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이 없는 와인, 여름엔 더 가볍게 즐겨봐
예전에 한 손님이 레드와인에 얼음을 넣어 마시는 걸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어. 와인은 정해진 온도, 잔, 음식에 맞춰 마셔야 한다고 배웠던 나로선 꽤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졌지. ‘와인을 망치고 있네…’ 근데 요즘의 나는, 더운 날엔 와인에 주스를 섞거나 탄산수 넣어 시원하게 마시기도 해. 그날의 기분, 입맛, 날씨에 따라 즐기는 방식도 바뀌는 거더라고. 결국 와인은 내 입에 맛있으면 그게 정답인 거니까. 그래서 오늘은 유럽 사람들이 여름에 와인을 얼마나 자유롭게 마시는지, 그 엉뚱하고 재밌는 이야기들을 들려줄게. 올여름엔 너도 와인을 좀 더 가볍고 시원하게 즐겨봐.
스페인 대륙의 남서 편. 안달루시아 지방은 원래 쉐리 와인으로 유명한 동네야. 그런데 여름에 진짜 자주 마시는 건 따로 있어. 바로 ‘틴토 델 베라노(Tinto de Verano)‘ 직역하면 여름의 레드와인이라는 뜻이지. 레드와인에 얼음을 넣고, 탄산수를 1:1로 섞는 아주 단순한 칵테일이야. 누구나 만들 수 있고, 진짜 부담 없이 마실 수 있어. 여기서 잠깐, 상그리아(Sangría)랑 헷갈릴 수도 있는데 둘은 꽤 달라. 상그리아는 과일, 브랜디, 주스 같은 재료를 넣고 숙성시켜서 마시는 좀 더 정성이 들어간 파티용 칵테일이라면 틴토 델 베라노는 그냥 시원하게 한 잔 툭 마시는, 정말 일상용 여름 음료야.
실제로 안달루시아는 햇빛이 정말 강하거든. 코르도바(Córdoba) 같은 내륙 마을도, 세비야 같은 대도시도 그냥 걷기만 해도 땀이 쭉쭉 나. 그럴 땐 테라스에 앉아 타파스와 함께 틴토 델 베라노 한 잔이라면 지금 이 순간이 그냥 여름인거지.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같은 큰 도시 바에서도 “틴토 델 베라노 하나 주세요” 하면 바로 만들어줘. 대단한 맛은 아니지만, 스페인 사람들이 여름을 버티는 아주 실용적인 방식이지.
스페인 중앙에서 북쪽 끝 바스크 해안으로 올라가면 분위기는 확 달라져. 여긴 남부의 후끈한 태양보단, 바닷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거리엔 축제 같은 분위기가 감돌아. 그 속에서 빠질 수 없는 게 하나 있지. 바로 ‘칼리모초(Kalimotxo)’ 레드와인과 콜라를 1:1로 섞어 얼음을 넣고 마시는 아주 단순한 음료야.
"와인에 콜라?" 하고 고개 갸웃할 수도 있는데… 이거 의외로 괜찮아. 콜라의 단맛이 와인의 떫은맛을 부드럽게 감싸주고, 탄산 덕분에 진짜 시원하고 가볍거든. 술맛도 연해져서, 특히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아.
보통 바스크 지역에서 나오는 내수용 레드와인이나, 가까운 리오하 지방의 템프라니요(Tempranillo) 품종 와인으로 만들기도 해. 오히려 너무 고급진 와인보단 조금 거칠고 텁텁한 와인이 칼리모초엔 더 잘 어울려.
다소 아쉬운 맛의 와인을 살리는 방법이기도 하고, 여름에 가볍게 즐기기에도 제격이지.
칼리모초가 지금처럼 널리 퍼지게 된 건 1970년대, 바스크의 항구 마을 알고르타(Algorta)에서 열린 한 지역 축제에서였어. 그때 실수로 맛없는 레드와인을 너무 많이 준비한 상황이었는데 그냥 내놓긴 애매하고 버리자니 아까워 누군가 "콜라를 섞어보자"라고 했고 그게 생각보다 괜찮았던 거야. 이 기지를 발휘한 두 청년의 별명이 칼리메로(Kalimero)와 모쵸(Motxongo)였는데, 둘의 이름을 합쳐서 ‘칼리모초(Kalimotxo)’라는 장난스러운 이름도 탄생했지. 원래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가 이때부터 공식처럼 자리 잡게 된 거고. 지금도 스페인 북부, 특히 바스크 해안 근처 바에서는 플라스틱 컵에 얼음을 넣고, 레드와인 콸콸, 콜라 척척 부어 만든 칼리모초를 쉽게 볼 수 있어. 고급스러운 맛은 아니지만, 맛없는 와인을 살려내는 창의성 또 와인은 이렇게 마셔도 괜찮아라는 자유로움이 이 한 잔에 담겨 있어.
프랑스 남부 해안, 니스(Nice)나 생트로페(Saint-Tropez) 같은 휴양지에서는 여름이면 꼭 나오는 와인이 있지. ‘로제 피신(Rosé Piscine)’. 직역하면 ‘수영장 로제’야. 이름부터 시원하지? 드라이한 로제 와인을 커다란 와인잔에 얼음 가득 넣고 마시는 방식이야. 대부분 코트 드 프로방스(Côtes de Provence) 지역에서 생산된 로제를 쓰는데, 그르나슈, 생소, 무르베드르 같은 적포도 품종을 중심으로 만들어. 색도 연하고 그 맛이 산뜻해서 얼음이 들어가도 부담이 없어. “얼음이 와인 맛을 망친다”는 말도 있지만 여기선 그런 고정관념, 해변의 모래에 묻고 그냥 마시면 돼. 이 로제 피신도 원래는 실수에서 시작됐대. 한 손님이 태양 아래 달궈진 로제 와인에 얼음을 넣어 달라고 했고, 바텐더가 “그럼 아예 수영장을 하나 만들어드릴까요?” 하면서 커다란 와인잔에 얼음 잔뜩 넣어서 줬대. 그게 해변 클럽에서 화제가 되면서 지금은 남프랑스 고급 휴양지의 상징 프렌치 리비에라(Côte d’Azur) 시그니처가 된 거지. 요즘은 아예 ‘로제 피신’ 전용 와인도 출시되고, 브랜드로도 팔릴 정도야. 그냥 로제가 아니라 남프랑스 햇살과 여유, 바다의 색감까지 담긴 시원한 한 잔이라고.
프로방스에서 북부로 올라가면 나오는 부르고뉴는 분위기가 좀 더 우아해져. 고풍스러운 골목과 돌담길, 세월이 쌓인 와인 저장고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라오는 게 바로 ‘키르(Kir)’야.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에 블랙커런트 리큐르(Crème de Cassis)를 몇 방울 떨어뜨린 식전주인데, 달콤 향긋하고 살짝궁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맛이지. 와인으로는 부르고뉴 지방 산 알리고테(Aligoté) 품종을 주로 사용해. 같은 부르고뉴 산 청포도라도 샤르도네보다는 알리고테 품종이 더 산도가 높고 가볍거든. 그래서 크렘 드 카시스의 진한 단맛과 만나도 맛이 뭉개지지 않고 깔끔하게 균형을 잡아줘.
이 칵테일은 2차 대전 직후, 디종(Dijon)의 시장이었던 펠릭스 키르(Félix Kir)가 고장의 와인과 리큐르를 섞어서 손님들에게 대접한 게 시작이래. 입소문을 타고 퍼지면서 결국 그의 이름을 딴 ‘키르’라는 칵테일로 자리 잡았지. 지금은 알리고테 대신 샴페인을 넣은 키르 로열, 시드르를 넣은 키르 브르통, 맥주를 넣은 키르 비에르 같은 다양한 변형도 있어. 근사한 식사 전 햇살 드는 창가에서 키르 한 잔 마시고 있으면 “아, 이게 프랑스식 여유구나” 싶어지는 순간이야.
이탈리아 북서부 베네치아나 베로나처럼 물기를 머금은 도시들은 정말 습하고 후끈한 여름을 보내. 그런 날씨에 테라스마다 꼭 등장하는 한 잔이 있어. 우리에게도 익숙한 형광빛 주황색 칵테일 아페롤 스프리츠(Aperol Spritz). 레시피는 간단해. 아페롤 + 프로세코 + 탄산수 + 얼음! 거기에 얇게 썬 오렌지 슬라이스 하나 툭 얹으면 완성이야. 살짝 달콤하고 쌉싸름한데 알코올 도수도 낮고 색깔도 예뻐서 술을 잘 못 마시는 사람도 벌컥 이게 되는 마성의 칵테일이지. 아페롤 같은 리큐르, 즉 아마로(Amaro)는 이탈리아 북부, 특히 피에몬테나 롬바르디아 같은 북서부 지역에서 발달했어. 알프스와 맞닿은 산악 지대인 이유로 옛날부터 약초나 뿌리, 껍질로 약술을 만들어 마시는 문화가 있었지. 수도원에서 만든 약초주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식전주, 식후주로 퍼지면서 지금의 아마로 문화가 된 거야. 아페롤, 캄파리, 치나르(Cynar), 페르넷(Pernet) 같은 쌉쌀한 리큐르들이 전부 이 동네 출신이지.
스프리츠(Spritz) 문화는 19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부터 시작됐어. 당시 북부 이탈리아에 주둔하던 오스트리아 군인들은 아마로에 물을 타 마셨고 그걸 독일어로 ‘스프리첸(spritzen)’ 뿌리다, 살짝 섞다는 뜻으로 불렀지. 이 습관이 이탈리아 현지에 퍼지면서 지금의 스프리츠가 된 거야. 허브 향을 좋아하면 휴고 스프리츠(Hugo Spritz)도 진짜 추천이야. 이건 엘더플라워 시럽에 민트, 라임, 소다수 그리고 역시 프로세코가 들어가. 원래 독일어권 남티롤(알토 아디제) 지방에서 생긴 칵테일인데 지금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여름 필수 음료로 사랑받고 있어.
드라이한 스프리츠만 있는 건 아니야. 달달하고 부드러운 칵테일도 있지. 대표적인 게 바로 벨리니. 베네치아의 해리스 바(Harry’s Bar)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흰 복숭아 퓌레와 프로세코를 섞어 만든 이 칵테일은 브런치에 딱 어울리는 은은한 단맛이 매력이야. 이후엔 딸기를 넣은 로시니, 라즈베리를 넣은 푸치니처럼 음악가 시리즈도 생겨났어. 마치 베네치아 카니발처럼 오색 가면이 떠오르는 다채로운 와인 칵테일들. 이름도 맛도 매력적인 이 한 잔으로 이탈리아 감성을 그대로 느껴보는 건 어때?
이번엔 독일의 남서 편, 대표적인 와인 산지인 라인헤센(Rheinhessen)과 팔츠(Pfalz) 지방의 시가지에 가보자. 이곳엔 파라솔이 펼쳐진 소박한 와인 바와 카페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테라스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 손엔 빠짐없이 바인쇼를레(Weinschorle) 한 잔이 들려 있지.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에 탄산수를 1:1로 섞은 음료야. 알코올 도수가 낮아 술처럼 느껴지지도 않고 갈증이 날 때 그냥 쭉쭉 넘어가지. 이 지역에서 주로 재배하는 리슬링, 뮐러-투르가우, 실바너 같은 청포도들을 이용해 만들어. 좋은 포도는 숙성용으로 남기고, 가벼운 것들은 쇼를레처럼 편하게 마시는데 쓰이지. 팔츠 지방에서는 두베글라스(Dubbeglas)라고 해서 겉에 동글동글 오목한 홈이 파여있는 유리잔에 따라줘. 비눗방울처럼 맑고 반짝이는 잔에 화이트 와인과 탄산수를 섞으면 연둣빛이 은은히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산뜻해진달까!
이웃나라 오스트리아에서는 이걸 게슈프리처(G’spritzter)라고 불러. 수도인 비엔나(Vienna)는 도시 안에 상업용 포도밭이 있는 세계 유일의 곳이야. 그래서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금세 포도밭 언덕과 전통 와인 선술집인 호이리게(Heuriger)가 펼쳐져. 거기 앉아 게슈프리처(G’spritzter) 하나 시켜놓고 풍경 바라보며 한 모금 마시면… 힐링 그 자체야. 조금 특별한 버전도 있어. 카이저스프리처(Kaiserspritzer) ‘황제의 스프리처‘라는 별명이 붙은 이 음료는 엘더베리 시럽이 살짝 들어가서 은은한 꽃향이 감돌고 클래식한 게슈프리처보다 한층 더 우아해. 광활한 포도밭으로 둘러싸인 빈 숲(Wienerwald) 언덕에서 카이저스프리처 한 잔이라면 황제라도 부럽지 않을 거 같은데?
포르투갈의 북부 도시, 포르투(Porto)는 언덕 위의 알록달록한 기와집들과 파란 타일 벽, 강을 따라 늘어선 다리들이 감성을 자극하는 도시야. 이곳에서 나온 꼭 마셔야 할 와인이 있어. 바로 포르토 토니코(Porto Tónico). 화이트 포트와인 + 토닉워터 + 라임 + 얼음의 조합이야. 딱 보면 진토닉처럼 생겼는데 마셔보면 훨씬 더 부드럽고 과일향이 살아 있다고. 화이트 포트는 주정강화 와인이라 특유의 단맛이 있거든. 그걸 토닉워터의 쌉싸름함이 깔끔하게 잡아줘.
1990~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포트와인 소비가 점점 줄기 시작했어. 특히 화이트 포트는 할머니 술 같은 이미지가 생기면서 젊은 층은 거의 마시는 않는 분위기였지. 그래서 현지 와이너리들은 고민했어. “좀 더 가볍고 쿨하게, 요즘 입맛에 맞게 만들 순 없을까?” 그렇게 등장한 게 바로 포르토 토니코야. 포트라는 전통적인 술이 순식간에 가볍고 시원한 여름 칵테일로 변신하게 된 전환점이었어. 포르투 시내 바에 가면 “포르토 토니코 하나 주세요” 하는 주문이 정말 흔하고, 맛 좀 즐긴다는 관광객들 사이에선 필수 음료처럼 자리 잡았어. 좀 더 깔끔하고 부담 없이 와인을 즐기려는 요즘의 취향을 똑똑하게 반영한 한 잔이자, 전통을 유연하게 응용해 낸 멋진 예시라고 할 수 있지.
그리스 와인을 마주하면 뭔가 다르다는 기분이 먼저 들어. 와인을 대하는 방식도 참 그리스 답달까? 자유롭고 낭만적이야. 그 대표적인 예가 레치나(Retsina)라는 전통 와인이야. 수천 년 전부터 마셔온 이 와인은 송진(파인트리 레진)을 넣어 발효한 포도주라 솔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게 특징이야. 소나무 아래 앉아 지중해 바람을 맞는 듯한 기분이랄까. 예전만큼 레치나를 많이 마시지 않지만, 수도인 아테네가 속한 아티카(Attica) 지방을 중심으로 여전히 전통을 지키는 생산자들이 있고 몇몇 바에서는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즐기기도 해. 토닉워터에 로즈메리, 레몬즙, 얼음 그리고 레치나. 솔향과 허브향이 어우러진 청량한 여름의 맛. 바닷가가 입 안에 들어오는 느낌이야. 그리스식 스프리처도 인기야. 아시리티코(Assyrtiko), 말라구지아(Malagousia) 같은 아로마틱한 드라이 화이트 와인에 레몬 토닉을 섞는 스타일인데 해산물이랑도 너무 잘 어울려. 그리스 페타 치즈와 올리브, 생선 카르파초와 함께라면 지금 여기가 그리스!
아이스크림처럼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무더운 날이었어. 맥주가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오늘은 와인 한 병을 집어 들어보자. 얼음? 넣어도 돼! 탄산수, 토닉, 과일 주스, 허브, 심지어 셔벗을 살짝 띄워도 괜찮아.
사실 와인의 본고장에서도 그렇게 마셔왔거든. 그게 바로, 그들만의 여름을 버티는 방식이었으니까. 이 순간 나한테 잘 맞는 방식으로 한 잔 즐겨봐. 어쩌면 너만의 새로운 여름 와인 레시피가 자연스럽게 시작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