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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Sep 03. 2023

각자도생(各自圖生)

각각 각, 스스로 자, 그림/도모할 도, 날/살 생

'각자도생',

'각자'가 한 단어임을 고려하면, 각자 생을 도모하라는 뜻으로 풀 수 있다.


모 인터넷 백과의 설명에 따르면 이 각자도생이란 성어의 용례는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에 처음 나타난다고 한다. 정확히는 '각자도생사各自圖生事'로, 각자 살 일을 도모하라는 뜻이다(살 일이란 삶과 관련된 일로, 곧 '살길'을 뜻한다.).

저 말이 쓰인 맥락과는 별개로, 사실 이는 당연한 얘기다. 개인이 자신의 살길을 알아서 도모해야지 대체 누구에게 이를 맡긴다는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이 각자도생이란 말은 엄밀히 말해 틀린 것도 아니고, 이에는 전혀 조롱이나 비판/비난의 의미도 담겨 있지 않다. 어쩌면 그래서도 안 될지 모른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사람들은 이 각자도생이란 말을 국가를 비판/비난하고 정부를 조롱할 때 사용한다. 마치 전근대 시대, 오로지 왕조와 국가의 존속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해야 했던, 정작 전란이 발생하면 곧바로 사지에 내몰렸던 '신민'처럼 근대(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시민'이자 '인간', '개인'이 국가로부터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알아서 모든 것을 해 나가야 한다는 한탄과 푸념, 조의 의미가 저 각자도생이란 단어에 담겨 있는 것이다.




시대가 바뀐 것도 사실이고, 국가가 전처럼 개인의 삶에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세상이라는 것도 모두가 안다. 이게 현실이다. 하지만 국가가 모두의 삶에, 모든 일에 일일이 개입하고 간섭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분명 개인이 해야 할 일이 있고, 국가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다만 예전에 비해 현대 사회에서는 국가가 해야 할 일의 범주가 훨씬, 양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커졌다는 점이 유의미하면서도 근본적인 차이다. 사람들은 더욱 강력하게 국가가 개인의 삶을 책임질 것을 요구하고 있고, 국가는 이에 호응하여 '합법적'으로 창출한 권력을 행사한다. 만약 대중이 보기에 개인이나 사회에 대한 국가 권력의 행사 정도가 미흡하면 그때 비로소 '각자도생'이란 말을 입에 담기 시작한다. 국가가 개인을 내버린다, 사지로 내몬다는 의미에서 그리하는 것이다.


물론 국가 권력은 예전에 비해 그 적용 범위와 대상을 확대해 왔고, 이것이 인간 집단과 (관념적으로 표현하자면) 시대의 요구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각자도생이란 말은 아무때나 나오지 않는다. 대개 특정 집단이 증오하거나 혐오하는, 정치적 입장에 있어 그들과 정반대에 위치한 정부가 집권했을 때 더욱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각자도생'이란 말을 즐겨 쓰는 그 집단은 대개 국가 권력 행사 범위의 확대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사용자 또한 어느 정도 제한돼 있다. 그렇다고 늘 그런 건 당연히 아니라서, '현대 국가'에서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인간의 상식(이 단어의 사용 가부와는 별개로, 그 뜻에 대한 모호성의 문제는 피할 수 없다.)으로 미뤄볼 때 국가가 개입할 만한 일에 개입하지 않을 경우 정파를 막론하고 이 각자도생이란 말을 쓸 수 있으며, 또 실제로도 그렇게 쓴다.


다만 나는 이에 매우 큰 함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어떤 정부를 비난하거나 공격할 때 이 각자도생이란 말을 사용할 경우, 비록 현실적으로 국가 없는 개인은 존재할 수가 없다지만(무슨 도덕적 차원에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라, 실제로 국적 없는 이들은 거의 없으며, 있기는 해도 그들의 거주지를 관할하는 국가와 그 국민으로부터 각종 차별과 무시를 받으며 힘겹게 살아간다.), 인간은 완전히 국가와 그 존재의 노예나 다름없음을 자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또 개인이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여 자신이 직면한, 또는 앞으로 직면할 상황을 합당하게 대처하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얘기기 때문이다(여기서의 '상식적'이란 말은 그 의미의 모호성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마치 국가가(정확히는 현재 집권 중인 정부가) 개인의 삶을 늘 내팽개치는 것처럼 묘사하며 각자도생 운운하는 것은, 그저 프로파간다, 즉 선전에 불과할 뿐임을 그들은 애써 외면하거나 은폐한 채 그들이 '모든 국민'을 돌보지 않는다며 그 정부의 불합리성과 부조리함을 고발하는 투사 역할을 자처하여 자신이 증오하는 정부가 국민의 지지로부터 멀어지게 함으로써 그들을 망하게 하거나 심지어는 타도하고자 하려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즉, 문자적 의미의 각자도생과 '정치적 의도'로서의 각자도생을 마구 뒤섞어 사용함으로써, 실제로는 일상이 큰 문제 없이 영위되고 있음에도 개개인이 어떤 외환이나 내란으로 인해 생존의 지경에 내몰렸다고 느끼도록 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공적으로 효력을 발휘하면 당연히 정부에 대한 지지가 철회될 것이므로 반대자 입장에서는 그만큼 좋은 일도 없다.


자타공인할 정도로 곤란하고 곤궁한 상황에 처한 이들이 존재함을 고려하면 집권 정부에 대한 '각자도생 유발'이란 비판/비난은 충분히 타당성을 지닌다. 그들은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으므로 국가 권력이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으면 도무지 정상적인 삶을 영위해나가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각자도생이 정치적 구호로 오남용될 경우, 국가는 대중의 지지를 잃지 않기 위해 과도하게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게 되며, 이는 대중영합주의로 이행되어 정부로 하여금 오로지 여론만을 의식하는 저급 정치(행정)를 하게 할 수 있는데다 궁극적으로는 무차별적이고 제한 없는 권력의 행사로 인해 개개인의 자유가 중대하게 훼손될 수 있음을 반드시 상기해야 한다. 각자도생이란 표현은, 개인이 자신의 삶을 일궈오다가 갑작스런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아 매우 곤란하고 괴로운 상황에 처할 때나 사용해야지, 그저 적대하는 정부를 끌어내릴 목적으로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말이다. 이는 이념을 떠나 국가가 개개인의 삶을 좌우하는 것이야말로 전체주의 체제 도래의 단초임을 간과하는 이들이나 저지를 만한 매우 위험한 과오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각자도생 타령을 할 것인가? 당신들이 공격 대상으로 삼는 정부가 진정 '모두', 즉 전체 인민의 이익과 복리, 자유와 평등을 침해할 것이란 전제로? 이는 터무니없는 생각으로 실로 망상에 가깝다. 국가가 대중을 선동하여 동일한 행동이나 사고를 하도록 강제하거나 특정 집단 내지 개인을 공격 대상으로 삼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면, 심하게는 국가의 행정력이 완전히 마비되어 개개인이 총과 칼을 들고 도적질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한 나라의 국민 전체가 각자도생에 내몰리는 상황은 없다.




분명 국가의 도움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시대다. 순수한 자본주의 국가는 존재할 수 없으며, 이는 공산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도 자기 자신의 요소를 버려 가면서까지 사회주의적 요소를 채택하고 흡수한 것이 현대 국가 대다수의 선택이자 행보임을 고려하면 지극히 명백하고도 현실적인 서술이다. 몇몇 국가의 국민이나 정당의 경우엔 국가의 개입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몸서리를 치며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곤 하지만, 복지국가 개념이 널리 확산되면서 국가가 개인의 삶에서 완전히 거리를 둔다는 것은 고래가 육상에서도 물 없이 생존할 수 있다는 말과 같은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도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불간섭, 불개입을 외치는 이들은 그저 수구이자 반동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님에도 각자도생 타령하며 정부가 개개인의 삶을 끝장내고 있는 것처럼 선동하는 이들은, 당장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이 우세해지게 할 순 있어도,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이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다는 국가와 국민 전체를 국가의 적극적이면서도 포괄적인, 동시에 매우 세밀한 개입 없이는 도무지 생존할 수 없는 기생 생물로 전락시킬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국가는 어떤 사안에 반드시 개입하되, 그 방식에 있어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며, 그 범위는 명확하되 한정적이고 한시적이어야 한다. 만약 다수가(때로는 소수가) 국가의 불개입/불간섭으로 인해 고통과 좌절, 절망으로 신음하고 있다면 그땐 불가피하게 적극적으로 권력을 행사해야 하겠지만, 그저 맘에 안 드는 저 무리를 어떻게 해 보겠다고 체제와 개인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말을 마구 써서는 안 됨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이는 좌파와 우파의 문제가 아니다. 여러 현인이 간파했듯, 권력은 기본적으로 모두의 편이 아니며, 오히려 모두를 권력의 이름으로 옥죌 수 있음을 기억한다면, 부디 그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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