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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산을 쓴 소녀 Nov 22. 2024

지구 한 바퀴 4

대접하다

몸에 좋지 않은 기호식품을 멀리하기로 한다. 나에게 집중된 삶을 살기 위해 가장 먼저 떠 올린 건, 운동과 건강한 식습관이었다. 우울증과 무기력, 그리고 불안장애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그러한 아픔의 기억은 모두 모아 한 바구니에 담아 버리기로 한다. 이게 가능해진 건 불과 얼마 전부터이지만, 나를 찾고자 노력한 후의 변화라는 것에 이견이 없다. 자신을 찾는 과정에서 겪었던 감정의 혼란스러운 충돌 지점은 이기심과 자아존중감의 경계였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마음은 어릴 적 신념이기도 했고, 스스로 해내야 할 것들이 많았던 아이가 어느새 타인을 보듬는 역할에 충실해진 서툰 어른이 되어있었다. 자아존중감은 어찌 보면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한 뒤에야 맛볼 수 있는 신세계 같은 황홀감이라 생각하겠지만, 존중이란 마음은 언제나 이곳에 머물러 있다. 조금의 마음을 내어, 돌보아주는 것을 해본다. 자신을 있는 힘껏 돌보고 책임지겠다는 생각이야 말로 영적으로 성숙된 자의 결단이자, 자아를 존중하는 마음이 아닐까?




자신의 회복을 위해 최선의 힘을 다하고, 삶의 어귀에서 자신을 선택하여 몰입하는 행위에 어떠한 이기심도 보이지 않는다. 당신이 난관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시련과 방해들이 있을지라도 씩씩하게 웃으며 자신만의 길을 걷고자 선택한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드디어 삶의 키를 잡고 항해를 시작했다는 위대한 업적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시작을 응원하던 친구들이 당신의 한계를 지정하고, 수 없이 깎아내리기를 반복하겠지만, 그것 또한 신의 담금질이 시작했다는 신호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이러함을 깨닫기 전, 오래도록 실망감과 배신감에 치를 떨었었다. 그러한 에너지가 몸에 흐를 때마다 구석구석이 예민해지고 통증이 가시질 않았다. 무엇보다 가슴에 가득 찬 울분이 우울증과 각종 신경증을 가져왔었다. 남의 탓을 하면 곧 자신을 탓하게 될 날도 오는데,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오래 지나지 않아 지치게 된다. 어느 날 탓하는 생각의 형상을 놓아준다. 붙잡고 꼬리를 붙이며 추측하지 않고, 그대로를 바라본다. 명상의 힘은 이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하지만, 이러함이 단단해 지기까지 오래 걸리기도 하고, 가장 심플한 방법은 힘을 나게 하는 음악을 들으며, 러닝을 하거나 등산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을 도와준다. 타인에게 매몰된 시간을 다시 자신에게로 돌리는 행위들이다. 다도나 음악감상, 자연을 사색하는 행위 그 자체가 필자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산인 것처럼,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분명 자신만의 무엇이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이곳에 술이나 담배, 자신을 해치는 행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필자도 한참을 그렇게 방황했던 시기가 있었기에 그러한 행위들이 미치는 긍정적이지 않은 모순들을 너무나 잘 안다.


자신을 사랑하기로 결정했다면, 좀 더 친절해야 하고, 실수를 하나의 경험으로 보아주는 시각이 필요하다. 분명하게 이야기해 두지만,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과한 정보가 흘러들어올 테고, 실망할 일도 적잖이 생길 수 있다. 물론 건강한 사람을 곁에 두었다면, 이미 그들이 당신을 변화시키고 있을 테지만. 그 힘은 외부에서만 전달받는 것은 아니기에, 자신의 내면에 고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든든한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보통의 영감들이 꿈과 자연, 세상을 통해 보이는 경우, 내면의 대화를 이렇게 글로 표현하여 적어내기도 하며, 일기를 쓰기도 하고, 음악을 만들기도, 자신만의 색으로 표현해 내는 것들에 힘을 쏟기도 한다. 창조성이란 것은 인간 내면의 하나의 표현 수단이자, 자신만이 가진 색색의 가치가 된다.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해 나에게로 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빼앗길 수도 없으며, 빼앗을 수도 없는 것이 인간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 간의 개성을 이야기하고 그 뚜렷함에 당신의 매력이 숨겨져 있다. 그것을 사랑하길 바란다. 그것이 아픔일지라도 그러함을 숭배하거나 덧 입히는 것이 아닌, 순수한 아픔 그것 또한 품어 주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창조자의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누군가의 시간을, 혼자라며 울부짖고 통곡하던 프레임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과거에 놓아주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보자.

이러한 고통과 슬픔의 기억들을 잃을 때 마치 죽음을 떠 올리듯 아플 수 있겠지만, 그것을 놓아주는 선택은 지금의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야 가능하다는 것 또한 느낄 것이다. 모두를 위한 최선의 선택은 당신이 많이 웃고, 행복한 순간을 더 많이 떠 올리며, 잘 돌보고 스스로를 존중하고 대접해 보는 행위를 타인을 통해서가 아닌, 손수 해보는 것이다.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시답잖은 헛소리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을 알 테니까. 필자 역시도 독자들의 마음을 다 알 수 없다. 모두를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신의 영역일 테니까. 열심히 적어 내려가는 이 글이 “앎”과 닮아 있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필자의 깨달음은 앎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각자의 삶의 모양과 형태는 자신만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심오하지만, 어딘가 숨겨져 반드시 발견되기를 바라는 영혼의 울림 같은 것 같다.


더 이상 아는 것이 없다는 것에 무게가 실리자,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도 그저 바라 봄에 머물기를 반복한다. 필자는 모른다. 그저 나에게로 향하는 문을 열어둔 것뿐이다. 계속해서 받았던 영감은 자신에게로 향하는 문을 열게 도왔고, 그 문을 통과하도록 도운 수많은 인연들에 지금은 감사할 따름이다. 독자에게 진한 감동을 주는 글을 적기에 깨달은 바가 없지만, 한 가지,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에 작디작은 행위 일 지라도 그것은 너무나 아름답고, 위대하며, 자신을 위한 바른 마음인 것을 알기에 언제나 응원할 것이다. 수고 많았을 자신을 위한 시간을 기꺼이 내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충실하며 살아가 보자.


진정한 당신과 진정한 나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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