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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ramram Dec 16. 2021

넌 뭐가 적성에 맞는지 알아?

 대학에 들어가면 내게 맞는 적성을 자연스럽게 알아가게 될 것이라 확신했지만 역시 인생은 계획과 예상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내 적성은 어딘가에서 잡힐 것 같다가도 찾으려 하면 쉽게 보이지 않았고 드디어 찾았다고 생각해 실행에 옮기면 결국 작심삼일에 머무는 게 대부분이었으니까. 가끔은 이러한 내 성향이 당연한 거라고 자기 합리화에 들어가기도 했다. 우리나라 대국민이 서로 약속한 습관이라 단정 지으면서. 

 뒤늦게 대학을 가고자 결심했던 시기는 일본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을 때였다. 난방이나 두꺼운 이불조차 사치였던 2평 남짓의 기숙사 안에서 문득 대학에 가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사실 그리 거창한 이유도 아니었지. 누구는 공부가 하고 싶다, 나와 맞는 학업을 찾은 것 같다. 그럴싸한 답변을 내뱉기도 하겠지만 나는 단순히 대학을 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덜 떨어진 사람 취급받는 게 지겨웠을 뿐이었다. 남들 얘기와 시선을 무시한 채로 내 길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며 대학과는 거리를 두려 했지만 앞으로 살아갈 몇십 년 동안 더 그런 취급을 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니 결국 울분이 터지고 말았다. 왜 내 인생은 항상 이해하고 참아야만 되는 거냐고 다그치기도 하면서. 내 곁에 있던 누군가는 앞으로 한국 사회가 학력 위주의 사회가 아닌 능력 위주의 사회로 변화할 것이라는 아주 멋져 보이는 말을 건네기도 했지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헛웃음을 참지 못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그런 세상이 온다고?” 

 지금 생각해보니 대학을 간 건 정말이지 우발적인 결정이었다. 그리고 이 우발적인 결정은 내 인생에서 잘한 일로도 꼽히는 결정이었다. 순간적인 감정에 치우쳐 내린 결정이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만족할만한 결정으로 꼽히니 좀 아이러니 하지만 그때부터는 대학에 가지 않은 이유로 고난의 인생을 살게 될 거라는 하대의 시선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어쩌면 내 자격지심일 수도 있겠지. 

 늦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늦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도 많이. 나이를 핑계로 남들보다 조금은 성숙하다는 자부심을 가지며 대학 생활을 시작했고 5년이나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가 남들과는 다른 성찰을 해보려 했지만 대학 교육의 문제인지 나의 문제인지 (사실 나의 문제였겠지만) 진정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알지 못했다. 사실 알지 못할 만도 했지. 그동안 알려고도 하지 않았으니까. 

 대학에 대한 약간의 희망사항은 있었다고나 할까. 늦은 나이에 들어온 만큼 대학에서 인생에 대한 사소한 무언가라도 배울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기도 했지만 대학 교수들의 수업방식과 수업 수준을 보며 미련 없이 대학과의 정을 떼 버렸다. 어쩌면 애초에 붙어있던 정도 없었을 수도 있겠고.

 “당신 같은 것도 교수라고. 내가 이러려고 대학에 온 줄 알아?” 

 80명이 있는 수강생 앞에서 소리치고 나가버렸다. 나도 참 답도 없지. 그리고 이때 아마 깨닫기도 했을 것이다. 나 스스로가 보통의 인간은 아닌 것 같다고. 인간인척만 하고 있는 인간과 비슷한 부류의 한 생명체라고. 도대체 누굴 닮은 거야. 우리 집엔 이런 사람이 없는데. 

 한 번은 아주 엄한 벌을 받기도 했다. 평생 동안 건강한 몸뚱이 하나 믿고 겁 없이 살았건만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는 허리디스크 환자가 되어있었다. 허리디스크가 뭐 대수라고. 신체의 모든 고통은 전부 인내할 수 있다는 군대에서 배운 정신교육을 써먹으며 더 격렬한 운동을 하며 살아갔다. 하지만 한 달 뒤에는 응급차에도 혼자 몸을 싣지 못한 처지가 됐고 두 곳의 허리디스크 수술과 1년간의 재활이라는 실형을 받아버렸다. 일 주간의 입원, 한 달 동안 외출 없이 집에서 허리보호대 착용하며 생활, 수영장에서 맨발 걷기 운동, 4개월 후부터는 스트레칭, 최소 주 4회 재활센터에서 3시간 넘는 재활운동까지. 운동을 좋아하는 부류에 속했지만 그동안의 운동은 나름대로 취미생활이었다면 이때부터는 생존을 위한 운동이었다. 

 운동을 하면서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수술 이후 자연스럽게 생긴 습관 덕분에 절망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아빠 다리로 10분 이상 앉아있지 못해 바닥에 앉는 식당엔 가지 못했고 의자에도 한 시간 이상 앉아있으면 의무적으로 스트레칭을 해줘야 했으며 특히 등받이 없는 의자는 앉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아주 사소한 습관이었지만 앞으로 살아갈 내 인생에서 그런 거슬림과 불편함이 평생 따라다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최대한 좋게 생각해야 했다. 암에 걸려 죽는 것보다 나은 거라고. 

 대학에서 보내는 시간들 중에서도 값진 추억들이 있다면 그나마 풍류였다. 더 쉽고 간단한 말로는 술이요. 낭만적인 단어로는 청춘이라고도 하지만 결국 방탕한 철부지라는 단어가 더 익숙하다. 숙취가 심하면 대학 강의보다 해장 메뉴 선정이 인생에서 더 중요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졸업사진을 찍고 있었다. 철도 없지 정말. 후회란 걸 최대한 하지 않으려 하지만 굳이 인생에서 후회를 꼽자면 이때의 시간들이다. 원래 쾌락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후회하는 것이라고 했어. 탓할 게 없어 조금은 억지스럽게도 미디어를 탓하기도 했다. 욜로(YOLO)라는 망할 트렌드 때문에 착한 대학생 하나가 나쁘게 물들었다고. 착하다기보다는 세상을 잘 모르는 어리바리한 대학생이 더 어울리려나.

 졸업할 때쯤에는 슬슬 성찰을 좀 해야 되는 건지 괜히 성숙한 척을 하기도 했었다. 조금씩 겁이 나기도 했겠지. 어느 날은 단골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학생의 통화를 무심코 듣게 되었다. 들으려 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대화에 몰래 집중하고 있었다. 자소서 썼느냐. 어디는 서합(서류합격) 떴더라. 연봉이 얼마냐. 얼마나 뽑느냐. 채용인원 한 자릿수면 솔직히 가망 없다. 도대체 이번이 몇 번째 인지 모르겠다. 등등. 서로가 원하는 정보를 주고받고는 그다음 대화의 대부분은 하소연이었다. 이때부터는 티가 나지 않게 이어폰 볼륨을 다시 올렸다. 

 그에 대한 본능적인 경쟁의식이었던 건지 그때부터는 즉흥적으로 내 미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미래의 그림과 스치듯 지나간 적성에 대한 생각은 나를 2시간 동안 한자리에서 고요하게 만들기도 했다. 평소 같았으면 인생 될 대로 되겠지 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저리 열심히들 사냐고 혀를 내둘렀겠지만 이 날엔 모든 사람이 피하고 싶어하는 처절한 생활 속에 나 자신이 속해 있을 생각하니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앞으로 살아갈 사회가 지금보다 더 암울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리나라의 개인주의가 이기적인 성향으로만 쏠리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위선이라는 안개로 덮여있어서 티만 안 날 뿐. 가만 보면 나는 좀 더 긍정적인 사고가 필요해 보여.

 일단 내가 좋아하는 걸 생각해보았다. 글쓰기, 요리, 운동, 가만 보자. 술 마시는 것도 적성인가? 아니겠지. 먼저 글쓰기와 관련된 직업은 뭐가 있을까. 작가, 기자, 글쓰기 강사 정도만 떠오르네. 하나하나 노트에 적어가며 20년 만에 마인드맵을 그려봤다. 전망, 재능, 지속성, 수입 등을 따져보며 커피 잔을 비울 때쯤 그래도 작가와 기자가 상위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많은 부분에서 작가는 낮은 점수를 차지해 순위권에 못 들었지만 개인적인 열정이라는 주관적 요소가 높은 점수를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나 자신에게 이번만큼만 솔직해지자고 약속했다. 그러고는 물었다. 스스로 보기에 본인이 글 쓰는 거 재능 있는 것 같냐고.

 갑자기 숙연해졌다. 철학과 동기들의 졸업논문만 보더라도 나보다 글 잘 쓰는 사람들 수두룩했고(사실 글 잘 쓰는 기준을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필수적으로 필요한 끈기도 남들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열정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 조심스럽지만 꿋꿋하게 대답했다. 티끌 같은 자존심 하나로 글쓰기를 놓아주기 싫었겠지. 머릿속에서는 그거면 됐다고. 아니. 그거로는 역부족이라고 온갖 생각이 뒤엉킬 때쯤 답답한 마음에 산책을 시작했다. 막상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려보니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머릿속 잡념들이 오랜만에 다 같이 모였다. 다 같이 모이니 파티인 줄 알았겠지만 내 표정을 보고선 위로의 자리란 걸 실감했겠지. 

 뚜벅뚜벅. 미리부터 철저히 취업 준비 좀 해놓을걸. 뚜벅뚜벅. 자격증이라도 좀 따놓을걸. 뚜벅뚜벅. 공부 더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갈걸. 뚜벅뚜벅. 어렸을 때 책 좀 많이 읽으면서 글 쓰는 재능도 좀 키워볼 걸. 다양한 관심사를 좀 키워볼 걸. 뚜벅뚜벅. 아. 의사 쌤이 걸을 땐 하늘을 보듯 고개를 올리고 걸으랬어. 내 감정들은 계속되는 내 하소연에 지쳤는지 어느 순간 내 안에는 후회와 질책이라는 감정만 머물러있었다.

 스스로에 대해 사색하고 집중하는 모습이 새삼스레 어색했지만 그래도 내 직업에 대한 고민이니 정성스럽게 다루고 싶었다. 오후 4시쯤 나와서 걷기 시작한 게 어느새 저녁 9시가 되어있었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한 가지 문제를 계속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글쓰기를 내가 평생 동안 즐길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과 걱정이었다. 어쩌면 마땅한 방안이 없었기 때문에 처절하게 매달리고 있었을 지도. 그러다 맥락 없이 평소 잘 따르던 지도교수가 해준 말이 기억났다. 

 “사람이 글을 쓰는 것으로 업을 삼는다는 건 앞으로의 인생을 괴로운 고뇌의 시간으로 살겠다는 뜻이지. 근데 있잖아.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걸 못 끊어. 중독같이. 그걸 어느 순간부터 즐기기 시작하거든. 표출, 희열, 자기만족의 개념으로 말이야.”

 사실 속으론 코웃음 쳤다. 자기가 무슨 글에 대해 통달한 사람처럼 얘기하네. 기껏 써봤자 두 문장 보면 졸릴만한 철학 논문이나 주구장창 썼을 양반이라고 생각하며. 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은 시기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 말들을 다시 생각해보니 교수가 어떤 말을 하려 했는지 전달하려는 의미가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직 공감하는 척의 수준이지만. 

 무심결에 택시를 잡았다. 하루 만에 내 미래를 결정내리기엔 역시 무리라고 곱씹으며 한 발 물러날 셈이었다. 그러다 기사님의 입모양이 들썩거리는 걸 그제야 눈치챘다.

 “학교서 요 구석까지는 뭔 일로 왔냐고.” 

 “아.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요까지? 걸어서? 허벌나게 멀리도 왔네잉.”

 답을 못 찾은 내 표정을 읽었는지 기사님은 내 생각들을 캐묻지 않았다. 그러고는 연륜에 맞는 아주 농익은 조언들을 츤데레처럼 슬쩍 건네주었다.

 “그럴 땐 단순한 게 최고제.”  

 하긴. 인생 내 뜻대로 된 적도 없는데 이제 와서 철저하게 계획한다고 내 뜻대로 되겠어.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하고 싶은 거 안 하면 후회 안 할 자신이 있을까. 쉬운 문제였기에 바로 답이 나왔다. 평생 땅 치며 후회할 것 같다고. 그러자 머릿속에선 잠깐의 정적 후에 확인의 질문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정도면 내 고민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답이 나온 것 같다며. 그래. 내가 언제부터 생각이 그렇게 깊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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