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같은 라벨, 시 같은 와인

라벨 위에 시를 남기는 사람, 알자스의 까트린 리스

by 정선아

와인을 좋아하다 보면 자꾸 라벨을 들여다보게 돼. 어떤 건 그냥 무심하게 정보만 딱 적혀 있고, 어떤 건 예쁜 그림이나 반짝이는 라벨로 눈길을 사로잡기도 하지. 그런 라벨들을 보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이 와인을 만든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일까, 아니면 장난기 가득한 사람일까? 아니면… 아주 섬세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르지.

카트린 리스의 와인을 처음 만난 건 정말 우연한 기회였어. ‘Dessous de table’, ‘Libre comme l’air’, ‘De grès ou de force’, ‘Empreinte’… 이런 문장들이 와인 이름이라니, 조금 놀랐어. 시 한 구절 같기도 하고, 마치 누군가의 일기 제목 같기도 했거든. 라벨엔 손으로 그린 듯한 귀여운 그림도 있었고. 이상하게도 마음이 움직였어. 이 사람, 왠지 따뜻할 것 같아 하는 느낌이 들었고, 결국 난 그녀를 만나러 알자스로 향했어.



알자스의 와이너리는 대부분 지하 셀러에서 시음을 해. 축축하고 서늘하고, 특히 겨울엔 정말 추워서 마음 단단히 먹고 가야 하거든. 그런데 이번엔 조금 달랐어. 2023년에 새로 옮겼다는 그녀의 와이너리는, 입구부터 완전히 내 예상과 달랐어. 따뜻한 레스토랑에 온 듯한 테이스팅 룸이 펼쳐졌거든. 부드러운 조명, 벽난로, 길게 놓인 나무 테이블까지… 그 안의 공기조차 포근하게 느껴졌어.

그 옆에 있는 작은 문을 열었더니, 조명이 켜지며 작은 배럴 셀러가 나타났어. 아주 깔끔하고 정돈된 공간이었는데, 벽면엔 와인병들이 오브제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어지럽게 쌓인 병 하나 없이 말끔했어. 순간 어? 나랑 좀 비슷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뭔가를 정리하고 꾸미는 걸 좋아하는 그런 성격. 그리고 드디어, 그녀의 와인을 맛보기 시작했어.

작고 따뜻했던 까트린의 셀러




첫 잔은 ‘Dessous de Table’. 오세루아랑 피노 블랑이 섞인 가벼운 화이트 와인이었어. 살짝 톡 쏘는 느낌도 있었고, 말 그대로 정말 테이블 밑에서 몰래 나누는 비밀스러운 한 잔 같았어. 라벨에 그려진 그림이랑도 너무 잘 어울렸고, 그래서인지 잊기 힘든 첫인상이 되었지.

그다음은 ‘De Grès ou de Force’. 이름부터 눈길을 끄는 화이트 리슬링이었어. Grès는 프랑스어로 ‘사암 토양’을 뜻하는데, 이 와인은 바로 그 토양에서 자란 포도로 만들어졌어. 그런데 이 이름엔 또 다른 의미가 숨어 있었지. ‘De grès ou de force’는 프랑스어 관용 표현으로 좋든 싫든, 자발적으로든 억지로든이라는 뜻이거든. 결국엔 이 와인을 마시게 될 거라는, 은근히 유쾌한 장난이 담겨 있었어. 맛은 향만큼이나 꽤 복잡했고, 입안에서 생동감이 넘쳤어. 첫 번째 와인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느낌이었달까?

세 번째는 ‘Libre comme l’air’. 공기처럼 자유로운 이라는 이름을 보고 가벼운 레드와인을 상상했는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어. 상큼하면서도 탄탄한 구조를 가진 레드 피노누아였거든. 숙성하면 더 멋질 것 같은 느낌이었고, 라벨 위에서 둥둥 떠다니는 포도 그림이 마음에 오래 남았어. 왠지 그녀의 자유로운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았어.

네 번째는 ‘Empreinte’. 지문이라는 뜻인데, 정말로 라벨 위에 그녀의 지문이 찍혀 있었어. 부드럽고 둥글둥글한 레드 피노누아였는데, 내 입엔 가장 편안하게 다가왔고… 왠지 그녀의 애정이 가장 많이 담긴 와인 같았어. 조용히 다정한 사람, 그런 느낌.

마지막은 ‘T’as pas du Schiste?’ 말장난 가득한 이름이었는데, 너희 집엔 쉬스트(편암) 없지?라는 뜻 이래. 이 와인은 쉬페르베르그라는 지역의 편암 토양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피노누아였고, 복합적이고 구조가 참 좋았어. 웃음이 났고, 그 웃음이 오래도록 입안에 남았어.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인데, 그녀의 가족은 라인강 근처에서 작은 레스토랑을 운영하셨다고 하더라. 궁금해서 찾아보니 아직도 그 가게 이름이 검색되던데…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계실까? 알자스에선 보통 가족 단위로 와인을 만들거든. 근데 카트린은 혼자 독립적으로 와이너리를 세운 케이스였던 거야. 어쩌면 그녀가 지나쳐온 풍경들, 손님들의 표정, 작은 꿈들이 지금의 와인을 만든 게 아닐까 싶었어. 단지 기술이나 시스템이 아니라, 살아온 감정과 마음으로 빚어진 와인. 그래서 더 특별하게 느껴졌어.

그래서일까, 난 와인을 추천할 때 라벨을 보여주는 걸 좋아해. 그 안에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냥 마시는 술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는지 보여주는 작은 창문 같아서. 특히 카트린 리스처럼, 라벨 하나하나에 삶의 조각이 담긴 와인을 만났을 때는 더더욱. 그녀의 와인을 마시고 나니, 이상하게도… 그냥 응원하고 싶어졌어. 그녀가 잘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와인을 알게 되면 좋겠어. 언젠가, 그녀의 포도밭 언덕 위에 앉아 다시 와인을 마실 수 있었으면. 조용히, 아주 따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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