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공화국, 한국
이 불명예스런 별명을 대체 언제쯤에야 떨쳐버릴 수 있을까?
최근 마지막으로 외출한 날이 6월 20일이었다. 나가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줄곧 비가 와서 그러지 못했고, 그후 맑은 날이 며칠 이어지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타오르는 태양빛을 정면으로 맞고 싶지도, 그것이 달궈놓은 지면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시내 구경'을 하고픈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2주 넘게 집에 있었다. 그러다 어제 친구가 오늘 보지 않겠느냐고 연락을 해 와서 모처럼 시내에 나왔다. 오전에는 해가 나더니 시간이 갈수록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그나마 나았다.
외출하려 문을 잠그고 나오자마자 곧바로 불편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마스크를 챙기지 않았다는 것. 대중교통 없이는 '외부 세계'로 통할 수 없는 내게 마스크는 더더욱 없어서는 안 되는 물품이다. 차라리 시내에 살았더라면 걸어서 다니면 되니 별 문제는 없었겠지만, 변두리에 사는 이상, 내 차가 없으면 감히 대중교통에 탑승할 마음조차 품으면 안 됨을 너무나 잘 알기에 도로 문을 열고 마스크를 챙겨 나왔다. 종종 있는 일이지만, 그때마다 불편함을 감출 수 없다. '이런 세상'에서는 나의 부주의함을 탓해야겠지만, 마스크가 (집에 있는 것을 제외한) 모든 활동의 자격 조건인 세상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 이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만큼 상황이 심각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매번 한숨이 나온다.
그런 이유로인지는 몰라도, 외부 세계로 나가는 것은 많은 것이 제한되어 있는 환경에 사는 내게는 퍽 즐거운 일이나, 막상 바깥으로 나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답답한 마음이 절로 든다.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며 다니는 이들. 이렇게 사는 게 좋은 거라 생각지는 않을 텐데도 여전히 많은 이가 별다른 생각 없이 하던 대로 하며 살아가고 있다. 전이나 지금이나 스스로의 의지로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은 다수겠지만, 언젠가부터 그 자발성 위에 정부의 행정명령이 더해지며 사람들은 어디까지가 나의 의지고 어디까지가 정부의 강제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게 됐다. 뭐, 이런 구분이 무의미해진 지는 이미 오래다. 어차피 마스크를 써야만 하는 것은 똑같으니까. 그렇게 사람들은 이를 '어쩔 수 없는 현실', '주어진 상황'으로 받아들이며 매일 주어지는 하루를 어제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보내고 있다.
시내에 근접하여 내릴 즈음, 버스 기사는 마스크를 깜빡하고 착용하지 않은 노인이 이를 인지하고 착용할 때까지 문을 열지 않았다. 그 노인은 도대체 무슨 영문인가 싶어 당황했으나, 가만히 있던 기사는 조금 지나서야 마스크를 쓰라는 손짓을 했고, 그제서야 노인은 '아차' 싶었는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기사가 하라는 대로 했다. 이것부터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식사 후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다 별 생각 없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채로 나와 물을 사려는 내게 직원이 마스크 착용을 요구한 것도 영 탐탁지 않았다. 이렇게 행정명령 이행에 불성실했던 그 노인과 나의 행위를 교정하려는 그들이 못마땅해 보이는 것은, 일변 순전히 나의 심지가 뒤틀려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은 단지 그들에게 주어진 의무를 이행했거나 스스로에게 부여됐다 여긴 권한을 행사했을 뿐인데 말이다. 하지만 2년을 넘게 '확진자 0명' 달성이란 허황된 목표를 이루겠다며, '최후의 보루'라는 이유로 마스크 착용을 강제하는 방역 당국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모두의 이익을 고려할 때, 그리고 바이러스가 이미 지역사회에 만연해졌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매우 비합리적인 처사가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그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도의적으로 잘못되었다 한들, 정책의 부당함을 이유로 내 의지대로 행동하겠다 하는 것이 그렇게 문제인가 하는 의문과, 이를 생각지도 않고는 그저 하라는 대로 하라는 이들, 최종적으로는 아무 의문 없이 그렇게 하는 '한국인'에 대한 의문에 이르는 것이 그저 틀리기만 한 생각일까?
현실적으로 일상의 회복은 '이러한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바이러스 전파를 결코 차단할 수 없으며, 당연히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도 없다는 현실 말이다. 만약 정부에서 이를 인식하고 수용한다면 더 이상의 통제 조치와 방역은 진행되지 않고 곧 중단 수순을 밟게 되겠지. 물론 방역을 끝까지(=확진자가 나오지 않는 상황까지)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는 나를 일러 이기적이라고, 또 함부로 입을 놀린다며 비난할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누차 강조하건대 한국 정부는, 그리고 그들의 방역은 결코 한국 사회에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일상을 회복시켜주지 못한다. 이는 비단 한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과 중화민국(대만) 정부가 아무리 방역을 지속하며 마스크 착용을 강제하고, 중국(대륙) 정부가 제로 코로나란 목표를 위해 지역 봉쇄를 거듭한다고 해도 바이러스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일본에서는 마스크 착용이 권고임에도 '시기상조론'을 들먹이며 착용 필요성을 역설할 필요도, 차이잉원 총통이 '방역 모범국'이란 타이틀을 지키기 위해 방역에 총력을 기울일 필요도, 시진핑 주석이 본인이 홍콩에 방문했을 때 동행했던 현지의 한 입법의원이 감염자임을 알고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바이러스는 반드시 약화된다는 것과, 방역이 장기화되면 이에는 반드시 구멍이 생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거나 간과하여 동아시아 지역이 지구에서 유일한 방역 최장기 지속 지역이 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덕분에 이제 일상은 이제 개개인이 되찾아야 하는 것이 됐으므로 모두가 이를 깨닫고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일만 남았는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이를 줄곧 거부해 왔다. 왜냐, 모두가 '확증'을 원하기 때문이다. 무슨 확증이냐, 더 이상 모두가 바이러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공식적인 증표, 즉 종식 선언 말이다. 국지 종식 선언은 개별 정부, 전 세계적 종식 선언은 국제보건기구에서나 할 수 있는 행위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아무리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없고, 감염의 확산은 바이러스 토착화라는 관점에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사항이기에 확진자 수에 신경을 쓸 필요도 이유도 없다는 의견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정부의 집계가 '0'이란 숫자에 이름으로써 사태 종식이 선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러고 있는데 일상이 회복될 리가.
이런 이유로 나는 사람들의 마스크에 대한 집착에 울분을 느끼는 지경에 이른 지 좀 됐다. 감염에 대한 공포는 '정부의 합당한 역할'과 '위기 상황에 대한 시민의 의무'라는 미명으로 포장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일률적인 행동을 강요하는 근거가 됐고, 그것이 3년 가까이 한국이 여전히 진정한 의미의 일상 회복에 다가서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크고 또 제일가는 요인이라는 사실은 철저히 외면 또는 무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방역은 올해를 넘어 내년까지 진행될 공산이 크다. 안 그래도 '언제까지 마스크를 써야 하느냐'며 답답함을 호소하는 친구에게 그랬다. 최소한 한국의 방역은 내년 봄까지는 지속될 거라고. 지난 3월, 동시기 세계 최다 확진자 발생이란 대단한 상황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확진자 수치가 '2만 명'에 육박했다는 기사가 속보로 쏟아지는 현 사회의 모습을 고려할 때 아마 이 전망은 크게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한 번 동력을 제공하면 영원히 작동된다는 '영구기관'을 만드려는 것마냥, 달성할 수 없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언제까지 정부에서 무의미한 숫자놀음을 계속할지 모르겠다는 것과, 그 숫자놀음에 현혹되어 이게 어마어마하게 심각한 일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다수를 점하고 있다는 현실은 하루도 빠짐없이 날 절망스럽게 한다. 사람 살리겠다고 인격을 무시하고 개인의 존엄을 훼손하는 사회가 정상일까? 서로가 감염을 이유로 서로를 의심하고 불신하며, 상대방의 존재(호흡)만으로도 위협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타인의 행동에 '정부 지침'을 이유로 2년 넘게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것이 과연 합당할까? 그것은 잘못됐다고, 즉각 시정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을 두고 '목소리 크게 낸다'며 비난하고, 그냥 받아들이고 살라 말하는 것이,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자본주의의 심화 이면에는 체제로부터 밀려나 빈곤에 시달리는 수많은 이들이 있고, 학력주의와 능력주의가 이룩한 성과 뒤에는 무능력자로 낙인 찍혀 소외된 이들과 심지어 이를 이겨내지 못해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이 적잖게 있음에도 이는 '받아들여야 할 냉혹한 현실'이라며 해결할 수 없다 말하는 이들이, 해결할 수 없는 바이러스 확산이라는 문제에는 왜, 무엇을 위해 그리도 골몰하고 집착하는 것일까?
집으로 가는 길,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버스에 올랐다. 나 또한 '거부당하지 않고자' 그 대열에 합류했다. 역시나 버스는 마스크를 착용한 이들로(만) 가득했다. 그들은 대부분 교복을 입은 십대 학생이었다. 안 그래도 부모가, 교사가, 궁극적으로는 사회가 하라는 대로 하며 자라는 한국의 청소년들이, 개인의 선택이어야 할, 진작 그래도 됐을 마스크 착용까지도 '하라는 대로' 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가 않았다. 나라고 규범에 충실하지 않게 살아욌을까? 천만의 말씀. 개인적으로는 최선을 다해 사회에서 하라는 대로 살았다. 그러나 그렇게 산 결과,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이의를 제기하기에는 너무 늦었음을 깨달았을 뿐이다. 정답만을 강요하는 사회, 그리하여 개별자의 답은 유효하지 않은 사회에서 다른 의견은 제기된다 한들 무시와 조롱의 대상이 됨을 절감하기에, 하라는 것에 익숙해진 이 아이들이 앞으로도 자신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갈 이 한국이라는 나라와 그 사회가 이들을 앞으로 얼마나 얽맬지가 보여 안타까웠다. 마스크 하나에 별의별 감정을 느낀다니, 내가 생각해도 웃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사실에 서글프다. 도대체 이 사회는 왜 이렇게까지 하나의 행동, 하나의 생각만을 요구하지 못해 안달인가 싶어서 말이다.
나는 방역에 관해 비판적인 관점의 글을 여러 편 게재했다. 아마 내 브런치 글 목록을 보는 사람들 중에는 이 사람이 왜 이렇게까지 이에 집착하나 싶은 이도 있을 것이고, 뭘 그렇게 유난을 떠느냐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뭐, 그렇게 생각하는 이는 아예 접속조차 하지 않을 것이란 추측이 더욱 합리적이겠으나, 나조차도 내가 왜 이렇게 방역에 반대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뭐 하러 다수는 동의하지도 않는 마스크 착용 강제 해제를 외치나 싶다. 더군다나 난 아무런 사회적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그저 일개 인간으로, 내 목소리는 글과 말이 범람하는 이 시대, 세상에서는 쉽게 묻힐 것임을 잘 안다. 그러니 지치고 힘겨울 수밖에. 그럼에도 나는 나의 생각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은 비록 부정적인 관점과 감정으로 가득하고, 누가 보기에도 피곤한 내용 투성이일지라도, 나는 하나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건 틀렸다'고 말하려 한다. '강요된 배려'란 말도 안 되는 개념을 입에 담고, '예의'라는 터무니없는 관점으로 보건에 있어 개인의 선택이어야 할 마스크 착용을 어떻게든 강요하려 드는 이들에게 계란으로 바위 치는 꼴이라도 역설하려 한다. '당신들의 그 아집을 부디 벗어던지라'고, '당신들이 말하는 의무와, 당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시민성'에 모든 사람을, 적어도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끼워맞추려 들지 말라'고.
한국 사회는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강제되어온 일원주의로 인해 크게 병들어 있다. 그런데 눈 위에 서리 더하듯 방역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또 누군가를 평가·판단하고 있다. 이건 정말 잘못됐다. 과학을 말하면서 오히려 과학을 무시하는 사회, 개인의 판단에 근거하지 않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여 행동하는 사회는 결코 바람직한 곳이 아니다. 최소한 내년 초까지 방역과 강제 조치가 진행될 것이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암울한 전망을 제시하긴 했지만, 부디 그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정부가 문제를 깨닫고 생각과 방침을 바꾸길 바랄 뿐이다. 방역은 한국과 그 인접국이나 계속하는 유별난 짓임을, 그리고 그 방역이 결코 우리에게 그토록 모두가 바라온 2020년 이전의 일상을 되돌려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미 패배한 전쟁임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만의 사투를 벌이는 한국 정부와, 자신들의 지식을 신봉하여 현실을 보지 않고 되레 무의미한 싸움을 부추기는 '전문가 집단', 그리고 그에 동조하여 방역과 통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을 배제하려 하고, 한편으로는 비상시를 이유로 자유의 가치를 마구 훼손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히 요구하는 바다. 부디 방역의 늪에서, 마스크 공화국에서 빠져나오라. 이 길이야말로 분명 우리 모두가 진정 원하고 그려왔던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이를 위해선 신속하고 과감한 결단이 절실히 요구된다. 일상 회복을 진정 바라는 이라면 그 누구도 이를 미뤄선 안 된다. '전향적인 입장'을 보일 때가 바로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