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산책 기록

by 따순밤


2025.4.1


오랜만에 걷는 밤 산책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걸어야지’ 생각만 하면서도,

집 밖으로 나서 두 발을 딛는 일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전날밤에 누적된 피로로 낮에 기절하듯 잠이 들었고 감기기운 있는 딸내미와 병원에 다녀왔다가 가족들 저녁을 차리고 집청소를 하고 났더니 벌써 하늘이 깜깜하다.


오늘은 걸으려고 했는데..


잠시 고민을 하다 날 위한 한 가지 일을 하고 싶었다.


오늘은 미루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문밖을 나서기까지 쉽지 않았고

썩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산책이 너무 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못 이기는 척 나서야 할 것 같아서 나갔다.

해도 해도 쌓이는 집안일과 공부와

여전히 쌓인 할 일들을 뒤로한 채

그렇게 시작된 산책이 참 신기하게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좋았다.

매일 하고 있었던 것처럼 익숙하게 자연스러웠고

제법 따듯한 밤공기가 부는 저녁시간대에 떠있는 예쁜 초승달을 보며 나오길 백번 잘했다고 생각하며 걸었다.


산책에 오디오북이 빠질 수 없지..

한쪽 귀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선

'남에게 좋은 사람보다 나에게 좋은 사람' 이라는 책을 오디오북으로 들으며 걸었다.

오디오북에서 흘러나오는 한 문장 한 문장이

마치 내 안에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씩 꿰매주듯,

천천히 내 생각이 정리되는 시간이었다.

마음도, 발걸음도 급하지 않지만 힘 있게, 같은 속도로 나아갔다.



책의 이야기가 마치 내가 쓴 일기처럼 자연스럽게 공감이 되어 생각을 정리하기 딱 좋았다.

오디오북을 듣다 보니 얼마 전 개그우먼 김숙 님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나 혼자 밥을 먹더라도 예쁘게 차려놓고 좋은 것 먹다 보면

"숙이 너는 예쁘게 차려놓고 잘 먹지?"

하면서 남들도 나에게 예쁘게 상을 차려준다더라 하는 말이었다.


나 스스로를 돌봐주지 않고 안아주지 않고 코너로 몰면 자꾸만 쪼그라든다.

그 쪼그라든 어깨와 눈빛을 나만 아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읽는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존중해주지 않는 사람은 타인에게 존중받기도 어렵다.

이렇게 날 위해 산책을 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고 하루를 돌아보며 일기를 쓰는 것도

그냥 해야 하는 투두리스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잘해주고 싶어서,

내가 나를 존중해 주고 귀 기울여 주는 방식으로 할때 쉽게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힘이 생긴다.

그렇게 해나간 일들로 얻은 좋은 결과는 스스로 해낸 증표가 된다.

내가 날 사랑한 흔적이 된다.

일상의 작은 부분들을 나를 돌봐주는 방식으로 애쓴 나를 알아주는 방식으로 해나가고 싶다.

그렇게 시선이 타인에게서 점점 내게로 바뀔수록 되려 내게만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타인을 사랑할 품이 생기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억지로는 사랑할 수는 없는 건가 보다.

내 안에 채워진 사랑으로 누군가도 안아줄 수 있나 보다.


오랜만에 걸으니 왜 진작 걷지 않았을까 후회될 정도로 너무 좋았다.

몸도 마음도 개운해졌다.

아마 이런 마음도 계속 산책을 하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하지만 그런 익숙함속에서 무뎌지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반복의 힘은 내가 느끼는 것보다 늘 언제나 크다.

회복은 새로움보다 반복에서 온다.

그런 지루한 반복이 언제나 날 성장 시킨다.


삶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쨍하니 밝았다가도 갑자기 비가 내리고,

이제 좀 살만하다 싶으면 또 힘든 일이 찾아온다.

이번엔 지키리라 했던 다짐들이 되는 것 같다가도 안 되고,

다 회복된 줄 알았는데 다시 무너지고,

사랑한다고 믿었는데, 어느 순간 미워지고,

미워졌다가도 다시 그리워지고,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또 흔들리고 만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렇고,

삶이 그렇다.


그것을 인정하면

그 수많은 모순들을 통제하려 애쓰는 대신

그 모순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삶은 늘 예측 불가하고 내 마음조차도 늘 같지 않지만 날 지으신 이의 손을 잡고 기대하며 신뢰함으로 걷는다면 예상치 못한 장대비가 내려도 그 나름의 매력을 즐길 줄 아는 여행자 모드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쉽지 않겠지만,

그렇게 살아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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