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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Jun 11. 2024

문화적 대물림

한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빨리 사라지는 국가행(行) 티켓을 가장 빨리 손에 쥐게 된 이유로 여러 요소가 꼽히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 그 무엇보다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이유는 바로 '문화적 대물림' 이다.

문화적 대물림이란 어떤 시점에서 형성된 한 사회의 문화적 요소가 다음 세대로 이어져 그들이 이를 답습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었길래 이 나라가 이리도 빨리 소멸하는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

이런 처참하고 암담한 현 상태로 미뤄 보건대, 한국의 각 세대가 물려주고 또 물려받은 것은 결코 미덕은 아니다. 아예 그냥 '악덕'이라 표현하는 것이 낫겠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 사회는 어떤 악덕을 대물림하고 있을까?




첫째로, 한국 사회는 내 주변 사람뿐만 아니라 모르는 이들까지 선대하고 또 친절하게 대하는 태도를 물려주지 않았다.

공자의 '별애(別愛)'에서 '애'는 빼버리고 '별'만 취했다. 이 말인즉, 사랑에 선후 관계는 있을지언정 모든 사람이 결국 사랑의 대상이라는 유학의 가르침에서 '모든 사람'을 지워버리고 내 사람,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만 아끼고 사랑해 왔다는 것이다. 내 자식만 귀한 줄 알고 남의 자식 귀한 줄은 모른다. 학교 폭력 사건으로 '학폭위(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가 열릴 때 '내 자식은 그럴 리 없다'며 적반하장으로 피해자에게 귀책 사유를 돌린 사례가 한두 번 나온 것이 아니다. 그뿐이랴? 그토록 가족을 강조하는 이 사회에서 타인을 나의 가족처럼 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서비스직 종사자에 대한 폭언과 갑질은 비일비재한 문제로, 만약 그들이 가족에게 하는 대로 남들에게 하는 것이라면 그들의 가족은 대체 무슨 죄길래 폭언과 갑질을 일삼는 가족과 함께 살며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하는 것일까?

그러면서 자기 집 개나 고양이에게는 인간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고 실로 어마어마한 사랑을 쏟는다. 이것이 진정 보편적 인간 존중이란 가치가 실현되는 나라의 현실인가?


둘째로, 한국 사회는 후손들에게 약자와 빈자를 천대하고 차별하는 태도를 물려주었다.

6.25와 월남전으로 이른바 '상이군경'과 민간인 장애인이 대거 생겼을 때, 국가는 그들을 방치했으며, 그들을 적극적으로 돕는 문화도 없었다. 그저 팔다리가 없다는 이유로 그들은 갖은 차별을 당했다. 장애인의 절대 다수가 후천적임을 고려하면 그들도 분명 '멀쩡했을' 때가, '정상'이었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그들이 멀쩡하지 않다는 이유로, 정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외면했다.

그 결과 한국은 장애인이 생활하기 아주 어려운 나라가 되었다. 그들은 밖에 나가 거리를 마음껏 돌아다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해 관(官)의 도움에 철저히 의존한다. 정부와 민간의 의지가 있었더라면 적어도 시각장애인들이 점자 블록을 통해서라도 이곳 저곳을 다닐 수 있었을 것이고, 경사로의 턱만 없앴더라도 지체장애인이나 노약자, 특히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이들이 무리 없이 다닐 수 있었을 것이며, 저상 버스를 전면 도입했다면 노인뿐만 아니라 불의의 사고로 다쳐 일시적으로 목발 신세를 진다든지, 평소와는 달리 불편한 생활을 하게 된 이들도 크게 무리하지 않고서 일상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모든 것이 효율성과 경제성을 위주로 돌아가기에 저런 약자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다. 이런 나라에서 사회적 약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부유층의 무례한 태도도 심각한 수준이다. 빈부 격차가 심하지 않았을 땐 다같이 못살았으니 그렇다 쳐도, 빈부 격차가 심해지면서 부자는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사회 고위층 인사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여겨져 왔던 것조차 가볍게 무시했다. 사실 저 '귀족 도덕'이란 것은 그들이 귀족이 아닌 이들과 자신들을 차별화하는 근거였지만, 당연히 이를 보란 듯이 어기는 이들은 대놓고든 뒤에서든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의 부유층에게 도덕이란 전혀 의미가 없었다. 신분제도 해체된 마당에 무슨 양반의 덕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재력을 과시하며 가지지 못한 자들을 실패자로, 무능력자로 규정하며 조롱했다. 충분히 먹고살 만한 고소득층 사이에서 마약이 돌고,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니다 인명 사고를 낸 이들은 반성의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변호사를 선임하여 본인의 무고함(?)을 주장하며, 어떤 아파트 단지 주민들은 옆 단지 아파트와 집값을 두고 경쟁하기 위해 뜬소문을 퍼뜨려 매매가를 올리려고까지 한다. 이게 '졸부'의 전형이 아니면 무엇인가? 이렇게 그들을 비난하면 그들은 되레 '없는 사람들이 괜히 도덕이니 선이니 하며 정신 승리를 하려 든다'며 조롱하기 일쑤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지구상에서 가장 심한 배금주의 사회가 되었고, 21세기에 들어서 'OO 계급론'이란 말이 아무렇지 않게 유행하는 곳이 되었다. 재벌집 반려동물이 되고 싶다는 사람들도 적잖고, '금융 치료'라 하여 돈만 많이 주면 무엇이든 감내하겠다는 이들도 상당히 많다. 심지어 어른들의 왜곡된 모습을 아이들까지 배워 특정 주거 단지에 사는 이들을 일러 'OO 거지'라는 말까지 했다 하니 이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더불어 외모 지상주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 갈수록 외모 지상주의가 더욱 심해지는 가운데, 외모도 능력이란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고 있다. 외모가 동물에게 번식의 측면에서 큰 역할을 한다고는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외모만을 절대적 잣대로 삼아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면 원치 않은 외모를 타고난 사람들은 무슨 죄인가? 외모를 그렇게 '척도'로 올려 놓으니 주변국에서 한국을 일러 '성형 중독 국가'라고 비꼬는 것인데, 외모를 가꾸기 위한 사회적 비용을 다른 곳에 썼으면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개인이 훨씬 더 건강하고 여유로우며 안정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왜 아직까지 고대 중국의 당나라에서 만든 '신언서판(身言書判)'이란 기준을 붙들고 있는지 모르겠거니와 언과 서, 판은 싹 빼버리고 외모를 의미하는 신만 거의 0순위에 올려둔 것은 한국 사회가 꼬일 대로 꼬였다는 증거다. 그토록 한국 사회가 선망해 마지않는 서구 선진국은 면접 시에 개인 사진(파일) 첨부하라는 요구를 일절 안 한다. 외모는 개인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으며, 그의 업무 능력과 자질, 의지를 판단하는 데에는 더더욱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인식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근데 한국은? 시간제 노동을 하려고 해도 이력서에 사진을 붙이라고 한다. 전생이란 게 있다면, 한국이란 나라에 태어난 이들은 죄다 전생에 못난 외모를 타고나 이에 한이 들렸나 싶을 정도로 외모에 집착하는 나라에서 어른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아이들까지도 마음에 병을 갖고 있다.

사람은 인품이 중요하다면서 정작 이 나라는 인품이 아니라 외모에 훨씬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데, 사기범 중에 '잘생긴 사람', '인물 좋은 사람'이 아주 많다는 걸 알기는 아는 걸까? 어떻게 외모가 뛰어난 이가 인품이 좋을 거라고 속단하는 건지, 그게 왜 잘못되었다는 생각들을 안 하는 건지 모르겠다.




제국주의가 무너지고 '헌법'이 제정되면서 비로소 '민국'의 틀이 갖춰졌다. 드디어 민주공화정을 채택한 국가가 한반도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다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그렇게 상위법 하나 만들어진다고 바로 실현되는 가치가 아니다. 자유와 민주가 뭔지도 몰랐던 이들에게 이를 알리기 위해, 심지어는 자유와 민주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들에게서 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유와 민주는 고민과 투쟁을 거듭하여 계속해서 쌓아나가야 하는 가치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기에 그리 좋은 토양이 아니었다. 계급적 잔재가 남아있었고, 나이의 많고 적음과 직위의 높고 낮음을 근간으로 하는 서열주의가 만연해 있었으며, 오랫동안 군주의 통치를 받아왔던데다 외세의 지배 및 탄압을 당했기에 '권위'에 대한 두려움이 강했다. 이는 달리 말해 권위자가 개개인에게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다른 사회보다 큰 곳이라는 의미다.


이런 사회에서는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는 이들이 강한 연대와 결속으로 그것이 무너지지 않도록 치밀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싸워 나가야만 다시 전제(專制) 정치 시대로 회귀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자유와 민주를 사랑하는 이들의 단합보다 자유와 민주를 혼란과 대립, 갈등으로 인식하는 세력의 힘이 강했다. 그들이 정권을 찬탈하여 온 사회를 군국화(軍國化)하며 자유와 민주는 허울뿐인 가치로 전락했고, 개인 대 개인의 관계에서 논의되어야 할 자유와 민주는 '독재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구호'의 의미만을 갖게 되었다. 그 의미가 대폭 축소되어버린 것이다.


민주화가 되고 나니 자유와 민주가 승리했다는 함성이 곳곳에서 터져나왔으나, 순전히 '정치적 의미'만을 갖게 된, 다시 말하면 '체제'의 측면에서만 의미를 지녔던 이 자유와 민주는 그 핵심이자 기반인 '개인의 자유와 주권'이라는 측면에서는 더는 논의되지 않았다. 자유와 민주의 승리는 독재 정권을 타도한 것이었고, 그 후신인 정당이 집권하지 않는 것으로 족했다. 진정 자유와 민주에 반하는 권위와 서열은 여전히 남아 있었는데 이를 지적하며 상호 평등을 부르짖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억눌려 왔던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며 장애인과 성 소수자, 이민자(대표적으로 중화민국 국적의 화교)들도 권익을 추구하고자 나섰지만 '까라면 까'로 점철된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이익을 외치는 이는 개인주의자가 아니라 이기주의자로 낙인찍혀 반사회분자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애초에 모든 사람이 양반의 후손인 나라가 존재할 수가 없건만, 대부분이 족보를 매입하여 특정 집안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기는커녕 '동성동본 혼인 금지'란 실로 '구시대/유교 이데올로기'적인 법안이 90년대까지 효력을 발휘했으며, 결혼으로 꾸려진 가정만이 진짜 가정이고 '정상 가정'이라는 환상 하에 개인의 자유로운 성관계를 국가가 통제했던 '혼인빙자간음죄'가 2009년이 되어서야 위헌 판결을 받았다.


또한 아무리 IMF 사태로 노동 불안정화가 심해졌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권위 및 수직적 서열주의가 타파되지는 않았다. 국내 기업의 90%를 차지한다는 중소기업에선 여전히 사람을 갈아넣지 못해 안달이고, 이는 대기업도 그리 다르지 않다. '돈은 최대한 적게 주고 높은 효율을 얻는다', '만약 누군가가 볼멘소리를 하면 돈만 많이 주면 된다'는 이런 인식이 한국의 기업가에게는 당연하다. 그러니 중소기업에서는 실임금이 최저 임금에도 못 미치는 돈을 주며 청년들을 생존의 영역으로 내몰고, 이에 자산 형성 의지를 상실한 그들은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거나 필수적인 영역(식비)에서의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이고 관계 형성도 포기한 채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 이들에게 닥친 현실은 '서울 공화국'. 5-60만 원대의 월세를 감당하며 실임금 200만 원이 안 되는 급여로 살아가야 하는 청년들이 무슨 연애고 결혼을 꿈꾸랴? 그저 그것은 있는 자들의 전유물이 된 지 오래일 뿐이다.


이는 비단 청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연한 기회로 기득권층에 진입한 소수를 제외한 절대 다수의 중장년층과 노년층도 경제적으로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다. 그렇게 근면과 성실을 강조해 왔던 한국 사회가 왜 노인 빈곤율 1위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는가? 이는 그 근면과 성실이 허상임을 드러내는 단적인 예시다. 폐지 주워 하루에 일이천 원으로 살아가는 이들, 정부의 지원금을 받지 못하면 월세도 못 내는 이들, 자식은 두세 명씩 낳았으나 독립을 못 하고 있어 그들을 부양해야 하는데 정작 부모도 살아 있어 그들까지 책임져야 하는 '6070(1960-70년대생) 세대'까지, 소수의 가진 자들을 제외하면 이 대한민국에선 그 어느 누구도 몸도 마음도 여유롭게 살아갈 수 없다.

그런데도 업주들은 말한다. 열심히 하라, 더 열심히 하라고.


어린아이들이 자라면서 '말'로 서열을 배우고 나이로 질서를 학습한다. 경어체가 지닌 가장 큰 폐단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등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인간은 자유로우며,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자유 및 민주주의의 근본 원칙을 '문화'로서 무력화하는 것이 바로 이 경어체 쳬계다. 나이가 많은 이에게, 직급이 높은 이에게 존대하고 그들을 우러르는 것이 어떻게 자유와 민주라는 개념에 부합할 수 있을까 싶지만, 이는 '문화가 체제를 쉽게 압도'하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씁쓸한 현실이다. 그가 나보다 직급이 높고 나이가 많다 하여 인간적 가치가 높고 중한 것이 아닌데, 한국 사회에서는 개개인 사이의 평등보다 서열과 이로 인한 차이가 더 중요하고 높은 가치를 부여받는다. 그러니 사소하게는 모임에서 '연소자'나 '하급자'가 수저와 물컵, 반찬 등을 상급자와 연장자에게 날라주는 기형적인 문화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대체 '연장자'와 '상급자'는 손이 없나 발이 없나? 자유주의 사회의 기본인 '자기책임주의'란 가장 일상적인 영역에서조차 본인의 일은 본인이 알아서 하는 것을 말하는데, 한국이란 서열 사회에서는 일찍 태어났다는 이유로, 먼저 상급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그렇지 못한 이들이 저들의 수발을 들어야 한다. 또한 상급자의 실수는 '그럴 수 있다'며 조용히 넘어가지만 하급자가 실수하면 마치 '조직의 원수' 또는 '역적'인 것처럼 대하는 건 무슨 이유에서인가? 조직의 상급자는 인간이 아닌가?

이런 문화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으니 여전히 기업의 총수 또는 대표자를 모든 임직원이 왕 대하듯 떠받들고, 군대라는 (불가피하게) 폐쇄적인 조직에서도 군대에서의 직급 체계와 일상에서의 관계가 구분되지 않아 각종 부조리가 횡행하는 것이다. 그 '왕들'은 누구의 통제를 받나? 그 어느 누가 감히 그들에게 철퇴를 가할 수 있으며, 함부로 그들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나? '무소불위'한 상급자, 그의 사소한 발언과 행동 하나하나가 조직 내 모든 '하급자'의 행동과 생각까지 통제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한국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서열과 권위에 통제받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가 이뤄질 수 있겠는가? 그런 게 가능하다면 다른 게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기적이다.


종교적 질서가 오랜 시간 군림했던 유럽과 미국 사회. 비록 양차의 대전(大戰)을 겪었다지만 군주정 시대의 귀족제가 자연스럽게 사회 계층으로 이행된 이 사회, 자본가가 거대 자본을 축적하여 전 세계적 영향력을 끼칠 힘을 지닌 이 사회에서는 1960년대 후반, 반전(反戰)의 물결을 타고 사회적으로 대대적인 의식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이 100% 성공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서구와 미국 사회에 끼친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곳에서는 자신이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해도, 대부호 가문의 수장 또는 일원이라 해도 타인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며, 대놓고 차별적인 언사를 하다가는 온 사회의 포화를 받는다. 저 의식 개혁 운동이란 곧 반(反)권위주의 운동이었고, 반서열주의 운동이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평등주의 운동'이었다. 인간의 삶의 수준이 완전히 균일해야 한다는 의미의 평등이 아니라, 인간 존재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어떤 고하(高下)도 없다는 그런 평등 말이다.

그렇다고 서양 사회가 그렇게 이상적이고 또 평등하냐? 그건 아니다. 횡행하는 인종 차별을 어찌하지 못하고, 빈부 격차 또한 한국인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당연히 환상이 강하면 실망도 큰 법. 하지만 적어도 한국의 현실을 놓고 보면, 교수를 그냥 성씨나 이름으로 칭하는 학생, 심지어 상대방이 대통령이라도 친구 만나듯 웃으며 악수를 하고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누가 국회의원이건 시장이건 도지사건 간에 별로 개의치 않는 사람들까지…. 그들에게 '권위'는 그냥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일 뿐, 지금 내 삶에, 내 생활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 요소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나와 내 삶'이지 '나에게 영향을 끼칠지도 모를 권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 여전히 권위와 서열이 중요하다. 그런 이유로 권위자 또는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은 의전(儀典)에 목을 맨다. 이는 한 인간이 어떤 존재냐가 아니라 그 인간이 어떤 자리에 있느냐를 우선시함에 따른 결과다.

비록 민주화로 인해 권위를 전처럼 대하는 사람들은 꽤나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서열과 권위는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사람들의 의식을 장악해 왔다. 엄밀히 말해 서열이 높은 이들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권력'을 휘둘러 나의 삶을 좌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두려운 것이나, 전통적으로 권위자가 권력을 잡아 이를 행사해 왔고, 오랜 시간 그 권위와 권력의 횡포에 노출되어 온 한국인은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도 저항과 투쟁보다는 순응과 무력함을 택했고, 이에 지친 이들이 인구 재생산을 통한 사회 유지를 포기한 채 높은 서열에 있는 이에 대한 굴종을 내면화했다. 이는 실로 사회적 차원의 모욕이자 비극이다. 오로지 서열과 권위, 그리고 힘을 가진 이들이 내세운 질서와 이에서 비롯된 통제만이 우위에 있는 이 사회에서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나서는 법을 배우지도 못했거니와, 문제 의식을 느끼고 스스로 이를 실천하려 한 이조차 '노예'가 되어 주인의 뜻에 동조하는 이들의 눈초리와 그 '주인들'의 철퇴로 결국 제 권익을 위한 싸움을 포기한 채 군중 속으로 사라지거나 아예 이 사회를 떠나는 쪽을 택하고 있다. 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 이런데도 정녕 한국 사회가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란 이유로, 파시즘 사회가 아니란 이유로 자유롭고 평등하고 정의로우며 각자가 제 권익을 충분히 요구하여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사회라고 할 수 있는가?


한국 사회는 후손들에게 중대하고 극히 해로운 악덕을 물려주었다. 그야말로 천박하고 저속한 사고가 계층을 막론하고 암덩이처럼 퍼져 있는 것이다. 한국인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아니, 인간은 비록 불평등할지라도 평등해야 한다는 의식조차 함양하지 못했고, 서열(직급)이 높으면 그렇지 않은 이를 어떻게 대해도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며, 가진 자들과 기득권적 사고에 동화하여 '불온한 생각'을 품은 이들을 감시하고 지탄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아직까지 수천 년 전 춘추 전국 시대에나 통용됐을 법한 하극상이란 말이 대중과 언론에서 쓰이고 있고, 저 '아랫사람'들은 오로지 '윗사람'의 심기와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자 자신의 의견이나 입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이러면 그 조직은 반드시 썩어 무너진다. 그러나 한국의 기성 세대, 특히 기득권층은 이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뿌리깊게 내린 보수성과 소극성은 현상 유지만을 지고지상한 가치라고 생각하게 하며, 유교적 질서와 경어체로 고착화된 사회·문화적 서열주의는 그들에게 천손만대 이어져야 할 금과옥조나 다름없다. 이런 나라에서 자라나는(또는 자라날) 아이·청소년과 막 사회로 나온 청년들이 제 꿈과 이상을 마음껏 펼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절이 문제면 바꾸어야 한다고 가르치기는커녕, 절이 싫으면 중이 나가라는 속담이 안 없어지고 아직도 쉽게 쓰이는 이런 나라에서?


이런 나라가 살 만하다고 하는 이들은, 국가주의자거나, 종교에 세뇌당했거나

돈이 많아 풍족한 삶을 누리는 부류일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언제 자살할지 모를 정도로 정신 상태가 불안한 이들이든가.




한국 사회는 몰락하고 있다. 집단주의의 지배 하에 개인 존재는 말살당해 왔고, 집단 내 서열이 집단 밖에서의 관계마저 규정하고 있다. 문화는 개인을 쉽게 압도한다지만, 한국의 경우 문화가 아예 국가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심에는 이 사회를 자신의 입맛대로 재단하려는 세력이 있다. 과거에 무슨 가치를 부르짖었든 이미 기득권을 지닌 이들은 자신들이 쥔 것을 놓지 않으려 한다. 그 기득권이 워낙 공고해지니 사람들은 오로지 돈만을 앞세우고, 그렇게 이익 앞에 그 어떤 가치라도 무력해진 지 오래다. 돈을 많이 번다는 이유로 유튜버가 희망 직업 1순위에 오른 나라인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이런 곳에는 선택지가 별로 없다. 노예처럼 순응하든지, 이민을 가든지, 아니면 목숨을 끊든지. 그 어느 하나 극단적이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이를 일러 '선택지'라고 부르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이런 나라에 태어나 힘겹게 살아왔으면서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도 못하고, 무엇이 문제인가 생각조차 않으려는 무비판적인 이들에게 분노한다. 이들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있다. 그들도 처음엔 이 악덕의 피해자였겠으나, 시간이 흐르며 점차 가해자로 바뀌어 후손들에게 좋은 나라와 사회를 물려주지 않고 감히 측정조차 할 수 없는 적폐를 떠넘기고 있다. 기득권층과 기성 세대가 이런 사실을 알 날이 올까?

그 누구보다 이런 변화 없는 경직되고 폐쇄적인 나라에서 앞으로 수십 년은 더 살아가야 할 나와 수많은 이들의 처지야말로 애처롭기 그지없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살아서 현 한국 사회를 보았다면, 그가 <안티크리스트>가 아닌 <안티코아>라는 책을 썼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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