 이는 플라톤의 의도적 설정이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대인(군자)끼리는 마음으로는 연결되어 있었을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늘 홀로 주유(周遊)하며 외로운 삶을 살았기에 '대인배'가 아닌 그저 대인, 군자로 불린 것이 아닐지. 누구보다도 대인과 군자를 넘어 '성인'으로 추앙받아 온 공자가 그랬고, 맹자가 그랬으니 말이다.
대인, 군자, 성인은 늘 고독한 존재였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외치는 가치와는 다른 구호를 내걸었으니 그럴 수밖에.
그런 점에서 그들을 무리(輩)로 일컫는 것은, 아무래도 그들의 삶과는 반대되는 처사인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