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십 대일 때, 학교 국어(문학) 시간에 늘 등장했던 개념이 바로 저 '한의 정서'였다.
그땐 그냥 그런 줄로 알고 배웠다. 워낙 한국 교육이 주입식이다 보니 이에 의문을 가질 줄도 몰랐고, 당장 그게 왜 그런지 따질 상황도 아니었다. 그저 배우고 익혀서 문제 푸는 게 전부였고, 어떤 교사도 다른 시각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한민국'이 시작된 이래, 수십 년 동안 한국인은 그 '한의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의 정서'를 반박한 이를처음 접한 건 대학에 다닐 때였다. 강의 시간에 "'한의 정서'가 반박된 지는 오래다. 다만 교과서란 것이 원래 학계에서 나온 개념을 반영하는 데에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려서 바뀌지 않는 것뿐이다."라는 교수자의 말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벌써 그런 일이...!'
국가별로 국민마다 인식하는 어떠한 공통 분위기나 정서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외국인에게도 유사한 인상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굳이 특정 개념으로 구체화 내지 정리되어 교과서에 등장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 저 '한의 정서'다. 고대에 쓰인 몇몇 사랑(과 이별) 노래(시가詩歌)를 갖다가 '한국인의 정서에는 오랫동안 한(恨)이 깃들어 있다'라고 얘기하는 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문제라 생각해서다.
왜 굳이 한반도에 터를 잡고 살아왔던 사람들의 정서를 유독 '한'이라 할까?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더군다나 고대 한국인과 중근세 한국인은 동일한 영토와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다 한들 혈통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수많은 중국계 외래 성씨가 한국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생산량이 그다지 높지 않았던 농업 사회에서 인구가 대폭 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데, 단 하나의 가능성은 타국 출신자가 여러 이유로 집단 이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난 이것이 (비록 오래 전에 그들이 한국화되었다 할지라도) 중국발 이주 행렬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들이 과연 예전부터 이 '조선 민족'이 뭔가 울분에 차 있고, 가슴 한편에 응어리진 감정이 그들을 괴롭힌다는 인식하에 살았을까? 그럴 리가. 아무리 옛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알기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왕조가 4-500년씩이나 길게 이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오히려 이런 걸로 보면 전통적인 중국인(대개 한족)이야말로 한의 정서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400여 년을 존속한 고대 한(漢) 왕조를 마지막으로 모든 왕조가 (통일된 상태로) 300년을 못 넘겼기 때문이고, 왕조는 대개 민란과 내분, 이에 따른 외침으로 멸망하였음을 고려하면 진정한 한의 정서는 바로 중국에 깃들어 있다고 봐야 타당한 것이 아닐까?
더군다나 한반도가 외침을 자주 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한반도에 존재했던 국가만 외침을 자주 당한 것도 아니다. 전 세계 각지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되었고, 고대-중세인은 거의 매 순간 전쟁에 시달렸다. 특히 지정학적으로 A 문화권과 C 문화권의 중간에 위치했던 지역(국가)의 경우엔 더더욱 전화에 휩싸여 왔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알려진, 공산주의 블록 해체 후 동-남유럽 슬라브 민족간에 벌어진 장기간의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단지 공산정권 붕괴 후 새로운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다만 서유럽이 아닌 동유럽이란 이유로 사람들이 잘 모를 뿐이다.). 세계 1차 대전 발발의 요인으로서 오스트리아 대공이 세르비아에서 총을 맞아 죽은 것도, 역사적 맥락을 살펴 보면 동일한 혈통-언어-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들이 아닌 외부 세력, 즉 '제국'에 의해 수백 년간 통치당해 왔던 동유럽 제(諸)민족의 분열상이 주된 이유다.
유대인도 마찬가지다. 마사다 요새에서의 (사실상) 마지막 저항이 로마 제국에 의해 실패로 돌아간 후 유대인은 시오니즘의 흥기에 따른 민족국가 건설 이전까지 무려 약 1900년 정도를 자신들의 전통적 세력 범위가 아닌 유럽 각지에 흩어진 채 이방인으로 살아 왔다. 동화나 융화가 아닌 구별이 비록 그들의 선택이었다 할지라도, 그리 오랜 시간을 타국에서 떠돌이 생활하듯 살아 왔다면 그들이야말로 '한의 정서'의 진정한 주인공이다. 그런데, 그런 이유로 그들이 그리도 팔레스타인의 아랍계 거주민을 학대하고 무력으로 짓밟는 것이라면, 과연 이 한의 정서가 하나의 문화적 상징으로 여겨지기에 합당한 개념인지에 대해 심한 의문이 든다.
이 '한의 정서'가 오랫동안 한반도에 뿌리를 내려 한국인의 심리 기저에 자리를 잡아 왔다면, 현대 한국인이 보이는 각종 히스테리와 타인에 대한 공격적 태도, 기형적으로 고착화된 집단 문화도 저 한의 정서에서 비롯된 서글픔과 분노 등으로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순전히 이를 한의 정서로 인함이 아닌 식민 통치와 냉전이란 역사적 분절 때문이라 설명하려 든다면 이 한의 정서는 언젠가 맥이 끊겼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저 한의 정서야말로 이 '비뚤고 왜곡된 국민성을 형성한 원흉'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단지 몇몇 고대 문학 작품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 슬퍼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이유로 한 나라의 집단적 감정이 한(恨)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문제는 이것이 장기간 한국인에게 교육의 명목으로 심겨 왔다 보니, 너무나 많은 이들이 이 '한의 정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교육 체계 또한 이것을 놓치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금만 고찰해 보아도 이 한(恨)이란 개념이 집단화되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알 수 있으며, 혹여 이것이 정말 집단적으로 함양 및 표출되어 온 감정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로, 당장 국가 주도하에 대규모 심리 치료를 해야 맞는다. 이것이 어떤 개인-사회적 문제를 야기할지 알 수 없는,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럴 생각도 의지도 없으면서, 개인의 일생을 부정적으로 장악하고도 남는 이 한이란 개념을 '민족적 정서'라고 규정하고 이를 교육으로 전승해 왔다는 것은, 저 개념에 있어서는 한국의 교육 체계가 얼마나 왜곡된 상태로 이어져 왔는지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다. 민족의 공통 정서가 회한(懷恨)이라니, 이것이야말로 한반도의 역사가 오히려 외부 침략에 의해 전개되어 왔다는 논리를 펴게 할 수 있는 상당히 위험한 개념으로 작용할 수 있다.
나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각종 지식의 전수가 마냥 긍정적인 성격만을 띠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교육이 집단적으로 편향된 가치를 전달하는 데에 얼마든 악용될 수 있으며, 그것이 특정 국가의 구성원으로 하여금 자기 우월감과 공격적 배타성을 품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늘 잠재적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본다. 객관성을 전제로 한다는 교육이라지만 얼마든 권력자에 의해 특정한 개념이 교육 대상인 개개인의 인식을 침륜할 수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치를 훼손한 이들이 그 누구보다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쳤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도발적으로 들리겠으나, 교육의 기제는 세뇌와 동일하다. 다만 그것이 '제도'의 형태를 띠고 '공식적으로' 이뤄진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교육이 세뇌와 맞닿아 있다면, 인식 체계를 합법적으로 덧씌운다는 점에서 교육은 세뇌 이상의 힘을 지닌다. 그런 맥락에서 교육과 교육적 가치는 치밀해야 하며, 신중해야 한다. 어떤 가치관과 사고 방식을 주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옳지 않을 가능성과, 그 틀린 개념이 후대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이 '한의 정서'란 개념은 하루빨리 한국인의 뇌리와 교육 체계에서 축출 및 사장돼야 할 구시대적이고 착오적이며 편협한 개념이다. 설령'민족적 자긍심'을 심기 위해서라도, 자민족의 처지를 가련하게 여기도록 하기에 충분한 '한의 정서'와 이에 대한 교육은 철폐되어야 하는 것인데 대체 언제까지 한 타령할 것인지 모르겠거니와, 애초에 저런 '민족적 가치'를 교육을 통해 주입한다는 것이야말로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있어 매우 뒤떨어진 처사임을 많은 사람들이 깨달아야 한다. 비록 이 '민족'의 이름으로 스스로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일어난 역사가 있다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수많은 이들이 죽이고 죽고 다쳤음을 생각한다면, 한국은 '민족'으로 구성된 모든 가치 체계와, 이로 이뤄지는 모든 행위에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먼저 그 반성의 대상이 되어야 할 분야가 바로 교육이다.
조속히 저 한의 정서를 개개인의 인식과 교육에서 걷어내고 개개인을 억지로 동일한 범주에 포함하려는 시도를 중단하는 것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온전하게 개인 그 자체로 대우받으며 살아가는 것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