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절감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한국 사람들이 권위에 너무 쉽게 순응한다는 점이다. 혼자 그러면 문제가 없으나, 스스로의 이런 행위를 합리화하는 것을 넘어 타인에게까지 이를 따르라 강요하기에 여기서부터 문제가 안 생길 수 없다. (사실상 유일한 권위체인) 정부에서 하라는 대로 하는 것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는데다 이를 따르지 않으면 죄인을 넘어 악인 취급하는 분위기가 '대한민국'이란 민주공화국이 실질적 국가로 수립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졌다는 것은 간과할 만한 사항이 아니다. 이는 한국 사회가 민주주의의 주요 원칙이란 '다수결의 원리'에 그 특유의 집단주의가 더해질 경우 그것만으로 스스로가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얼마든 전체주의적인 곳으로 변모할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예시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30년이 지나며 그간 민주주의에 대한 담론은 많이 진행되긴 했으나, 이것이 대개 (군부에서 비롯된) '보수세력 대 진보세력'이란 이분법적인 구조로 진행되면서 사실상 현실정치 영역을 제외한 일상과 개인의 영역에서는 민주주의의 적용을 논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는 점도 한국 사회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문제다. 냉정히 말해 현실정치의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은 민주화 이후 얼마간 진행하다 끝냈어야 했다. 즉 거시적 차원에서 민주화가 성공한 이상 미시적 차원의 민주화(일상, 문화, 사회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개인이나 집단 간에 발생하는 불균형이 수평을 이루도록 하는 차원의 민주화)에 대한 담론으로 이행해야 했으나, 김대중과 김영삼의 세력 다툼을 힘입어 어부지리로 노태우가 대통령이 된데다 김영삼이 '삼당 합당'을 주도하여 후임 대통령이 되면서 민주화를 주도한 다른 한 축인 비(非)김영삼계 세력 입장에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연이어 벌어졌고, 이로 인해 민주주의의 본의에 대해 논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특정 정치세력에 항거하거나 그들을 타도하는 것만이 민주주의의 전부라고만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는 동안 사회 분위기는 자본주의 일변도로 흘러 경제적 자유만이 지상가치가 됐고, 개인의 정치-사회-문화적 자유는 '정치 세력의 교체'라는 대의로 인해 뒷전으로 밀려났다. 거대 담론이 계속되는 한 이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러니 누군가가 개인의 자유를 외치면 얼핏 수용되는 듯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 공통 인식에 저촉됨'을 이유로 차단되고 마는 것이다(그러나 경제적 지위가 높은 이들은 늘 예외였다).
바이러스에의 대처를 두고 거의 모든 (특히 진보) 언론에서 부각한 것이 '시민성'이다. 즉 한국인은 시민적 의무감에 의거하여 공동체를 위해 정부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는 것으로, 이는 곧 사회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자유는 얼마든 제한될 수 있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시민'이라는 (실은 매우 자본주의적이면서도 자유주의적인) 개념에 '인간'을 가두었고, 그렇게 인간을 시민의 틀로 제한하여 판단하는 누를 범했다. 공산주의에서 '인민'과 '비(非)인민', 즉 공산주의 사회의 구성원 또는 공산주의에 찬동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이를 구분하여 전자는 신사회 건설의 주역으로, 후자는 타도 대상으로 삼은 것과 마찬가지로 코로나 시국의 한국 언론은 '시민성'을 기준으로 하여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이와 이에 부정적인 이를 구분했고, 그렇게 전자는 시민으로, 후자는 (분명 시민임에도) 시민이 아닌 존재로 취급했다. 원래 시민이야말로 가장 자신의 이익과 자유를 중시하는 존재고, 그것은 역사적으로도 사실임에도 이것이 가진 자의 경제적 자유만을 부각시키며 사회의 폐단을 낳았다는 이유로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시민의 개념을 바꾸어버렸고, '위기 상황' 또는 '비상 시국'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자유민주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상 시민임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지침에 따라야만 '진정한 시민' 대우를 받는 웃지 못할 일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정치적 자유'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자본주의적 시민의 개념을 극복하고 자유주의적 시민의 개념을 새로이 제시한 이들의 후예가 되레 상황의 엄중함을 이유로 모든 개인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 주장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시민은 '사람'에 앞설 수 없으며, 시민이 인간의 본질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시민이란 개념은 사람보다 앞섰고,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당신이 생물학적으로 사람이냐 아니냐', 혹은 '당신이 도덕적이냐 아니냐'를 넘어 '당신이 시민이냐 아니냐'가 되고야 말았다. 당연히 (코로나 대유행에 따라) 사회에서 만들어 놓은 시민이라는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만이 참된 사람으로 대우받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심도 있는 논의 없이 급조된 개념으로 인해 차별과 배제의 논리가 너무나 쉽게 만연해졌고, '시민이 아닌 자'는 더 이상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생각할 리 만무하다. 얕잡아 보는 게 아니라, 모두가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란 뜻이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타인의 반응에 민감한 한국인이 속 편하게 "그냥 알아서 하자" 할 리도 없었으니, '바이러스'라는 대상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에 휩싸인 이상 군대에서처럼 일사불란히 움직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한국인이 지닌 특성이자 문제로 '보신주의'를 언급해 왔다. 내 한 몸 지키려는 사고가 상당히 강하다는 것이 그 내용으로, 무언가가 조금이라도 일신의 안녕을 저해하는 것으로 여겨질 경우 과도하리만치 방어적으로 대응한다는 의미다. 이는 코로나 시기의 한국인이 보인 반응을 보면 별 문제 없이 적중했고, 그런 의미로 한국인이 '코로나 시기'에 이렇게 군집 중심적 행태를 보인 것은 오히려 서양에서 (비판 내지 조롱 투로) 제기했던 '동양적 분위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나의 안녕이 저해될 상황이 찾아오자 이를 피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다 보니 그것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돌입하게 하면서 '나의 안녕을 저해할지 모를 저 사람의 입에 마스크를 씌워라'라는 분위기를 형성하기에 이르렀고, 여기에다 너무나 오랫동안 (정치적) 제약을 받아왔던 것이 더해지면서 모든 이가 정부와 전문가가 주문하고 대중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고 봄이 합리적인 듯하다. 왕조 시대가 종결되었으나 그것이 외세에 의했고, 게다가 그 외세가 군국주의를 기반으로 했기에 독립적으로 살아간다는 건 불가능했으며, 해방 이후 원치 않게 반으로 줄어든 국토만큼이나 인식의 폭도 제한됐기에 아무리 (제도적 의미의) 민주화가 이룩됐다 한들 이미 의식화된 집단적 행동 양식을 쉽게 걷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위기'가 생기면 일괄적으로 대응했던 역사를 보더라도 위기 극복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이를 가만히 둘 리가 없다. 서양적이고 동양적인 특성이 분명 있기는 하나, 그렇게 따지면 서양도 민주공화정이 보편화되기까지 천 년 이상 왕조 지배를 받았는데 거기라고 대응 방식이 크게 다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방역에의 대응이 단순히 동서양의 차이에서 기인했다고 뭉뚱그려 표현하는 것보다는 한국의 역사-사회적 배경이 이러한 방식을 택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다고 봄이 타당하다 생각한다. 그러니 서양에서 개별적인 맥락을 무시하고 단순히 '동양적인 이유 때문'이라고만 판단한 것은,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맞는 말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문제는 마스크 착용을 정책 또는 사회적으로 강제하는 나라가 죄다 동아시아 지역에 몰려 있다는 점...).
'내 주변 사람은 다 갑(甲) 당 대통령 후보를 찍었는데 왜 을(乙) 당 후보가 당선됐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지만, 뭔가 주변을 비롯하여 사회 분위기를 보면 '언제까지 이러고 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은 듯하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시행한 지 꼬박 2년이 넘어서야 끝이 났지만, 아직까지도 마스크 강제 조치는 이어지고 있으며, 그렇다고 확진자가 안 나오는 것도 아니니(나로서는 늘 얘기하지만, 확진자가 안 나오는 것을 방역의 목표로 두면 해결되는 것 없이 다 망한다) 이렇게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마스크는 열심히 쓴다. 왜냐? 일단 정부에서 하라고 하니 그러는 것이고, 워낙 오랫동안 써 와서 습관이 됐기에 그런 것인데, 첫 번째 이유인 '정부에서 하라고 하니 한다'는 것은 맨 위에 언급했듯 권위에 쉽게 순응하는 면모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인 '워낙 오랫동안 써 와서 습관이 돼서 그런다'는 것은 순전히 습관이 돼서 그런 것도 있으나, 의외로 '벗고 싶어도 사람들이 너무 안 벗으니 못 벗겠다'는 이유 때문인 경우가 많다. 아무리 습관이 됐다 한들 얼굴에 뭔가를 덮어쓰는 것이 습관이 되기란 어렵다. 그런데 이게 정말 습관이 됐단 건 한국인이 '한 가치를 집단적으로 내면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와 자기책임주의가 적용되는 사회는 절대 다수가 '단일한 가치'에 의거하여 공통된 습성이나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은 말로만 개인주의를 외칠 뿐, 어제나 오늘이나 여전히 관계성을 필두로 한 집단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주말 고교 동창 몇 명을 만나 밥을 먹으러 갔다. 물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마스크를 벗고 있던 이들이, 배식구에 음식이 나오자 도로 마스크를 쓴 채로 음식을 받아 오더라. "뭐 하러 그러냐" 물었더니, "최소한의 예의"란 답이 돌아왔다. 여기에서도 어이가 없었는데, 자리에 앉아 하는 말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라는 것이었다. 재차 어이가 없었다. 이미 부질없다고 생각하면서 예의를 운운한다는 것은 사안은 부당함에도 그저 체면치레를 하는 것밖에는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닌가? 분명 방역 및 강제 조치 지속을 외치는 이들이 적지는 않지만, 전반적으로는 이러한 모순적인 삶에 대한 회의감이 만연한 것이 현실인 듯한데, 그렇다면 아무리 정부에서 하라고 했다 한들 무의미함 또는 부당함을 이유로 거부하거나 저항할 수 있어야 함에도 그리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 다수의 한국인에게 '권위의 적용'을 쉽게 이겨내려 하지 않는 속성이 있음이 증명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마스크 착용의 무의미함을 오미크론 대유행 시기의 확진자 수를 들며 이야기해도 '그나마 마스크를 썼으니 그 정도'라 말하는 이들은, 그 시기 한국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확진자가 나왔다는 것마저 '마스크 덕분'이라고 생각하나 싶다. 그리고 감염자에 대해서도, 마스크 만능론자의 논리에 의하면 마스크를 열심히 안 썼으니 감염된 것이나 마찬가진데, 그렇게 따지면 공식적으로 1800만 명이 넘는 감염자가 죄다 제대로 마스크를 안 써서 그리 됐다는 말이니 이 얼마나 앞뒤가 안 맞는 말인지? 사실로 지적을 해도, 한 번 마스크 착용의 효용성을 신뢰를 넘어 신봉하게 된 이들은 이에 제기되는 그 어떠한 의문도 거부한 채 평생 마스크가 그 어떤 질병도 다 막아준다는 믿음에 빠져 살아간다. 나는 이를 집단논리의 내면화가 아닌 다른 것으로는 도무지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래 봐서 안다. 마스크만 쓰면 감염이 안 되는 줄 알았고 엄청 열심히 쓰고 다녔으며 대인 접촉도 최소화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지역사회로의 감염 확산이 만연해져 언제 어디서 감염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됐을 때조차 나와 우리 가족은 단 한 명도 걸리지 않았고, 오히려 조심에 조심을 거듭한 주변 지인은 걸리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이를 단지 '그가 제대로 방역 수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바보 멍청이다. 반례가 뻔히 존재하는데 이를 무시한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처사인지.
우연히 한 유튜브 영상을 보았다. 미국의 한 법학대학 교수가 은퇴 시기를 맞이하여 마지막 강의를 하고 나오는 길, 학생들은 교실 앞부터 줄을 서 박수를 치며 교수의 학교에서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감동적인 내용의 이 영상에서 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유감스럽게도 '절대 다수'가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써 봤자 한두 명 정도였고, 마스크를 썼든 안 썼든 상관없이 교수에게 박수를 보내며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만약 한국에서 이런 영상이 올라온다? 애초에 그럴 일도 없겠지만, 그럴 경우 난리가 났을 거다. 왜 방역 수칙을 지키지 않느냐며, 아직도 확진자가 '만 명 가까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며 비난에 비난을 거듭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본 영상의 학생들은 '공동체 지향적인 시민'이란 좁은 개념에 갇힌 존재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수강생으로서, 제자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마지막 강의를 마친 교수를 배웅했을 뿐이었다. 마스크 착용 여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내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고, 이에 의거하여 수십 년간 교단에 서 온 이에게 격려와 고마움을 표하는 것이지 다른 게 아니었다. 그들에게 인간 존중의 정신이 없었다면 교수가 퇴임하건 말건 신경도 안 썼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그를 배웅했다. 이런 이들에게 "당신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았으니 타인에 대한 배려심도 존중도 없고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기주의자다."라고 할 것인가? 진짜 그렇게 말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뭔가 정신이 잘못되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있나 싶다. 그런 사람들이 (예를 들어)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성'을 운운하면서도 정작 '한국적 특성' 또는 '한국의 상황'을 이유로 보편성을 무시할 것을 생각하면 짜증이 난다. 일관적인 것도 일관적이어야 할 때 그래야지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일관적이면 그건 고집을 넘어 아집과 독선이다. 내가 보기에는 방역 2년 반을 넘긴 이 시점에까지 한국인은 여전히 아집과 독선에 차 있다. 만약 그렇지 않음에도 이렇게까지 해 온 것이라면, 이는 그들이 다수 논리로 정해진 규범을 두려워하는 수동적 존재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방역에 대한 자세는 한국인의 집단성이 드러난 사안의 '일부'일 뿐이다. 한국인의 집단성은 특히 가족 사이에서 강하게 발현된다. 뭘 해도 가족끼리 해야 하는 이른바 '가족주의'가 이에 해당한다. 혼자 뭘 사 와서 먹거나, 집에서 먼저 식사를 하면 '가족끼리 같이 먹지 왜 혼자 먹느냐'며 갖은 핀잔을 들어야 한다. 그나마 '쿨한' 가정이 늘어 이 정도까진 아니라 해도 여전히 가족끼리 서로를 챙기는 것과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행동하고 사고하는 것은 어느 정도 별개임에도 이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한 사람들이 한국인이다. 서양이라고 가족주의가 없는 게 아니다. 오히려 상당히 강한 편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또 일방적으로 가족을 위해 뭔가를 포기해야 하거나 가족에 의해 뭔가가 강제되는 분위기는 아니다. 모두가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되, 독립성은 기본적으로 보장된다. 한국처럼 부모의 눈에 뭐만 거슬리면 금지되는 식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 무엇보다 집단주의가 야기하는 한국 가정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종교나 정치 사상을 강요하는 것이다. 제사를 지내기 싫은 자녀를 '감히 조상님을 모시지 않으려 든다'는 이유로 크게 꾸짖고, 부모와 같은 종교를 갖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옥 운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만 봐도 한국인의 집단성이 얼마나 미시적이고 기초적인 영역(단위)에서부터 발현되는지가 드러난다.
다른 나라를 예를 들자면, 미국 전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는 강경 보수주의자로서 기독교 윤리를 매우 중시하는 모습을 보이지만(내가 볼땐 '척'하는 것이다) 정작 본인은 두 차례 이혼하고 세 번 결혼하였으며, 자녀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훈육해야 했음에도 장녀 이방카가 쿠슈너와 결혼하도록 했다. 이게 뭐가 문제냐면, 그의 사위 쿠슈너는 다름아닌 유대인으로, 유대인과 결혼하려면 유대교로 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 트럼프는 '인류의 구원자'인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 신자에게 딸을 시집 보내 유대교로 개종하게 한, 기독교적으로 보면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임에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딸이 선택한 대로 하게 두었다. 한국인이야 종교에 별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이른바 '독실하고 경건한 한국/미국 기독교인'이 보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건 미국이 개인주의에 의거하여 개인의 선택을 온전히, 심지어는 무관심해 보일 정도로 철저히 존중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부모가 과연 이렇게 자녀를 키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애초에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결혼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기는 것부터가 전혀 개인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아닌데다 전통 또는 종교에 충실한 한국인 부모라면 자녀가 제사 참여를 거부하거나, 종교를 버리겠다 선언하는 것은 고사하고 특정 요일에 종교 시설에 출석하는/하지 않는 것조차 결코 용인하지 않을 테니, 개인의 선택이 그렇게 번번이 퇴색되는 건 너무나 뻔한 일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는 여전히 구태 방역 체계를 고집하는 방역 당국과 그 관계자들, 그리고 이를 유지할 것을 역설하는 전문가 집단마저도 '한국적 특성'을 벗어나지 못했기에 그렇게 생각했고 말했으며 판단했다고 본다. 대중이야 말할 것도 없다. 이는 많이 배우고 못 배우고의 차이가 아니라, 모두가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 온 한국인이기 때문에 보이는 모습이다. 개별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독립적이라 하지 않고 '나댄다'거나 '튄다'고 말해 온 것부터, 아니, 이런 말이 있어서 사용돼 왔다는 것부터 집단적 대응은 예견된 것이었다.
한국인이 한국인답게 사는 게 뭐가 문제냐고 말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한국인이 중국인처럼 살 수는 없고, 러시아 사람처럼, 투르크메니스탄 사람이나 루마니아, 독일, 프랑스, 알제리, 튀니지 사람처럼 살 수는 더더욱 없다. 그러나 스스로의 면모에 문제가 있음에도 이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거나, 이것이 문제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음에도 스스로의 인식에 갇혀 이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이는 한국인이 한국인으로 사는 문제와는 별개로 '폭탄'을 안고 사는 것과 진배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한국인은 역사적으로 집단적 대응을 통해 위기를 극복해 왔다고 배웠기에 그것만이 미덕인 줄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집단 논리에 편승조차 하지 않으면 그 집단에서 존속할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 어떤 강요도 없이 한반도에 살았던 모든 이들이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했다고만 생각한다면, 앞으로 그 어떤 문제가 생겨도 오로지 대의명분만을 들먹이며 개인의 희생은 본 체도 안 할 것이다. 그런 사회는 자유사회도 민주사회도 아니다. 그저 집단논리만이 횡행하는 전체주의 사회다. 나는 한국인이 '한국적 특성'을 버렸으면 좋겠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제가 되는 한국적 특성'은 과감히 내던졌으면 좋겠다. 그래야만 이 나라의 의식 수준이 진일보할 수 있다. 단순히 '모두의 문제'를 해결하자며 일방적이고 일률적인 조치만을 강제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가능한 한 모든 이가 '공론장'에 나아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때 비로소 문제 해결의 첫걸음을 뗄 수 있음을 기억하자. 사태를 해결하겠단 이유로 이런 식의 '묻지마 정책'을 시행하고, 이에 호응하여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따르라'고만 하는 것은 그야말로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워먹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음을 명심하자. 과감해져야 한다. 부당한 것은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두고 '개소리'한다고 비난하거나 조롱해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사회야말로 살아 있는 사회며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다. 그러나 한국은 한 가지 목소리만이 관철되고 동일한 행동이 취해지길 '다수'가 바란다는 점에서 아직 획일적인 사회를 벗어나지 못했다.
예측컨대 이번 코로나 사태(와 이에 대한 대처)는 한국 사회가 '하나'만을 중시하는 사회로 남을 것인지, 선택을 허하는 사회로 이행할 것인지의 분수령이 될 것이다. 그 몫은, 한국 사회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