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테이블 위에 남은 침묵과 질문 하나

콜키지에서 시작된 이야기, 잊고 있던 기본을 떠올리게 했다

by 정선아
올 해 초 방문한 알자스 2스타 오베르주 드 일에서 L’Auberge de l’Ill



조금은 지난 일이지만, 파인다이닝 업계에 꽤 큰 파장이 있었던 사건이 있었어.

정식당이라는 유명 레스토랑에서 손님이 콜키지로 가져온 고가의 와인을 디캔팅하던 중, 직원이 동의 없이 약 100ml 정도를 따라 마신 일이 있었거든. 손님은 그걸 리뷰로 남겼고, 결국 기사로 이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불편함을 느꼈지. 그동안 조용히 쌓여왔던 업계의 문제들이 이번 일을 통해 드러난 것 같았어.

이 사건을 ‘와인킹’이라는 유튜버도 다뤘는데, 이건 단지 한 레스토랑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파인다이닝 전반에 깔려 있는 구조적인 문제일 수 있다고 하더라. 그 말에 나도 많이 공감했고, 작은 변화라도 함께 만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어.


파인다이닝에선 보통 소믈리에가 테이블과 약간 떨어진 곳에서 와인을 서빙하곤 해.

고객이 넓은 테이블에서 방해받지 않고 편안하게 식사에 집중하실 수 있도록 돕는 배려이기도 하지.

하지만 요즘 손님들은 파인다이닝에 대한 기대가 훨씬 높고, 더 ‘경험 중심적’이어서, 특히 직접 가져온 와인이라면 더욱 예민하게 느낄 수밖에 없어.

“지금 내 와인이 어디에 있는지, 누가 다루고 있는지, 상태는 괜찮은지” 이런 것들에 대해 알고 싶어 하시는 게 너무나 당연하잖아. 시간과 비용을 들여 찾아온 자리가 더 특별하게 느껴지길 바라는 마음, 이해해줘야 한다고 생각해.


이번 사건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남았던 건 세 가지였어.

첫째, 직원이 와인을 따라 마시는 게 문제라는 인식조차 없었다면, 그 '모름' 자체가 문제였다는 것.

둘째, 그 모름은 단순히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업계 안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관행과 환경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셋째, 정갈하게 다듬어진 공간과 음식, 기물은 충분히 고급스러웠지만, 정작 설명과 소통의 품격은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이야. 결국 조화가 무너진 거지. 겉으로만 고급스러워선 안 된다는 걸 다시금 느꼈어.


왜 이런 일이 생기는걸까? 내가 보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아.

하나는 체계적인 교육이 부족하다는 점이야.

대부분 선배가 하던 걸 그대로 익히다 보니, 기준도 제각각이고 매뉴얼도 없는 경우가 많거든.

나도 이제 선배가 되었지만, 긴 근무시간에 비해 부족한 급여와 교육 여건 속에서 누군가를 제대로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너무 잘 알아.

그리고 또 하나는, 고객과 소통하는 걸 어렵고 부담스럽게 느끼는 분위기야. 하지만 그게 어렵다고 계속 피하기만 한다면, 과연 이 일이 본인에게 맞는 길인지 조심스럽게 돌아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


나는 파인다이닝에서 약 3년 정도 일하다가, 2017년쯤 포시즌스 호텔로 이직하게 됐어.

가장 놀라웠던 건 손님과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는 점이었지. 호텔 초창기엔 “여긴 직원들이 말이 너무 많다”는 피드백도 있었을 정도니까. 직원과 손님이 서로 이름을 불러주고,

“레드 와인 차갑게 드실래요?”, “디캔팅 해드릴까요?”, “이런 잔 모양은 괜찮으세요?”,

“이 쪽에서 칠링해도 괜찮으실까요?”, “입맛엔 잘 맞으세요?” 같은 질문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나눠.

처음엔 “이렇게까지 해야 해?” 싶었지만 외국 손님이 많다 보니 작은 오해 하나가 곧 큰 불편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몸으로 배우게 됐어. 그 이후로 나도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는 습관이 생겼지.


지금도 와인을 서빙할 때면 늘 여쭤보게 돼.

“와인이 조금 덜 시원한데, 살짝 칠링해서 드려도 괜찮을까요?” “디캔팅 원하실까요, 아니면 바로 따라드릴까요?” 내 기준엔 디캔팅이 필요 없더라도, 손님이 원하신다면 꼭 정성껏 눈앞에서 해드려. 그리고 “정말 좋은 선택이셨어요”라고 따뜻하게 말해드리는 것도 잊지 않아. 그날 자리에 오신 손님이 기분 좋게 돌아가시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고 어려운 소믈리에 자격 시험을 주관하는 기관으로 유명한 Court of Master Sommeliers에서도, 손님이 와인에 만족하지 않으시면 웬만하면 서비스 처리하라고 가르쳐. 우린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해 공부하는 게 아니라, 기쁨을 드리기 위해 와인을 배우는 거잖아.


물론 늘 묻기가 쉬운 건 아니야.

비즈니스 미팅 중이거나, 어르신이 계신 자리, 외국 손님이 많은 경우엔 말 한 마디도 조심스러워지거든.

그래도 최소한, 오해는 생기지 않도록 기본적인 설명은 꼭 필요해. 서비스란 고객의 순간을 더나은 경험으로 만들어주는 배려이니까. 묻지 않은 채 생긴 오해는, 나중에 더 크게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더라.

불편하더라도 한 번 더 여쭤보고, 그만큼 더 믿음을 얻는 게 결국 더 멋진 서비스라는 걸 계속 배워가고 있어.


이번 일의 핵심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고객의 와인을 허락 없이 다루고 마셨다는 오만한 태도였다고 생각해. 그건 소통이 아니라, 누가 보아도 무례였지. 그렇게 했으면 안 됐어. 정말 ‘고급 서비스’를 지향한다면, 가장 먼저 갖춰야 할 건 태도의 기본기라고 믿어. 고객의 와인을 다룰 땐, 마치 소중한 이야기를 듣듯이 조심스럽고 정중해야 하니까.


요즘 고객들은 정말 많이 공부하고, 디테일에 민감한 것도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야.

그래서 이제는 "내가 얼마나 많이 아는가"보다, "얼마나 겸손하게 듣고, 이해하고, 필요한 설명을 준비하고 있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때론 놓치는 부분이 있더라도, 진심 어린 태도로 설명하고 전달한다면

손님도 그 마음을 느끼시거든. 서로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원래는 이랬어”보다 “지금은 이렇게 달라졌대”라고 말할 수 있는 유연함, 그 중심엔 매니저나 캡틴 같은 리더들이 더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하고.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대응하긴 어렵지만, 그때그때 마주한 순간에 성실하게 반응하고, 더 나은 방향을 고민하는 자세, 그게 진짜 멋진 서비스지.

그리고 이런 말이 있어—관성찰신(觀省察.身). 지나온 나를 돌아보고, 지금의 나를 살핀다는 뜻이래.

우리도 잠깐 멈춰서, 지금 이 순간의 우리를 함께 되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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