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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감각의 조합
신안여행

by 김경진

뜨거운 고요


2010년 여름, 이름도 그 당시에는 미지의 땅 같았던 전남 신안. 약간의 호기심만 가지고 엘도라도 리조트를 찍고 무작정 떠났다. 신안이라는 지역은 소금 외에는 아는 것이 없을 때였다.

증도에 다다랐을 때 펼쳐진 갯벌에는 무언가가 아주 많이 튀어 오르고 기어 다녔다. 차를 세우고 유심히 보니 말로만 듣던 망둥어들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징그럽기도 했다. 게와 망둥어, 짱뚱어들의 세상이었다. 이곳은 인구 밀도가 낮아 사람을 잘 보기 어렵다. 이들이 주인공 같았다. 발자국 소리에 민감한 게들이 순식간에 제 집으로 쏙 들어가는데, 그렇게 빠를 수가 없다.

짱둥어들은 어디 음악이라도 있는 듯 점프를 해대며 미끄러지듯 자유분방했다. 고요 속에 신나는 세상이 뻘에서 펼쳐졌다.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생소하고 신비로운 광경에 내 눈은 바빴다. 한여름 뜨겁고 끈적한 바닷바람은 한껏 내 얼굴을 때려댔다. 도시에 사는 우리에게는 잘 만나기 어려운 후끈하고 오묘한 공기가 낯선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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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숙연


“슬로우시티 증도.” 증도에 걸맞는 타이틀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사실 엘도라도가 아니라, 엘도라도를 바라보고 있는 바닷가 모래사장이었다. 무작정 캠핑 장비를 펼쳐 치기 시작했다. 아~ 아무도 없다. 그야말로 고요의 시대로 떨어진 느낌. 분주하게 살아야 하는 도시 청년들에게는 마치 은퇴자들이 슬로우시티로 유유자적한 삶을 찾아오는 곳인가 하는 생각에 너무 다른 세상에 괴리감마저 들었다. ‘잘 온 건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때. 해가 떨어지는 바다는 주황빛 물결로 가슴을 시리게 했다. 일행들, 그 누구도 저물어 가는 해를 두고 무슨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아름다워서.

마지막 주황빛이 흐려질 즈음 우리는 서둘러 라면을 끓여 먹었다. 넘어가는 해가 남긴 잔물결을 조명 삼아 후루룩 신라면이 그렇게나 맛깔났다. 어둠이 짙게 깔린 신안 증도 해변에서 누워 본 적 있는가? 우리는 돗자리에 몸을 맡기고 나란히 누워 별을 셌다. 쏟아지는 별들을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바다가 들려주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없는 까만 세상에 숙연함이 내려앉았다. 우주가 총총 찍어 놓은 별들을 작고 미약한 인간이 누워 바라보고 있노라니 자꾸 마음이 숙여졌다. 한참을 말없이 슬로우시티를 경험하다 누가 듣지도 않는데 소곤소곤 대화를 이어갔다. 압도되는 고요한 자연 앞에 목소리도 저절로 기어 들어가는 듯했다.

앙리 에드몽 크로스.jpg 앙리 에드몽 크로스 <별이 있는 풍경, 1905-1908>


눈부신 물리화학적 결정체


내 어렸을 때는 “신안은 노예”라는 방정식 때문에 뭔가 두렵고 무서운 지역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조금은 조심스러운 여행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태양과 바다가 만든 합작품인 소금. 그야말로 선글라스를 쓰지 않으면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하얀 결정체에 감격스러웠다. 자연의 물리·화학적 시스템을 인간이 단순한 현상으로 두지 않고 체계적으로 생활에 필요한 자원으로 얻어내 왔다는 것. 그 눈부신 지혜에 박수를!

이 거대한 자연을 이해하고 염전이라는 실험실을 야외에 펼쳐 놓고 환경에 적응하며 생존해 온 것이 다시 한번 놀라웠다. 염전 옆 소금창고는 나무로 지어졌다. 소금과 염전, 그리고 나무 소금창고, 뜨거운 태양까지. 이들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도시보다 뜨거운 태양, 후끈후끈한 바닷바람, 잘 만나기 어려운 비, 드넓은 갯벌을 몸소 체험하며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금빛 향연을 ‘신안’이라 말하고, 아름다움의 결정체라 읽었다.

나는 2022년 다시 그곳에 가보았다. 유별나게 구름이 많았고, 유난히 더웠으며, 여전히 고요 속 망둥어들은 갯벌 댄스파티라도 하는 듯했다. 여행하는 5일 동안 한 번도 쏟아지는 별을 구경하지 못했다. 오늘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신안이 내내 그리웠다. 슬로우시티 , 그대 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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