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운 여행
필리핀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예전의 기억들은 마치 군데군데 찢어 놓아 내용을 알 수 없는 낡은 노트 같았다. 순간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수 많던 여행길들.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국의 아름다운 겨울과는 대비되는 뜨거운 여름의 날씨는 정신을 혼란하게 만드는 동시에 설렘을 동반했다. 3일간 여독을 풀고, 다시 계획을 다짐하고 차분히 가라앉히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동안 밀린 일기를 쓰고, 여행사진을 인화하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설 명절이었지만, 딱히 갈 곳도 없고, 기념일은 그냥 지나쳐도 매일 매 순간이 특별하길 바라는 사람으로서 오늘의 평화로운 시간을 만끽하고 싶었다. 늦은 아침에 싱싱한 소고기와 떡을 꺼내 떡국을 만들었고, 희한하게 생긴 모습이라도 영양식으로 만들려는 정성스러운 마음을 담은 접시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요리하는 시간은 또 하나의 기쁨이자, 소소한 가르침이다. 그렇게 가르침을 받고, 얻고 나면 내일의 나는 어느새 더 강건해지고 단단해진 모습으로 미소를 띠며, 무딘 칼날에도 아름다운 음식을 만들어 내겠지. 여행 이후의 공간을 이렇게 채울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굉장한 축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글을 쓰고 찍어온 사진들을 보정하며 순간의 향기를 기억해 내는 이 시간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인천공항은 가끔 놀러 오고 싶을 만큼 화려하면서도 잘 정돈된 느낌이 든다. 조명은 밝고, 딱 떨어지는 깔끔한 건축물 덕분인지, 크게 헤맬 일도 없다.
크리스마스는 이미 지났지만 아직 곳곳에 설렘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디지털 예술 표현을 해 놓은 상징물은 가까이서 바라보면 웅장하고 멀지 감치 떨어져 살피면, 네모난 조각물에 우주를 덧 입힌 듯한 느낌이 들어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된다.
공항에서 좋아하던 돈가스로 저녁을 마치고, 비행기 탑승 후 한숨도 잠들지 못한 채 비몽사몽, 숙소로 향했다. 이른 아침이었는지, 덜거덕 거리는 소리와 숙소 밖에서 들려오던 새소리, 문을 여닫는 소리, 화장실 변기물 내려가는 소리들이 뒤 섞여, 슬며시 짜증의 기색이 올라오던 차에 조식 소식을 들었고, 이내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듯이 뛰 노는 발걸음으로 숙소 앞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평소 짭짤한 음식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어서 필리핀 여행 중 음식에 대한 좋은 기억은 그리 없었으나, 팔라완으로 여행을 했을 때 배를 타고 들어갔던 섬의 딱새우맛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곳에서의 특별히 빼곡했던 밤하늘의 은하수도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자극적인 음식이 없었던 덕에 꽤 만족스러웠다. 그래서인지 살이 쪄서 돌아온 해외여행은 이 번뿐인 것 같다. 해외를 많이 나가보지는 않았지만, 다녀와서 보면 항상 2~3 킬로그램은 줄어있었는데, 보홀의 여행은 다녀온 뒤, 1 킬로그램이나 늘어있었다.
한국인들이 많은 관광지라 더 편안하게 느껴졌던 것은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대부분 한국인들이 너무 많은 여행지를 피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필자의 경우는 반대였다. 안심이 된다고 해야 하나? 밤중에 산책을 나갔다가 길을 잃었는데, 한국인 부부가 친절하게 지도까지 보여주시며 알려주신 덕분에 숙소를 찾아 들어갈 수 있었다.
집 앞 둘레길만 걸어도 여행길에 오른 모험가가 된 기분인 필자에게는 장거리 여행도 한국에서의 여행도 모두 같은 여행인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나라만의 특색이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야자수만 보아도 문득문득 한국이 아니란 것을 체감하기도 하지만, 어디서나 하늘은 있고, 구름도 있고, 자연과 생명이 곁에 있다는 점에서는 어디든 여행지가 될 수 있다는 마인드를 장착해서 그런가 보다.
자연을 사랑하기에 필리핀의 야자수와 한국의 소나무가 하나의 생명이고 나무이고, 오랜 세월을 땅과 함께 성장한 존재들로써 아름답게 보일 뿐이다. 감사했다. 초록의 색이 강렬한 빛과 만나 치유를 일으키고, 몸에 흐르던 저릿저릿한 느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만 같았다.
보홀의 여행은 망고를 남겼다. 필자는 망고주스를 잊지 않을 것이다. 이것 때문이라도, 자신의 엉덩이를 보여주며 애교를 부리던 갈색 고양이를 다시 보고 싶어서라도 한 번은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여행 내내 망고주스만을 마셨는데, 레스토랑의 망고주스가 가장 맛있었다. 세부 여행 때 호텔에서 먹었던 5000원어치 망고가 너무 그리워 이번 여행에서도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과일이란 게 왜 제철이 있나 싶을 지경이었다. 분명 견디기 힘들 정도로 더웠던 그때의 날씨만큼 덥지 않았고, 선선했으며, 망고는 정말 눈이 떠지지 않을 정도로 신맛이 강했다.
대신, 망고주스가 특별히 맛있던 가계들이 많았다는 것. 이번 여행에서는 망고주스를 마음에 가득 담고 왔다. 노랑빛의 화사한 망고 조각들, 그리고 부드러운 생크림의 식감, 진한 망고의 향. 입안에 퍼지는 고소하고 부드럽던 식감과 달달함.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점보 사이즈가 없었다는 것일 뿐. 주스의 맛은 완벽했다.
투어 없이 자유 여행만 하기로 했었지만, 첫날부터 3일째가 되는 날까지 투어와 자유여행, 자유시간을 병행하기로 했고, 나머지 여행기간은 자유롭게 다니기로 했다. 세부에서는 아는 단어를 총 동원해 혼자서도 이것저것 잘했던 것 같은데, 팔라완 여행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한 이후, 보홀 여행 시에는 땡큐만 연발했던 것 같다. 정말 아는 영어 단어가 땡큐 밖에 없는 것처럼, 반복만 하다 나중에 현타까지 와서 아예 한국말로 이야기했던 게 기억이 난다.
자유 여행도 좋지만, 그곳에 문화나 역사를 잘 모른다면, 투어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바클레욘 성당도 그렇게 방문을 하게 되었는데, 짧은 치마나 반바지의 경우는 출입을 막기도 하니 주의해야 한다. 그만큼 그 지역분들에게는 성당이란 곳이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웅장한 성당의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했다. “정말 화려하구나.”
외부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내부는 화려했다. 알록달록, 핑크핑크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왜곡이 일어난 사진이라 불안정하지만, 화려한 그림채와 건축물을 기록하고 싶었다.
어떤 문화와 역사를 지니고 있는지는 현지 가이드 분과 다니느라 자세히 들을 수 없었다. 필리핀에서 한국인 가이드로 활동 중인 사촌의 경우, 어딜 가나 역사나 전통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설명을 해줘서 알고 보는 재미가 있었지만, 이번 여행에서의 투어는 그냥 구경만 하는 느낌이었던 터라 가슴에 크게 남는 것은 없었다.
성당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개의 모습이 더 인상 깊었다. 필리핀 곳곳에 보이는 자유로운 개들의 모습. 성당 앞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투어는 또 다른 곳으로 필자를 데려다 놓았고, 선상에서의 식사는 수박 이외에 손도 대지 못했다. 지독한 차멀미와 수면부족으로 그날의 순간을 즐기지 못했던 것 같다. 비행기의 고도로 인한 통증과 멀미약 등을 챙겨갔음에도 역시나 수면부족으로 인한 차멀미는 배고픔도 느끼지 못하게 했다. 수박을 먹고 콜라를 마시면서 속을 달랜 뒤 배가 출발했고, 원주민들의 퍼포먼스를 볼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놓았다. 내려서 구경도 하고 함께 즐겨야 했지만, 수줍음이 많은 필자는 멀찌감치 떨어져 그저 미소 띤 얼굴로 눈이라도 마주칠까 어색하게 앉아있었다.
다행히도 로복강에서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았고, 다시 차에 탑승하여 실려가듯 어디론가 향했다. 투어의 내용을 알고는 있었지만, 한국에서의 여행과는 다른 익숙하지 않은 여행지에 당황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차를 타고 가다 돌연 관광객들이 차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 필자 또한 휩쓸려 내렸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내리고 싶지 않았다. 급한 용무가 있었기도 했고, 도로 한 복판에 내려야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던 것 같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본 친절한 현지 가이드 분께서 사진을 찍으라고 손짓했고, 못내 열심히 찍는 시늉을 해보았다.
맨 메이드 포레스트는 인공 숲으로 알고 있다. 이곳은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그 밖의 정보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사람의 손으로 숲을 조성할 수 있다는 것이 희망 아닌 희망처럼 느껴졌고, 숲의 향기는 인공이든 천연이든 언제나 옳다.
초콜릿 힐 전망대는 108 계단만큼은 아니지만, 등산 아닌 등산을 해야 하는 곳이었는데, 평소 산을 좋아했던 이력이 도움이 되었다. 수중 투어를 모두 포함해 기억에 가장 남은 곳이기도 했고, 그만큼 오래 머물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도 했지만, 푸른 초원을 좋은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었던 것에 만족스러운 날이었다.
초콜릿 힐의 역사에 관해 궁금하다면, 검색을 해보길 바란다.
함께 여행한 여행자들끼리 투어를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의견들을 내놓았고, 의견을 내놓자마자 더 이상의 투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드디어 자유여행이었다.
설레면서도 어린아이가 된 기분으로 곳곳을 살폈다. 이곳의 풍경은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만들기도 했고, 그저 오가는 오토바이들과 차들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꽤 오랜 시간을 힐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여행 4일째가 되니, 앞 동네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며, 졸리비라는 곳에서 그동안 말로만 듣던 스파게티도 즐길 수 있었다. 밍밍한 콜라인지 알 수 없는 음료가
식욕을 반감시키기는 했지만, 햄버거와 감자튀김은 꽤 훌륭한 한 끼 식사였다.
커플 여행객들을 바라보며 멀치감치 서서 사진 몇 장을 담아내고, 늦은 아침을 먹으려고 서성였다. 전날 밤의 풍경과는 확연히 다른 아침의 분위기는 길을 잃은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해변의 음식점을 찾아다니다 찾지 못하고 돌아 나오면서 얼마 남지 않은 여행의 날들을 눈과 마음에 한 편의 필름처럼 간직했다.
도로변으로 나온 뒤 필자의 스마트 폰은 거의 먹통에 가까웠는데, 요즘 세상에 안 되는 게 없나 보다. 검색하면 다 나온다고 한다.
검색 찬스로 어느 예쁜 식당에 들러 한 참을 기다린 후에야 식사를 마쳤다. 식당마다 주문을 하면 한 참을 기다려야 했는데, 그런 것 까지도 여행의 묘미라 생각하니, 여유로운 잠깐의 시간이 감사하게만 느껴졌다. 이 여행은 그저 그냥 가만히 바라보고만 싶었던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흐르는 대로 바라보고 싶었다.
양이 너무 많아, 소시지 하나를 포장하고 고양이에게 나누어 주었다. 신기하게도 빵이나 건강한 음식은 먹지 않는 걸로 봐서 이곳의 동물들은 꽤 잘 먹는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마른 체형이 걱정이 되어 다가갔는데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알게 된 사실은 고기나 소시지 같은 음식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잠시 사촌분과 만나 바다 체험을 했다. 필자는 전날 바다에 대한 공포감을 한 움큼 집어 먹은 터라 도저히 발 길이 떨어지지 않았고, 괜히 주변을 어슬렁 거리며 사진을 찍는 척, 물놀이를 하라는 무언의 시선들을 피해 다녀야만 했다.
멀리 보이는 바위가 꼭 하트를 닮은 듯하여, 한 장 간직해 본다.
여행의 마지막날 밤은 못내 아쉽고, 그리웠다.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이렇게나 그리운 여행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집순이인 필자는 1박 2일 여행도 몇 날 며칠밤 낮 고민하고 결정을 내리는데, 이번 여행은 대체적으로 매 순간 집중을 하며 보낸 시간들이 길었던 덕분에 오히려 그리움을 남겼던 것 같다. 하늘의 별을 이렇게나 자주 바라볼 수 있고, 그 별에 관해 대화하고, 바닷물을 먹고, 또 뱉어내면서도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은 삶이란 것이 영원성을 띠지 않은 시간이란 자각이 최근에 더욱더 강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감사했고, 고마웠다. 함께한 필자의 여행자들에게도 무한한 감사의 마음이 피어올랐다.
-만남과 헤어짐은 친구와 같아서 어느 날에는 절대 떼어 놓을 수 없는 듯 붙어지지만, 시간의 흐름과 변화하는 계절 속 서로의 그리움으로 남아 서서히 각자의 길로 접어드는 것처럼. 이 글의 시작은 새해 겨울이었지만, 글의 끝은 봄에 가까운 듯했다. 다음 여행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삶의 여행은 계속되니 아쉬움과 그리움이 남지 않도록 살아가야겠다.-
(2025년 1월, 보홀의 여행기. 모두가 진실을 말한다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