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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Aug 16. 2022

코로나 방역과 통제, 당장 중단하라.

방역으로 흥한 나라, 방역으로 망한다.

더 이상 방역과 관련하여 아무 글도 쓰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모두가 의문 던지기를 포기한 사회에서 소수를 자처한다는 것이 너무나 절망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답답함을 넘어 울분이 쌓여 미칠 지경이었다. 가족마저도 내가 방역에 과하게 반응한다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나 외의 다른 이들이 지나치게 둔감해져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뭐가 문제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하다. 이것이 내가 다시 자판을 두드리게 된 이유다


특권층이 아닌 이상에야 소수는 그들이 소수라는 이유로 어느 사회에서든 외면당한다. 다만 인식이 변화하여 그 소수의 목소리와 담론이 다수의 것으로 확대될 만하다는 여론이 형성될 때 비로소 소수는 다수의 지지를 받아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낸다.

그렇다. 방역 중단을 역설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이 사회에서 여전히 수용되지 못하는 의견을 제기하는 소수자 취급을 받고 있다(차라리 소수자 취급이라도 받으면 천만다행이다). 그러니 그 의견이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보라. 사실상 한국과 중화민국(대만)만이 매일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확진자 및 사망자 수를 세고 있으며, 여기에 일본을 포함한 3개국 정도나 마스크 착용 여부로 일상 생활의 가부를 따지는 상황이다.

반면에 뒤늦게나마 인간이 바이러스 확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음을 깨달은 수많은 국가에서는 방역을 공식 중단하고 통제 조치도 전면 해제했다. 마스크 없이도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것에 전혀 문제가 없다. 아직도 방역과 통제를 저울질하는 지역이나 국가가 있긴 하나, 이는 그들이 아직까지도 '인간의 힘으로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습관적 사고 방식에서 빠져나오지 못함을 드러내는 사례일 뿐이다.


한국과 대만에는 바이러스 유행 초기에 서방에게서 '방역 모범국'이란 찬사를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거의 만 3년 가까이 방역과 통제를 지속하는 사실상 유이()한 국가란 점도 같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 명확하다. 두 나라가 '방역 모범국'이란 칭호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기 강박에 휩싸여 있다는 점로, 다시 말해 방역 모범국이란 칭호를 잃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자국을 방역의 늪으로 몰아넣는 무의미하고도 우둔한 처사를 무려 3년 동안이나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거의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비로소 (진정한 의미로)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공존을 택한 현 시점에서,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국민을 통제하려는 것인지 모르겠고, 국민들은 공식적으로 집계된 확진자만 2140만 명이 넘은 시점까지도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서로를 감시하고 통제하려 드는지 모르겠다. 마스크 그까짓 것이 뭐라고, '코로나 사태가 종식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여전히 타인의 입과 코를 가리려 드는 것일까? 이 정도 됐으면 깨닫는 게 있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자기반성도, 진지한 고찰도 없다.


점점 국외에서 촬영하는 방송 프로그램, 해외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영상과 사진 속 람들 보면 모두가 맨얼굴이다. 그들은 그 어떤 방해물 없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함께 웃고 떠들며 낯선 세상을 즐거움과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이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정상적인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감염이 염려되는 사람은 자발적으로 마스크를 쓸 뿐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그게 현실인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이곳에서는 마스크 착용이 금과옥조이자 절대법이다. 아직도 방역과 통제를 외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괴롭게 한다. 유행이 3년째에 접어들었음에도 아직도 그놈의 '공공성'을 들먹이며 개인과 집단의 자유를 난도질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보이는데, 난 방역의 부당함을 깨닫고 방역 옹호 입장에서 선회하였을 때부터 생각했다. 강요된 배려는 결코 배려가 아니라고. 배려가 법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배려가 아니다. 문제는, 한국인은 그렇게도 타인에 대한 배려를 외치면서, 배려의 진정한 가치'자율성(자발성)'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했다는 점이다.


방역 및 마스크 착용 강제를 옹호하는 이들의 논리는 한결같고 또 단순하다. 바이러스 전파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이므로 나쁘고, 바이러스 감염은 피감염자에게 고통을 선사하니 나쁘므로 마스크 착용과 격리는 강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겨우 바이러스 감염에 따른 고통을 피하자고 경제와 의료, 사회 근간 자체가 마비되는 결과를 기꺼니 받아들이자는 게 말이 되나? 이에 따른 차별과 배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생각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다. 코로나 하나에 모든 것이, 그것도 3년 동안이나 집중되는 게 과연 정상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저 감염 하나 피하자고 그 외의 모든 것을 포기하자고 말한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자기 중심적인지를 드러낼 뿐이다.


이런 사람들이 간과하는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더 이상 한국 사회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말에 모순이 있다고? 위에는 바이러스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썼으면서 이 단락에 이르러서는 왜 말을 바꾸느냐고?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는 이를 위해,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기업의 인식'과 연결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더 이상 한국의 기업은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을 이유로 직원들이 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감이 극에 달했을 때는 감염 자체가 죄악시됐고, 감염된 사람은 실로 죄인 된 심정으로 쉬어야 했다. 그럼 그가 하는 일은 미감염자 내지 기감염 후 재출근한 이에게 전가된다. 이런 업무 결손은 그나마 공포감 덕에 용인된 것인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바이러스 감염을 이유로 잠깐 일을 쉬는 것이 어려워진 분위기로 바뀌었다. 사실은 대부분이 알고 있는 것이다.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감이 어마어마하게 부풀려졌다는 것을. 인구의 5분의 2가 넘게 걸린 현 시점에서, 어떤 바이러스든 질병이든 간에 늘 그래왔듯 고령층 내지 지병을 지닌 이들에게나 위험할 정도지, 건강한 사람에게는 증상의 정도 차이만 있을 뿐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여 알게 되자 형식적으로는 방역과 통제를 따르면서도 속으로는 '이게 그렇게 심각한 건가?'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냉정히 말해 그게 맞는 처사다. 난 한국의 기업 문화에 중대한 문제 의식을 갖고 있고, 자본주의 사회가 그 어느 시대보다 인간을 강하게 착취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는 정말로 더 이상 인간에게 위협적이지 않다. 아프면 쉬는 게 맞는데 그걸 문제시하는 기형적 풍토가 자리잡은 게 한국이라 그렇지, 코로나 바이러스 자체 심각하게 대할 필요가 없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이미 대다수 기업에서는 이를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만 그놈의 눈치 문화와 집단주의가 '감염되면 쉬어야 한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게 했고, 이제는 '감염돼도 쉬지 못하겠다'는 인식을 형성한 것뿐이다. 결국 문제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무슨 일만 생기면 당사자를 매도하고 비난하는 한국 사회의 문화였던 셈이다.


과반 이상이 무증상 내지 경증 수준으로 지나치는 바이러스를, 오로지 감염 가능성만을 이유로 과잉 차단하려는 것은 명백히 몰지각한 처사다. 나는 전부터 '마스크의 효용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이들은 그냥 자발적으로 계속 쓰면 되고, 그게 정말 바이러스 차단에 효과가 있다면 바이러스 차단이 필요한 사람들만 열심히 쓰면 된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마스크를 신봉하는 이들은 '내가 마스크를 썼으니 안전하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하고 '남이 마스크를 쓰지 않으니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멍청한 사람들이 정작 감염되는 경로는 뻔하다. 모두가 마스크를 벗는 장소(=식당, 카페), 그리고 이다. 정작 본인들도 마스크를 '필요한 상황'임을 들어 벗으면서 도대체 누가 누구를 비난하는 것인가?

그리고 마스크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하루에 서너 장 정도는 일정 주기로 교체해서 사용해야 한다. 마스크는 착용과 동시에 외부 물질아니라 '나의 숨'으로 가장 먼저 오염되기 때문이다. 사실 마스크가 비위생적으로 변하는 건 그 누구보다 착용자 본인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라텍스 장갑을 낀 채로 마스크를 탈착하지 않으며, 그럴 때마다 알코홀 세정제를 바르지 않는다. 그럼 그 오염된 마스크로 인해 오히려 본인의 호흡기에 문제가 생기고, 마스크 자체가 감염원이 되는 문제가 생기며, 모두가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버려진 마스크를 처리하는 사람은 마스크를 써도 감염 위험에 상시 노출된다. 그래도 마스크가 바이러스를 막는 최고의 수단이라 떠들고 다닐 텐가?


나는 언젠가부터 모르는 사람을 만나기가 두렵다. 마스크 착용이 인간다움의 척도가 된 이래, 내가 나의 의지와 견해에 따라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려 해도 이미 강하게 형성된 사회적 분위기가 나를 짓누르고 있음을 알고, 절대 다수가 이에 영향을 받고 있기에 그런 나의 모습을 매우 이상하고 불쾌하게, 또한 바람직하지 않게 바라볼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정부의 지침에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이기주의자고, 마스크를 안 쓰려 하면 예의 없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이 나라를 얼마나 깊게 병들게 하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각계각층에 포진해 있다. 내가 그들을 만나 아무리 나의 입장을 설명한다 한들 그게 통할까? 유감스럽게도 한국 특유의 위계 문화가 이 빌어먹을 방역과 결합하여 어마어마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럴 리가 만무하다. 이러니 나는 이렇게 글로나마 나의 울분과 노여움을 풀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내가 스스로 절필을 선언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다.


난 아마 이런 글을 몇 번이고 계속 쓸 것이다. '방역에 대한 글은 이것으로 마지막이 될 것'이라던 몇 주 전의 단호함은 멀리 차 버릴 것이다. 더 이상 타인의 생각이나 행동이 잘못됐다며 함부로 지적하는 이 몹쓸 한국의 문화에 동참할 생각이 없으나, 누군가의 주의 주장이 내 생각과 행동을 강제하는 결과를 낳고 있는 이상, 나는 누가 뭐라 해도 싸울 것이다. 당장 내 주변 사람과 각계각층에 있는 이들에게, 궁극적으로는 방역 당국에 나의 주장을 관철시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이것이 나의 최선이라는 생각으로 자판 두드리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누가 먼저 지치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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