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물을 먹고 자랐으니 이 나라가 추구하는 방향대로 성인이 되어가는 건지 남들과 똑같이 그저 그런 성찰로 속물이 되어가는 건지 내 주위엔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내 주위엔 내 말 뜻을 이해하는 것도 버거워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구나. 속물의 숨겨진 뜻을 모르거나 이미 속물이 돼있는 사람들뿐이니까.
나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뭐가 특별하겠어. 부모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한다는 핑계를 대고 있지만 나 자신에 대한 끈질긴 추궁 끝에 자백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돈이 안 되거나 사회에서 알아주지 않는 직업을 갖는다는 건 앞으로의 인생이 버거워진다는 것. 또 특출난 재능도 없이 관심 정도의 수준 가지고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겠다는 건 앞으로의 인생이 외로워진다는 것. 고집 있는 이상주의자의 결말은 뻔해보였다. 덧붙이자면 한국사회의 위선을 믿지 않기도 했고.
그렇게 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사회에서 실패자 취급은 받지 않을 만한 정도의 직업이면서 스스로에게 관심 수준에 머물러 있는 글쓰기까지 연관시킬 수 있는. 이 정도의 타협은 내가 신경 쓰고 있는 사회의 시선과 내 안에 깔려있는 욕망들과의 아주 적당한 조율이라고 판단했다.
나만의 투지인지 근자감인지 모르겠지만 스스로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아마 근거 없는 자신감이 맞겠지. 그동안의 세월을 돌아보면 내게 묻어있는 자신감의 부류는 마땅한 이유 없이 그저 기백으로만 밀어붙였으니까.
아직 긴 코스로 달려온 인생은 아니지만 남자의 인생에서 자존감이 가장 낮아질 때가 취업을 준비하는 시기라고 느끼기도 했다. 20대 중후반, 거울 속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인생에서 외형적으로 가장 찬란한 시절이라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청춘들에게 어울리는 단어들은 사랑, 자유, 추억까지 풋풋한 게 많이 들어있지만 그 시기에 이런 낭만의 의미를 우리는 도태로 이해했으니까. 그때의 시기에만 누릴 수 있는 소중한 낭만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인생에서 필요 없는 것들로 치부하기도 했지. 생각해보면 별 거 아닌 것들이라고. 생각해보면 나중에 해도 감흥은 똑같은 거라고. 원래 인간은 본인의 생각이 다 맞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나중에 또 후회하겠지만.
한 번은 외삼촌이 인생 조언이랍시고 내 미래를 그려주기도 했다.
“요새 순경 많이 뽑는다더라. 너 정도면 1, 2년 준비하면 되지 않겠어?”
처음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부엌에서 엄마가 몰래 듣고 있는 걸 눈치챘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어른과의 대화를 싫어하기도 했고. 어른들과의 대화는 서로 간의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대화니까. 아직 이 사회에서는 아무리 맞는 말이어도,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여도 나이 어린 사람이 자기주장을 명확히 전달한다는 건 버릇없거나 예의 없는 인간으로 취급하고 있으니까. 그저 적당한 정도의 울분만 토해내 버리면 된다.
“에이. 삼촌, 경찰은 좀 아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릇에 그 직업은 너무 작은 그릇이야. 그리고 나랏일은 나보다 더 훌륭하신 분들이 해야지.”
그러고는 인간의 귀도 내 마음대로 닫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들려오는 소리들은 “그래도 공권력은 무시 못 한다.”, “안정적이고 얼마나 좋으냐.”, “체격도 좋고 해병대 나왔으니 잘 어울리지 않겠느냐.”, “소방관보다는 그래도 경찰이 낫지 않겠느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지루한 얘기들만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삼촌의 말을 끊고 곧바로 그의 귀에 대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경찰에 대한 직업관과 내 미래에 대한 얘기들을 한 시간 넘게 프레젠테이션까지 할 수 있었지만 굳이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아마 대화의 초입에서부터 삼촌은 연륜과 경험이라는 요소에 기반을 둔 대화방식을 이어갈 것이고 나는 신념과 정서에 집중한 대화를 이어갈 텐데 생각만 해도 답답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으니까. 어차피 우리가 대화를 마칠 때면 삼촌은 내가 아직도 세상을 모른다는 결론에, 나는 이래서 인간은 지성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며 서로 한 숨만 푹푹 쉬고 있겠지. 미간의 수평선이 조금씩 흔들릴 때쯤 다행히 밥 먹으라는 엄마의 외침에 어색한 경청을 끝낼 수 있었다.
언론사 시험 준비는 아주 적당한 정도로 구색만 갖췄다. 남들하는 논술 준비나 작문 준비, 시사 스터디까지 매번 그랬듯 지치지 않을 정도로만 준비를 해나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모든 모임들이 알코올 중독자들의 모임 같았지만 그 분위기를 만든 것도 내 역할이 컸을 것이다. 입사를 위한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도 작문 모임에서 같이 연습하기도 했다. 어차피 자기소개서도 SF소설의 창작력으로 써내야 되는 거니까 서로의 소설 속 주인공들을 응원해주었다.
글에 대한 관심 덕분인지 어쩌면 평범한 취업준비생들보다 취업 준비를 즐기는 취준생이기도 했다. 그리고 모임에서 서로가 작문한 글을 공유하며 글에 녹아있는 개성들을 파헤쳐보는 것도 색다른 흥미요소였고. 이 친구는 묘사를 잘하네. 이 친구는 어휘력이 좋아. 이 친구는 확실히 아이디어가 개성 있어. 이 친구는 습작의 기본이 전혀 안 되어있는데? 혼자서 괜히 문학평론가 노릇을 해보는 것도 나름대로 배울 점이 있다고 판단했다.
매번 즐기는 수준에만 머무르고 간절함과 노력이 부족했는지 이어지는 결과는 참담했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무시하려 했지만 이 과정들은 결코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없는 구조였다. 아픈 곳을 계속 찌르니까. 매번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시험문을 두드렸지만 대부분의 시험에서 낙방했고 서류전형에서부터 입구컷을 당하면 소심한 복수랍시고 그 회사 인사팀에 장난전화라도 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졸업시기가 되고 취업을 한다는 게 복권에 당첨되는 확률과 비슷하다는 현실을 깨달을 때쯤이었다. 봄기운이 들락날락하는 4월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000씨 되시죠?”
다른 전화 같았으면 또 이상한 대출 상담 전화가 왔겠거니 했지만 이때 나는 왠지 좋은 소식일 것만 같은 느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여기 00일보 인사팀이에요. 000씨 1차 전형 합격하셔서 필기시험이랑 면접 일정 알려드리려고 연락드렸습니다.”
문자로 추후 일정을 보내주겠다는 답을 하고선 통화를 서둘러 끊었다. 30초 정도의 통화였다. 조금은 어리둥절했다. 이렇게 개인마다 전화를 돌리면 직원들도 참 귀찮겠다는 아주 쓸데없는 배려가 스쳐지나갔고 그다음엔 내가 너무 감정 없는 말투로 통화에 응했는지 걱정 비슷한 이상한 느낌의 찝찝함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막 환호하고 감사하다며 산뜻한 에너지를 선보였으려나? 그러다 고지식한 티를 벗어내지 못하고 내가 이 사람한테 왜 감사해야 해. 이 사람이 뽑아준 것도 아닌데. 그래도 예의상 신난 척 연기라도 할 걸 그랬나. 아니지. 내가 언제부터 그런 감정 표출에 적극적인 사람이었다고. 단순히 1차 전형에 합격했다는 전화였지만 별의별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동안 몰두해온 논술과 작문 준비의 악영향인 건가.
면접날이 되어서는 회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출 정도의 차림으로 떨린 심정을 가렸고 먼저 필기시험이 시작됐다. 경쟁자는 총 7명이었는데 그중 1명은 액면가만 봐도 경력직으로 보였다. 작문 시험은 ‘꽃’, ‘청춘’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쓰다 보니 쓸데없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지. 누군가가 보기에는 형편없는 글인데도 가끔은 나 혼자 만족하는 글이 있는데 이날 작문시험 글이 그런 경우였다. 어느 정도 글을 써보니 고작 2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시험장에는 연필로 글 써 내려가는 소리만 들리고 나는 잠깐의 틈을 타 사람들의 눈빛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습관처럼 딴생각에 빠져버렸다.
‘니들도 고생 꽤나 했겠구나. 같이 힘내자.’
그래도 서로를 응원하는 부분이 있다면 기자를 지원하는 취준생들은 글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 동질감 비슷한 게 느껴졌다. 글에 대한 어떠한 관심도 없는 사람이 기자나 해볼까라는 생각으로 기자를 지원하기는 쉽지 않으니까.
어느새 시험이 마무리되고 내 시험 결과보다는 다른 지원자들의 작문시험 첫 문장이 가장 궁금했고 결말은 어떻게 마무리 지었는지가 더 궁금했다. 보통 첫 문장을 보면 그 사람의 필력을 가늠할 수 있으니까.
“자. 시간 다 됐습니다. 연필 놓으시고, 뒤에서부터 차례대로 걷어주세요. 30분간 휴식하고 면접 진행하겠습니다.”
느끼하게 생긴 한 남자가 시험지를 챙기고 시험장을 나가자마자 옆에서 같이 시험 본 덩치 큰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하필 나였다. 대화하기 싫은데.
“아. 너무 어렵지 않았어요? 이런 시험은 또 처음이네요.”
적당히 받아칠 멘트를 고민하던 차에 내 뒤에 있던 여자가 고맙게도 대화에 껴들어주었다.
“네. 맞아요. 아. 이번에도 완전 망한 것 같아요.”
예상대로 내가 싫어하는 대화유형이었다. 무슨 기말고사 끝난 중학생들 같이. 언제부터였을까. 내 안의 본성이 그리 착한 심성은 아닌지 오지랖 넘치는 몇몇 사람들이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것을 그리 반가워하지 않는다. 한 때는 낯선 사람들에 대한 이유 없는 경계 때문이라고도 생각했지만 그것보다는 혼자 가만히 있는 것을 즐기는 게 더 분명했다. 분명한 변화였다.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렇게 오지랖 넘치는 인간이 나였으니까.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구구절절 전혀 필요치 않은 말들을 내뱉다 결국 헛소리들을 해댔고 간혹 지워버리고 싶은 실수들을 해버리는 게 나였으니까. 내 변화의 이유에는 본인조차 모르는 계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 스스로를 싫어하게 된 계기가.
“너는 어느 순간부터 너무 신중해지고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아. 예전엔 마냥 밝았는데.”
간혹 취중진담을 주고받다 보면 듣는 얘기다. 그 말들이 괜한 생각들로 잠기게 하지만 이유를 알지 못했다. 타지에서 혼자 있던 생활들이 이제 익숙해져 버린 건지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 건지 정말로 어떤 계기가 있는 건지 아니면 그저 세월에 내 몸을 맡겨버리는 건지 생각들이 전부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결국 정신적으로 지쳐서 그동안 연기해온 가식 섞인 성격을 감추지 않고 이제는 내 본래 모습대로 살아가고 있을 가능성도 높지. 내 본래 성격에 최근 유행하는 분노조절장애까지 조금 섞었을 수도 있고. 남들 하는 건 다 하고 살아야 하니까.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다. 몇 년 뒤에는 또 어떤 인간으로 변해있을지. 더 유별난 인간으로 돼있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어쩌면 내 본모습이 아직까지 숨겨져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